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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이한수
김영사 200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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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있는 역사

책소개

목차

시리즈 발간사
머리말
프롤로그

1장 황제의 딸
2장 여자의 질투는 끝이 없어라
3장 불행한 여인 ‘트로이카’
4장 몽골공주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5장 왕의 연인

에필로그
부록

저자 소개1

고려대 행정학과와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있다. 2008년 4월부터 1년 계획으로 일본 와세다대 외국인연구원으로 한일관계를 연구 중이다. 학술서 『세종시대 ‘가’와 ‘국가’』, 대중역사서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을 출간했고,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의 광복, 광복의 역사』(공저),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편』(공저) 집필에 참여했다. 논문으로 「조선초 개국주도파와 개국후 참여파의 정치사상적 갈등: 정도전과 하륜을 중심으로」, 「조선초기 변계량의 시대인식과 권도론」, 「세종시대의 정
고려대 행정학과와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있다. 2008년 4월부터 1년 계획으로 일본 와세다대 외국인연구원으로 한일관계를 연구 중이다. 학술서 『세종시대 ‘가’와 ‘국가’』, 대중역사서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을 출간했고,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의 광복, 광복의 역사』(공저),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편』(공저) 집필에 참여했다. 논문으로 「조선초 개국주도파와 개국후 참여파의 정치사상적 갈등: 정도전과 하륜을 중심으로」, 「조선초기 변계량의 시대인식과 권도론」, 「세종시대의 정치: 가와 국가의 긴장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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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6년 11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194쪽 | 354g | 150*220*20mm
ISBN13
9788934923510

출판사 리뷰

고려의 운명을 뒤흔든 세계제국 원나라 공주들의 파란만장 인생사!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부터 제31대 임금 공민왕까지 약 100년간 고려의 왕들은 모두 몽골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충선왕은 두 명, 충숙왕은 세 명의 몽골여인과 혼인했다. 고려국왕이 몽골여인과 혼인하고 몽골여인이 낳은 아들이 고려국왕이 된 현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심각한 주권 훼손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으며 정치적 독립성을 거의 상실했다. 고려국왕은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교체되기 일쑤였다. 충렬왕과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은 모두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했다. 그러나 무신정권 하에서 꼭두각시로 지냈던 백 년간을 생각하면, 몽골치하의 왕정복고가 왕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은 황제의 권력을 배경으로 남편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이 된 아들을 대신해 섭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정략결혼으로 만리타향에 시집온 서글픈 여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삶을 마감했으며, 게다가 유일하게 금슬이 좋았던 보탑실련공주(노국공주)는 이후 왕과 국가의 운명을 어느 고려왕비보다 치명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으니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은 이후 역사 속에서 까맣게 잊혀졌다. 몽골의 지배 아래 나라가 좌지우지되었던 시대를 잊고 싶어 하는 집단심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몽골에 저항한 고려의 항쟁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당시 고려를 지배한 몽골여인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들을 통해 세계제국 원과 고려의 관계를 읽으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얼굴을 한 역사가 드러난다. 이것이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의 이름을 지금 하나하나 다시 부르는 이유다.

