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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과 감사의 글
프롤로그 - 마침내 부를 내려놓다 1부 성공하기까지 1장. 우산팔이 소년 2장. 샌드위치맨 3장. 면세사업에 눈을 뜨다 4장. 듀티 프리 쇼퍼즈 5장.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 6장. 거센 폭풍우 7장. 샌드위치제도 8장. 홍콩의 악어 떼를 물리치다 9장. 일본을 끌어안다 2부 익명 뒤로 숨다 10장. 얼마나 부자인가? 11장. 지루한 버뮤다 12장. 한 곳에 모인 네 사람 13장. 부자인 자, 가난한 자 14장. 묻지 말고 말하지 말 것 15장. 아일랜드인의 행운 16장. 엄청난 돈을 벌다 17장. 부유하고, 냉철하며, 단호한 18장. 와이즈 맨 협약 19장. 물러남 20장. 건물만 보여 주세요 21장. 커피숍의 네 사람 3부 결별 22장. 은밀한 거래 23장. 의자 뺏기 놀이 24장. 회사를 둘로 나누다 25장. 잘못된 전략 4부 기부 26장. 위대한 작전 27장. 귀중한 마음 28장. 잡동사니 수집가 29장. 나라를 변화시키다 30장. 고국에서 자선을 시작하다 31장. 새로운 지역 발견 32장. 올드 턱스 33장.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34장. 낭비할 시간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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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이 되면서부터 피니는 벌써 돈 버는 일에 재능을 나타냈다. 피니는 친구 잭 블레윗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파는 것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피니의 동네는 이미 블레윗이 자기 몫으로 맡아 놓았기 때문에 다른 동네로 가야 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는 집배원을 도와 편지 부치는 일을 해서 얼마간 돈을 더 벌기도 했다. 그리고 눈이 오면 친구 무스 폴리와 함께 이웃 사람들의 차고 앞을 치웠다.
“내가 청소할 집을 찾아 25센트를 받으면 무스가 눈을 치우곤 했어요. 그리고 그 돈을 둘이서 나눠 가졌죠.” --- p.19 주문과 돈이 쌓여갔다. 피니는 이제 곧 부자가 되겠다고 밀러에게 큰소리쳤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영 턱스(변화를 갈망하는 역동적인 젊은이들이라는 의미: 옮긴이)’라고 불렀다. 그 미국 장사꾼 둘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현금과 수표를 주머니에 꽉꽉 채웠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면 돈과 수표를 스위스 제네바의 로이즈은행 계좌에 넣었다. --- p.42 일본인들은 면세가격에 정말로 놀랐다. 보호무역주의 정책 때문에 일본에서는 수입 코냑과 위스키에 220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했다. 도쿄에서 소매가격이 25달러인 위스키 한 병이 면세점에서는 6달러에 불과했다. 도쿄에서 50달러하는 코냑 한 병은 면세가격으로 10달러 밖에 안 되었다. 1년쯤 지나면서, 물방을 정도 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시냇물 수준이 되더니 나중에는 강물 수준이 되었다. --- p.89 꽤 오랫동안 주말에 도쿄에서 괌이나 사이판으로 날아가서 골프를 친 뒤 2백 달러에서 3백 달러어치 물건을 사고 다시 도쿄로 오는 가격이 일본에서 골프 한 라운드를 치는 것보다 더 쌌다. 이처럼 급격하게 확장을 하던 시기에 DFS는 또 캐나다의 토론토공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공항과 오클랜드공항에 첫 번째 면세점을 열었고,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상점을 열었다. 월스트리트가 후퇴하던 때에 그것은 눈부시게 성장하는 자본주의 산업이 되었다. 1968년에서 1974년까지, 월스트리트의 평균 주식은 70퍼센트 하락했다. 같은 기간에 DFS 배당금은 1년에 몇 백 퍼센트씩 올라갔다. 1977년에 이르러 연간 배당금은 3400만 달러였다. 피니와 밀러가 각각 1200만 달러를 가져갔고, 파커가 600만 달러, 토니 필라로가 100만 달러를 가져갔다. 모두 현금이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갔다. --- p.126 피니의 재산이 2억 5000만 달러에 이르던 1970년대에 피니와 하비 데일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제대로 된 자선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업 동료들에게 크게 생각해야 한다고 즐겨 얘기하던 피니는 그 똑같은 충고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면서 진지한 기부라는 개념에 대해 열심히 생각했다. 얼마 안 가 하비 데일은 피니의 마음에서 자라고 있는 생각은 확고하며, 피니가 사업에서 거두고 있는 성공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관대한 기부자가 되는 것뿐 아니라 부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고 돈이 자선사업에 쓰이는 일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47 재단 활동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공식적으로 정해졌다. 어떤 간청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기부는 익명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부를 받는 사람들은 그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야 했다. 기부를 받는 사람들 역시 비밀엄수 합의문에 서명해야 했다. 만일 그들이 애틀랜틱재단이나 척 피니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고 그 내용을 공개한다면 더 이상 기부를 받을 수 없었다. 애틀랜틱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비밀을 간직한 재단이 되었다. 척 피니는 기부활동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혔다. 그가 세운 건물에는 장식판이나 이름이 없었다. 성대한 감사 만찬도 명예 학위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재단 뒤에 피니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야 했다. 수령자들의 귀에 척 피니의 이름이 들려서는 절대 안 되었다. --- p.178 1986년에 이르자 DFS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류소매상이 되어 1년에 2억 5000만 달러의 판매액을 기록했다. DFS는 홍콩, 하와이, 알래스카, 괌에서 가장 큰 단일 소매상이 되었고, 싱가포르, 타이완, 마카오, 사이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달라스 포드 워스, 뉴욕, 보스턴에서도 소매상을 운영했다. 