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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지렁이, 내 형제
꾀꼬리 소리 / 참꽃 나라 / 보리매미 / 구름 / 돌을 주우며 / 파란 비단하늘, 새빨간 저녁노을을 보는 꿈 / 개 이야기 / 독수리와 까마귀 / 사람이 살아날 길 제2부 감나무 이야기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 새잎 / 감꽃 / 푸른 잎, 푸른 열매 / 단풍일 / 감 / 홍시 / 홍시와 단풍잎 /담은 감 / 곶감 / 감잎차 / 나무, 그 야생의 천성 / 아름다운 가지 / 사람 소리 듣고 여는 감 / 나무마다 다른 감 맛 / 감나무의 수난 / 감나무는 죽어서…… 제3부 감자와 고양이와 사람 이야기 권정생 선생님께 / 된장이나 김치가 먹고 싶어지는 동시 / 작가들의 직무유기, 그리고 윤동주의 <굴뚝> / 동시 <감자떡> / 윤석중 동요 <옥수수 나무> /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카쓰시카의 그분> /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나? / 글쓰기의 문제 / 매미 잡는 어른 / 무덤으로 가는 그날까지 |
李五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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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이 쓰는 "내가 할 말, 내가 부를 노래"
--- 김영표(zero@yes24.com)
국문학이나 창작을 전공하려는 이들에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오덕씨의 글일 것이다.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외래어들은 그의 책 속에서 세밀한 한 부분까지 적발되어 고발당한다.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너무나 입에 배어 버려서 무심코 써지고 뱉어지는 일본투나 영어 번역투 말들은, 그것들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 글 바로 쓰기』시리즈 등 우리 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너무도 확고해서, 일부 평자들에게는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나무처럼 산처럼』역시 웃음이 너그러운 옆집 할아버지의 모습 속에서도(아이들이 쓴 '감'이란 시를 보면서 좋아하는 모습은 마치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 같다.) 여전히 기력을 잃지 않는(그의 나이 벌써 78세이다) 꼬장꼬장한 남산골 선비의 모습 또한 담겨 있다.
이미 서구에서는 '환경(운동)'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구 한 편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개짓이 반대편에는 태풍을 몰고 온다는 허황되게만 보이던 사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먼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겨지던 대기오염은 '엘리뇨' '라니냐' 등 환경재앙을 몰고 와 한 해에도 수백, 수천의 인명을 앗아가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햄버거 제국' 맥도널드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서 나오는 1회용품이 일으키는 환경오염 때문이기도 하다. 이오덕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삶이 바로 그것. 그에게 자연은 세상 모든 것이다. 단순히 나무와 산이 아니고, 돌맹이 하나 감나무 한 그루 그리고 집에서 기르는 개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역시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책에는 유독 '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를 보신용으로 쓰려고 잡다가 놓친 뒤에도 다시 집으로 들어온 그 개를 기어이 때려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굳이 먹지 않아도 될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매섭다. 개는 불쌍한 동물이다. 개와 인간의 관계는 지배·피지배의 전형적인 구조다.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개는 주인을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개의 특성을 이용한다. 어른들은 몽둥이 찜질을 해서 '말랑말랑'해진 개고기를 먹지만 아이들은 그런 모습에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면서도 점점 어른들을 닮아간다. 이렇게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자연을 거역하면서부터 돼 먹지 못한 세상이 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일갈하며 "이 소름끼치는 인간들의 끝장"을 예언한다. '자연과 사람이야기'라는 말랑말랑한 부제목이 붙어있는 산문집이지만 결코 쉽게 넘길 수만은 없는 통찰과 사색이 예리하다. 한 평생을 한길로만 내달려온 지은이의 열정이 느껴진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세상 모든 일은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존재하고 있고 왼쪽과 오른쪽의 가장 자리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그의 사상은) 하나의 기준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 책 속에는, 주인 잃은 고양이를 돌보는 이가 쓴 "많든 적든 들판에(쫓겨다니는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은 남들한테 좋게 안 보이고, 외톨이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들끼리 사이좋게 원만하게 지내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약한 것들에 대해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 겉모양 뿐으로,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면 그 감정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외톨이가 되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대범하게 들어 넘기도록 해 주세요.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만, 오랜 세월을 지내면 그다지 괴롭지 않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몸을 위한 것입니다. 좋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마음을 태우면서 몸을 망쳐서는 안 되지요."라는 내용이 나온다 ―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유가 전적으로 '애민정신'에 있다기 보다는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였다고 해서 오늘날 그를 욕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생각이 다소 완고하고 딱딱하게 보인다고 해서 고루하고 편협하다고만 몰아 부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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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죽이고 개를 죽이고, 매미고 개구리고 뱀이고 너구리고 곰이고 닥치는 대로 잡아죽이기를 즐기는 이 몹쓸 인간이란 괴물이 스스로 멸망당할 날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것은 나 같은 사람까지 예언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무덤으로 가는 그날까지,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내 목숨은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을 경고하고, 가엾게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겠습니다.