여몽관계의 객관적 해석! 암흑시대 이면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

몽골 지배기는 잊고 싶은 수치스런 시대로 서술되거나, 삼별초 항쟁이라는 민족 자존적 모습만 강조되기 십상이다. 그 때문인지 몽골과 원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전이나 이후의 몽골과는 완전히 위상이 달랐던 '원'이라는 국가가 그냥 ‘몽골’이라 칭해지기도 하고, 심지어 ‘몽고’라는 잘못된 이름도 끈질기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든 대원제국의 역사적 진면모를 놓치게 되며, 원과 고려의 관계조차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1206년 몽골지역 유목민들을 통합하고 즉위한 칭기즈칸 이후, 3대 안에 모스크바를 포함한 동유럽 지역부터 티베트와 중국을 포괄하는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이 탄생한다. 조그만 동방의 나라 고려는 이러한 대원제국에 가장 끈질기게 맞선 나라였으며, 마침내 원에서 무력정벌을 포기하고 황녀를 시집보내 회유정책을 펼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고려 무신정권의 '결사항전'은 본디 애국의 의지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동기가 더 강했고, 강화천도는 사실상 백성들의 생명을 포기한 행위였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도피한 동안 본토는 초토화되었고 남은 백성들은 살육당했다. "몽고병사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20만6800여 명이요,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가는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는 『고려사』 고종 41년(1254)의 기록은 전쟁의 참혹함을 잘 보여준다. 어이없게도 몽골사신이 "하루에 죽는 백성들이 수천수만이 되는데 왕은 일신만을 아껴 만민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가"라며 고려정부를 비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백성들은 고려국왕이 황제의 사위가 되었을 때 "백년 난리 후에 다시 태평시절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환영했다. 이후 고려는 대원제국의 '사위 나라'라는 우산 아래서 거의 100년간 큰 전쟁을 겪지 않았으며, 원의 세력이 약해진 공민왕대에 이르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치명적 손실을 입어야 했다.

우리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제국의 문명을 전면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였다. 충선왕은 원 수도에 만권당이라는 개인 연구소를 설립하고 세계 최고수준의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역옹패설』 『제왕운기』의 저자 이제현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급 학자로 거듭났다. 최해, 이곡, 이색 등 뛰어난 고려인들은 원나라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원나라 관리로 근무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의 이념적 바탕이 된 성리학이 도입된 것도 이때였다. 이렇듯 역사에서 암흑시대는 때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남편의 정략적 협약으로 기구한 운명이 결정되다!

'팍스 몽골리카' 아래서 고려는 평화를 누렸으나, 그것이 국가로서 고려의 발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에든 원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왕의 지위는 언제나 위태로웠고, 언제 폐위될지 모르는 허약한 왕 아래 국가 전체가 불안정했다. 체제가 불안정한 시대에는 개인의 욕망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리고 국가 구성원들의 엇갈리는 욕망들 속에서 역사는 더욱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왕실의 보전을 위해 원의 후계자를 직접 찾아가 항복한 원종 이래, 고려의 왕들은 왕이라는 지위를 지키려 혹은 뺏으려 아버지나 아들과 치사한 쟁탈전을 벌였으며 그 지위를 얻고 나면 자신의 안온과 쾌락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개선 후 사흘간 거리에서 죽을 끓여 굶주린 자에게 먹이도록 했던 충선왕의 조치 자체는 칭송할 만하나, 당시 아버지 충렬왕과 벌이던 신경전을 고려해보건대 그 의도는 순수한 백성에 대한 염려라기보다는 과시적인 이벤트에 가까웠다. 신하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왕과 고려의 사직을 기꺼이 대국 앞에 내놓으려 했다. 충숙왕 대신 심왕 고를 지지하던 유청신과 오잠은 고려에 성을 세우고 원의 한 식민지로 만들기를 청하면서까지 심왕을 옹립하고 자신들의 이득을 좇았다. 그러나 원의 신하들은 그들을 “왕에게 죄를 얻고는 독심을 품고 드디어 제 본국을 뒤엎기를 꾀하여 스스로 편안하기를 기도했으며 본심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충성을 바치려는 것이 아니니 올빼미나 개와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 했으니 그리 부정확한 판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고려라는 국가든 몽골의 한 성이든 전란이 없고 먹고살만하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애국심을 논하기에 그들의 삶은 너무 고단했다.

일일이 원의 제약을 받는 정치에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던 고려왕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이 주색잡기와 개인적 욕망만을 우선시한 그들의 삶을 온전히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남편 충렬왕보다도 더욱 나랏일을 근심했던 홀도로게리미실공주나, 남편 충선왕의 난행에 평생 속앓이했던 보탑실련공주의 삶은 '몽골출신 왕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가려지고 말았다. 정략결혼이 본디 왕실사람들의 운명이라지만, 고려에서(혹은 몽골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로 진행되었던 고려왕자와 몽골제후들-남편과 아버지 간의 협약에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된 몽골공주들의 삶은 역사에서 가려졌으나 그들의 남편보다 더욱 기구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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