열두 개의 국제공항에 40개의 매장을 운영하면서 수수료로 1억 8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전 세계적으로 65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했고, 하와이에서만 1200명을 고용했다. 국제적으로 거대한 소매상이 되면서 일본의 100억불 관광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p.206 1997년 1월에 DFS 매각을 하면서 재단이 어쩔 수 없이 공개되었을 때, 피니는 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재단을 정리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피니는 당시 보도자료 초안의 여백에 이렇게 썼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재산을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문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니의 그런 결정에는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 p.420 “부는 책임을 동반합니다. 사람들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문제를 던져 주기보다는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자신의 부를 사용하려는 의무감을 느끼는지 어떤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부자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엇을 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나는 내 생각을 다른 부자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든 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모두 쓸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커다란 요트를 사는 데 아무 불편함을 못 느낀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 --- p.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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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4조원 기부, 억만장자가 아니었던 억만장자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사업가, 드디어 베일을 벗다. 한 언론인이 펴낸 한 권의 책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은 놀라움과 함께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편 철저한 비밀엄수를 조건으로 수혜를 입었던 사람들은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 원제: THE BILLIONAIRE WHO WASN'T(억만장자가 아니었던 억만장자)』라는 책에는 많은 부자들이 본받아야 할 척 피니의 아름다운 삶이 그려져 있다. 로이터통신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사업가는 마이크로소프트 황제 빌 게이츠 회장도, 전재산의 85%를 기부한 전설적 투자자 워런 버핏도 아닌 아일랜드계 자산사업가 척 피니(76)에게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보도했을 만큼 25년간 4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남몰래 기부하면서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철저히 비밀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의 숭고한 행위는 이제야 확실하게 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기부는 지금도 진행중이며, 아일랜드의 금언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를 인용하면서 남은 생애에서 나머지 40억 달러가 넘는 재산도 모두 기부하겠다고 한다. 집도 차도 없고 15달러(1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 척 피니는 집도 차도 없고 이코노미 클래스로 여행을 하며 25달러(1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검소한 사람이다. 지금까지도 그는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서길 꺼려한다. 그런 피니가 비밀로 간직했던 삶을 드러낸 단 하나의 이유는, 그 자신이 열정적으로 믿는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바로,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재산을 좋은 곳에 써야하는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내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내가 자랄 때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사람은 그가 자라온 환경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어느 정도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열심히 일했지만 부자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늘 살피고 도와 주셨습니다.” 부자가 되는 비결과 나눔의 감동을 주는 척 피니는 누구인가? 척 피니는 뉴저지주 아일랜드계 육체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우산팔이, 카드 판매, 골프장 캐디 등 소년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서 통신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기도 한 피니는 코넬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 머물지 않고 프랑스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면서 1950년대 지중해 항구에서 미국 선원들에게 면세 술을 파는 일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소매 면세점 듀티 프리 쇼퍼스(DFS)를 창업하여 전 세계의 ‘면세점 신화’를 만들어 가며 큰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이 시대를 잘 만났으며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되지 않은 걸 보면, 피니에겐 돈을 버는 데 남다른 뛰어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특별한 결정을 하는 데 일관성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그의 직관은 뛰어나서 아주 정확했다.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단추를 누르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고 그와 함께 일했던 친지는 말한다. 