지루한 글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 쓴 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소름끼치는 인간들의 끝장을 부디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 p.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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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돌도 자연이요, 자연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 그 자연에 거역할 때 그는 드디어 무자비한 자연의 복수를 받는다. 사람답다 함은 자연을 지각하는 사람의 가장 사람다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빌딩을 쌓아 올리고 살인무기를 만들기에 미쳐 있는 오늘날의 인간 문명이 그 언젠가는 자연의 노여움을 받아 마치 홍수에 휩쓸려가는 어린애들의 장난감 같은 신세가 되지 않고 어떻게 견딜 것인가?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자연에 거역하는 인간의 끝장을 예언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난다. --- p.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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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주우면서 또 한 가지 이상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색깔, 모양, 무늬 같은 것을 살피면서 어떤 돌이 좀 마음에 들 듯하면 눈여겨보다가, 혹시 보이지 않는 쪽이 생김새가 나을까 빛깔이 고울까 하여 그걸 손으로 뒤집어보기가 예사인데, 그러면 그때마다 실망한다. 하번도 뒤집어본 쪽이 색깔이나 무늬가 더 고와본 적이 없다. 내가 돌 백 개를 줍는 동안 냇가에서 뒤집어본 돌이 아마 수천 개가 되었을 터인데, 그 가운데서 단 한 개의 돌도 땅에 붙었던 쪽이 위로 향했던 쪽보다 나은 적이 없었다는 기억이다. 그래 나는 이 사실을 깨닫자 하도 이상하고 두렵기까지 해서 그 다음부터는(여전히 궁금해서 돌을 뒤집어보기는 하지만) 결코 아무렇게나 손에 들었던 돌을 던져 버린다든지 뒤집은 채로 발 밑에 떨어뜨려 놓는다든지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고이 놓아두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떠내려왔는가. 수십 리, 수백 리 상류에서 굽이치는 물줄기를 따라 서로 부딪치며 굴러온 돌들, 그 돌들이 물이 빠지자 저마다 지닌 그 고운 모습을 드러낼 때, 위로 향해 있는 쪽이 돌의 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연의 얼굴이요 하늘의 뜻이 아닐는지? --- pp. 4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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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청년
지난해 가을, 9.11 사건과 관련한 어떤 이의 발언을 격렬하게 비판한 며칠 후, 이오덕 선생이 내 글을 읽었다며 전화 메모를 남겼다. 화가 나신 건가 싶었지만, 설사 야단을 맞더라도 이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싶어(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아이들과 한국의 말을 위해 가장 비타협적으로 싸워온 전사다.) 다음 날 일찌감치 전화를 드렸다. 그는 내 글을 잘 읽었다며 말했다. “사람이 몸을 움직여 일도 하고 해야 바른 정신을 가질 수 있는데, 늘 앉아 책만 읽고 생각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지 싶습니다.” 그는 그 일의 본질을 검소한 한마디로 꿰뚫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가 나를 야단치지 않아서, 논란에 빠진 내 글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의 정신이 건재함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존경할 만한 정신들은 대개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아무것도 분명히 판단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총체성을 늘어놓는’ 걸레가 되었다. 나는 그도 그렇게 되었을까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겨울이 시작할 무렵 나는 그의 거처를 찾았다. 동그란 산들과 동그란 물들. 충북(의 풍경은 곧한국의 풍경이다) 음성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길목, 산 구비를 비껴 돌로 지은 집에 그가 살았다. 그는 세 해 전 건강이 나빠져 아들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어림잡기 힘들 만치 많은 책들이 밀림을 이룬 그의 서재 한켠에 놓인 낡은 소파에 그와 마주앉았다. “제가 말도 잘 못하고… 아이구, 인터뷰 그거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의 생각이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로 간신히 그를 설득하고, 녹음기를 켰다. 그가 내놓은 차를 마시며, 나는 서사시를 읽듯 천천히 그의 곧고 광활한 정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와 글로 사는 적은 사람들이 몸과 말로 사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상을 반대한다. 말하자면 그의 생각은 매우 계급적이며 급진적이다.(그는 ‘계급’이나 ‘급진’ 같은 개념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하긴, 계급이나 급진이라는 말은 계급과 급진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그가 아이들의 문제에 일생을 다 바친 이유 역시, 아이들의 바른 정신이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모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그렇듯 그는 늘상 오해에 휩싸여 산다. 그는 완고한 우리말 전용론자라 오해 받곤 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젠 사용하지 않는 생경한 옛말들을 우리말이랍시고 사용하는 일은 오만한 엘리트주의라 여긴다. 그는 모든 우리말에 완고한 게 아니라,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담긴 우리말에 완고하다.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질문을 했다. “선생이 말하는 말의 혁명은 결국 정치 혁명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결국 그런 셈입니다.” 조용히 미소 짓는 그의 주름진 얼굴 왼편으로 충북의 동그란 햇살이 들었다. 나는 그가 청년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늙는 게 숙명이라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절반만 맞다.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온갖 요사스런 핑계와 그럴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다.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를 회의와 비굴과 협잡으로 채워갈 때, 그런 순수한 오염의 과정을 철이 들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거대하게 담합할 때, 여전히 신념과 용기와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그 청년들 역시 계급적이며 급진적이다. 전북 변산의 윤구병 청년은 종일 논과 밭을 메며 가르치는게 다인 듯한 변산공동체를 이끌지만, 9.11 사건을 초국적 금융독점자본에 대한 제3세계인민의 전쟁이라 해석하는 급진주의자다. 서울 혜화동의 서준식 청년은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는 일에 전념하는 듯한 인권운동사랑방을 이끌지만, 인권을 모티브로 세상의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다. 그 청년들이, 그 철없는 비타협의 정신들이, 청년의 몸에 노인의 정신을 가진 수많은 우리가 망가트린 세상을 복구하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