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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연표 첫 번째 마당 ‘3·1운동의 아들’ 조봉암, 사회주의자가 되다 두 번째 마당 조봉암, 간첩 누명 벗고도 독립 운동 서훈 못 받은 이유 세 번째 마당 조봉암은 해방 후 왜 공산당을 비판하고 박헌영과 갈라섰나 네 번째 마당 5·10선거 참여와 이승만 정부 입각, 어떻게 봐야 하나 다섯 번째 마당 농민·노동자 정당 추진하자 간첩단 사건 터트린 이승만 정권 여섯 번째 마당 전선에서 피 흘리는데 장기 집권 획책 부산 정치 파동, 그 부끄러운 민낯 일곱 번째 마당 호랑이 위에 탄 조봉암, 이승만의 라이벌로 떠오르다 여덟 번째 마당 사신(死神)이 어른거린 조봉암, 국회에서 뜻 펼 길마저 막히다 아홉 번째 마당 황당무계 사사오입 개헌이 부른 민주당의 탄생과 진보당의 태동 열 번째 마당 “못살겠다 갈아보자” 열풍과 조봉암 돌풍 거셌던 1956년 대선 열한 번째 마당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 부정 없었더라면 1956년 대선 결과는… 열두 번째 마당 평화 통일 꺼내면 목숨 걸어야 했던 때, 조봉암의 경륜과 용기가 그립다 열세 번째 마당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의 최후 대통령과 겨룬 ‘죄’, 대가는 죽음이었다 나가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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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점은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1950년대에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1950년대 상황을 모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 p.216
진보당은 ‘피압박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 세력의 전위’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진보당이 발당식을 했을 때도 피해 대중의 당이라는 걸 명시했다. 이건 공산주의하고 굉장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사례를 봐도 이런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없다. 진보 세력의 정강 등에는 대개 ‘노동자, 농민, 진보적 소시민 또는 당하고 있는 여러 소수 세력을 옹호한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조봉암은 피해 대중이라는 걸 명시했다. --- p.231 조봉암은 뛰어난 현실 감각과 대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나라 진보 세력 가운데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예컨대 평화 통일만 해도 그 당시에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이었고, 조봉암만이 강하게 주장할 수 있던 것 아니었겠나. 피해 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당시 일반 민중의 고통을 생각할 때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지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 아니었나. 그래서 조봉암은 정치적인 곡예를 많이 했고 여러 보수 세력과도 대화하고 관계를 맺었지만, 항상 지킬 것은 지키려 했고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려 했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 p.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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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진보 정책을 꾸준히 제시하고, 실천했던 정치인
조봉암은 뛰어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의 진보 세력 가운데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 3·1운동을 겪으면서 한 명의 한국 사람으로 재탄생한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때 제1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맹활약했다. 상해에서 1932년에 체포되어 7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1945년 1월경 헌병사령부 예비 검속에 검거되어 다시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뒤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고, 이 외에도 농민들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협동조합을 육성·장려하고, 농민이 직접 교육받고 실천할 수 있는 농사 훈련 기구 같은 것을 창설하려 했다. 이런 조봉암의 급진성을 이승만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반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권고에 의해 조봉암은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선 2위를 기록하며 이승만의 라이벌로 급부상하게 된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승만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었다. 956년 대선은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정 선거가 만연했고, 이 부정 선거가 아니었다면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 수도 있다. 조봉암은 당시 현실에 맞는 진보 정책을 꾸준히 제시하고,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려 했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진보당은 ‘피압박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 세력의 전위’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진보당이 발당식을 했을 때도 피해 대중의 당이라는 걸 명시했다. 이건 공산주의하고 굉장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사례를 봐도 이런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없다. 진보 세력의 정강 등에는 대개 ‘노동자, 농민, 진보적 소시민 또는 당하고 있는 여러 소수 세력을 옹호한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조봉암은 피해 대중이라는 걸 명시했다.” 그러면서 개성을 맘껏 발휘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했다. 또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북진 통일’만을 강변하던 시대에 ‘평화 통일’을 주창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그 당시에는 용기가 없다면 ‘평화 통일’을 얘기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중요한 점은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1950년대에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1950년대 상황을 모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조봉암은 1958년 1월 간첩죄 혐의로 진보당원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 당시 60세였던 조봉암은 형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억울하게 사형에 처해진 조봉암은 52년이 흐른 2011년에야 명예를 회복한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전원 합의 판결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냉전 체제에 도전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죽은 것 아니겠나. 사실 냉전 체제에 도전한 정치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조봉암을 역풍(逆風)의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역풍에서 풍이라는 게 뭐겠나. 냉전 체제 아니겠나. 냉전 체제를 거슬러 그것에 도전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 권력욕이 남다른 독재자 뉴라이트가 ‘국부’라고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은 어떤 대통령이었는가? 우선 권력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다른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1952년 악명 높은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발췌 개헌을 통해 정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다. 전선에서 장병들이 피 흘리고 도처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감수하던 때, 후방 부산에서 최고 권력자가 집권 연장을 위해 개헌을 한 것이다.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권력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거세게 일어난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은 점점 커졌고 1954년에는 5·20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자유당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 뒤부터 선거 때마다 갖은 부정을 저지르며 정권을 유지해왔다. 이승만에게 조봉암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민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해 자신에게 도전했으며, 게다가 1956년 대선은 자칫 뒤집힐 뻔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정적 조봉암을 제거했고, 자신의 집권 기간 내내 그랬듯이 그 뒤에도 영구 집권을 꿈꾸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났고, 민중에 의해 12년간의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