그는 허세를 싫어하고, 경제적으로 일을 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찾고, 끊임없이 이곳 저곳을 다니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움직이는 힘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에 더 좋은 방법을 적용해 보려는 창조적인 도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돈 버는 것은 좋아했지만, 돈을 소유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원하는 만큼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많은 돈을 쓰면서 살아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에게 부를 가져다 준 그 재능을 가치 있는 일을 찾아내고 추진하는 데 사용하고 싶었다. 1988년, <포브스>는 척 피니를 13억을 가진 부자로 미국 갑부 순위 23위에 올렸다. 그 것은 언론재벌인 루퍼트 머독이나 부동산 재벌 도날드 트럼프보다 더 큰 부자로 소개되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피니가 억만장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피니는 정말 억만장자였을까? 그는 명단과 함께 실린 이런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부호 명단에서 빠지고 싶다면 돈을 잃거나, 남에게 줘버리거나, 죽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변호사에게 이런 쪽지를 건넸다. "첫째 경우는 생길 것 같지 않고, 셋째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둘째만 남는다." 피니는 이미 이 둘째 방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1984년, 피니는 아무도 모르게 자선재단을 세우고 부인과 자녀들 몫으로 얼마간의 돈만 남기고 자신의 재산은 모두 넘겼다. 앞으로 생기는 재산도 모두 자선재단에 넘기기로 함으로써 그는 억만장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억만장자가 아니었다. 그가 ‘빈손의 억만장자’로 불리는 이유이다. 가족들도 이를 받아들였으며, 막내딸 다이앤은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자선재단을 통해 그는 미국은 물론 아일랜드, 베트남,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남아공, 쿠바에 이르는 세계 여러 곳의 보다 나은 삶과 질병 퇴치, 인권과 사회 발전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지만, 엄격하게 비밀엄수라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돈으로 세워진 수많은 학교와 병원, 도서관, 연구기관, 기숙사 어느 곳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은 하나도 없다. 돈을 의미있게 쓰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이들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움을 받아야 할 확실한 비전과 계획이 제대로 서 있어야 그는 기꺼이 기부를 한다. 그가 비밀을 지키기를 요구하는 데는 그의 겸손함이 더 큰 이유지만, 그의 기부가 세상에 알려지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무조건 도와 달라고 몰려들 것을 우려한 탓이기도 하다. 피니가 남몰래 해 왔던 자선활동은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1997년 잠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선재단에서 약속한 지원금을 제대로 지키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는 현금이 많아야 했으므로, 피니는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준 세계 최대의 면세점 체인인 DFS의 지분을 팔기로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동업자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바람에 DFS의 실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때까지 지원된 6억 달러 기부라는 익명의 자선사업도 밝혀진 것이다. 그는 "내게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에 기부하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돈은 매력적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피니는 “부자란 과시나 허영을 멀리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앤드류 카네기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았다. 피니가 지금까지 한 기부는 그가 우상으로 삼았던 앤드류 카네기의 기부를 이미 앞질렀다. 피니의 자선재단은 이미 40억 달러를 기부했는데, 그 가운데 20억 이상은 미국에 기부되었고, 10억 이상이 아일랜드에 기부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베트남에 각각 2억 달러가 훨씬 넘는 돈이 기부되었다. 피니는 이들 각 나라에서 가장 큰 액수를 기부한 외국의 개인 기부자가 되었다. 피니의 기부는 남아프리카, 영국, 태국, 쿠바, 버뮤다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돈을 쓰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돈을 의미 있게 쓰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황금심장을 가진 사나이 자선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저 돈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이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돕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니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재산을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하는 도덕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문제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40억 달러에 이르는 자산 전부를 앞으로 10년 동안 모두 기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살아 있는 동안의 기부’라는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애틀랜틱 필랜트로피즈가 목표를 이루어 정해진 기간 내에 정리를 하려면 하루에 100만 달러를 써야 한다.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2006년 재단 책임자인 프랑크 로즈는 하사관에게 나무를 심으라고 명령한 프랑스 장군 이야기를 직원들에게 해 주었다. 하사는 그 나무가 자라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군이 말했다. “그렇다면 점심을 먹기 전에 심게. 단 한 순간도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말이야.” 애틀랜틱 필랜트로피즈의 사업을 통해 척 피니는 그가 지녔던 부보다 더 큰 영향력과 감동을 주고 있다. “거물의 시계는 값싼 것일지 모르지만, 그의 마음은 순금이다.”라는 <스타렛지 신문>의 기사처럼 그는 황금심장을 가진 사나이이다. ‘버핏효과’의 시작은 척 피니이다 그는 사후 기부가 대세이던 미국 사회에 '살아 있는 동안 기부하기'의 모델을 제시해 미국의 부자들이 생전 기부를 하도록 영향을 미쳤다는 소리도 듣는다. 얼마 전 미국의 큰 부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재산을 기부하려는 새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러한 흐름은 지난 2006년 미국 2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이 재산의 대부분인 310억 달러를 빌 게이츠부부의 재단에 기부하기로 발표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버핏효과’로 표현되기도 한다.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이사인 빌, 멜린다, 워렌 버핏은 ‘가능한 많이, 가능한 빨리’ 전 세계의 건강과 교육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재단의 마지막 이사가 죽는 시점을 50년으로 보고 그 이전에 모든 자산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의 기부는 이미 25년 전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4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기부한 척 피니가 시작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과 달리 그의 이름이 낯선 것은 그가 모든 자선사업을 절대적인 비밀엄수를 조건으로 실행해 왔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건강하고 가장 부유한 세대가 이제 자선사업의 황금 시기로 들어가고 있다. “정해진 기간에 재단의 자산 전부를 기부하는 일은 새롭게 나타는 경향입니다. 더 많은 재단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더 많은 재단들이 살아 있는 동안의 기부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재단의 설립자들은 그들이 직접 좋은 일을 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척 피니는 이러한 영역의 개척자이고 사람들은 역할 모델들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 롯데호텔과의 승부에서 그의 직관이 흔들리다 뛰어난 직관으로 그의 결정이 실패를 맛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를 손해보게 한 경쟁자가 바로 한국의 롯데호텔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겐 흥미롭다. DFS의 소유주 네 명은 하와이매장 입찰 신청에서 엄청난 계산 실수를 저질렀다. 그 입찰은 1986년에서 1991년까지 5년 동안의 매점 운영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하와이는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와이 작은 매장에서의 판매액이 연간 4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총 수입이 0.1제곱미터당 2만 달러라는 얘기로, 뉴욕에 있는 고급 백화점 블루밍데일에서 1년에 0.1제곱미터당 800달러의 수입을 거두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입찰 금액의 2퍼센트를 보증금으로 내기 위해, 그들은 여러 은행에서 수표를 끊었다. 그리고 입찰 준비를 하고 있던 라이벌 한국의 회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마지막으로 모여 입찰가를 얼마로 할 건지 결정해야 할 날이 왔다. 네 사람은 자료 분석을 하며 입찰액을 계속 조금씩 올렸다. 소유주 중 하나인 알란 파커는 그날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은 피니가 주도했습니다.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높은 입찰가를 정하려 했습니다. 그 방에 모인 사람들 중 입찰에서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척 피니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입찰액이 결정되었다. 피니가 나머지 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강력했고, 피니의 직감은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몇 발자국 앞서 있었다. 네 사람은 마침내 11억 5100만 달러로 결정했다. 그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전 세계 면세점 입찰액 중 가장 높은 가격이었다. 상상조차 힘든 액수였다. 진짜 지폐로 쌓아놓으면 높이가 115km가 넘는 액수였다. 5년 동안 두세 개의 가게를 운영하는 대가로 3일마다 200만 달러 정도를 하와이에 바친다는 얘기였다. 전 세계에 있는 DFS 매장 전부에 대해 그 전해에 지불한 액수 1억 8500만 달러의 여섯 배가 넘는 돈이었다. 그 입찰액에 대해 강경한 반대도 있었지만 그 의견은 무시되었다. 교통관리국 사무실에서는 먼저 봉해진 입찰 신청서를 개봉하고 입찰 액수를 칠판에 기록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진짜 라이벌이 있었다. 서울의 롯데호텔이었다. 롯데호텔은 서울에 쇼핑 단지와 면세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입찰액은 3억 7200만 달러였다. 결국 DFS에서 7억 7900만 달러를 더 썼다는 얘기였다. 그 결과를 보고 DFS 소유주들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10억 달러의 4분의 3을 그냥 버린 거죠.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었어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돈을 너무 많이 번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입찰로 매장 운영 허가를 얻은 것 말고도 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들과 감히 맞붙어 입찰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1988년, 하와이에서 그 엄청난 입찰을 한 다음인데도 소유주들은 면세매장의 수익금에 대해 4억 달러라는 배당금을 받았다. 이 중에서 척 피니의 재단은 1억 5500만 달러를 받았다. 5년 후에, DFS는 경쟁자 없이 4억 100만 달러에 4년 간의 하와이 매장 허가를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