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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지은이에 대해 무엇 찾니 지구(地球)와 ‘빡테리아’ 담(曇)―1927(一九二七) 네거리의 순이(順伊) 우리 옵바와 화로(火爐) 우산(雨傘) 밧은 ‘요꼬하마’의 부두(埠頭) 양말(洋襪) 속의 편지 제비 암흑(暗黑)의 정신(精神) 다시 네거리에서 꼴프장(場) 야행차(夜行車) 속 옛 책(冊) 일 년(一年) 적(敵)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하늘 지상(地上)의 시(詩) 안개 속 바다의 찬가(讚歌) 내 청춘(靑春)에 바치노라 새 옷을 가라입으며 지도(地圖) 구름은 나의 종복(從僕)이다 너는 아직 어리고… 다시 인젠 천공(天空)에 성좌(星座)가 있을 필요(必要)가 없다 밤 갑판(甲板) 위 상륙(上陸) 현해탄(玄海灘) 해상(海上)에서 행복(幸福)은 어디 있었느냐? 황무지(荒蕪地) 한 잔 포도주를 자고 새면 학병(學兵) 도라오다 3월 1일이 온다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제사(祭詞) 기(旗)ㅅ발을 내리자 9월 12일 계관시인(桂冠詩人) 밤의 찬가(讚歌) 우리들의 전구(戰區) 통곡(慟哭) 너 어느 곳에 있느냐 엮은이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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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으로 출간하는 한국 근현대문학은 작품이 처음 발표된 대로 현대에 살려내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초판본을 그대로 싣고자 했습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임화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돌올하게 빛나는 각별한 개성이다. 그는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운동가, 영화인, 출판인, 혁명가 등의 다양한 이력을 소유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그는 카프 시의 일인자이자 단편서사시의 개척자, 이론과 사상을 겸비한 실천적 문학평론가, 일제 치하 최대의 문학예술단체인 카프(KAPF) 서기장, 주연을 맡았던 영화배우 겸 제작자, 문예 전문 출판사인 학예사의 경영자, 열혈적인 사회주의 혁명가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이렇게 화려한 이력 가운데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시인으로서의 삶이었는데, 실제로 그는 일제 치하에서 활동했던 카프 시인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능력을 소유한 뮤즈의 후예였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계급주의 이데올로기만을 앞세우던 당시의 카프 시단에서, 서정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시를 창작하여 카프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이었다. 1926년부터 창작된 그의 시들은 이전의 신경향파 시가 간직했던 관념적 폭로성과 구호조의 수사를 극복하고, 계급주의 사상을 기조로 한 정치적 신념을 감동적인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식민화와 현대화가 중첩되는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성찰,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 인민 대중을 사회주의 사상으로 계몽하려는 목적의식 등은 임화 시가 지향한 도드라진 업적에 속한다. 이를 통해 임화는 한국시의 현대성을 제고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기여가 당시에 펼쳐진 여러 징후들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현대시의 정신사적 획을 그은 ≪님의 침묵≫의 출간,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의 발표 등이 임화가 창작 활동을 시작한 1926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1925년에 발간되어 이미 전통적 정서를 현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임화 시의 리얼리즘적 현대성은 김소월의 전통 정서의 현대성, 정지용의 모더니즘적 현대성, 한용운의 정신사적 현대성 등과 함께 한국시의 현대성을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화 시는 세 단계의 변모 과정을 겪는다. 첫째, 초기 시(카프 해산 이전까지의 시)는 내면적 자기 성찰과 다다이즘적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전자는 「서정소시」, 「향수」 등에, 후자는 「설(雪)」, 「화가의 시」, 「지구(地球)와 ‘빡테리아’」 등에 드러난다. 하지만 임화는 곧바로 내면세계나 실험 정신에 침잠하는 시만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일제 치하의 폭압적 시대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시편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담(曇)―1927(一九二七)」에서 비롯된 계급주의 시학은 「네거리의 순이(順伊)」, 「우리 옵바와 화로(火爐)」, 「우산(雨傘) 밧은 요꼬하마의 부두(埠頭)」 등의 단편서사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서사성을 기반으로 일상성과 인민성을 지향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단편서사시 양식은, 관념적 서술시로서의 무미건조성을 보여주는 데 급급했던 당시의 다른 카프 시인들의 시에 비해 방법론적 우위성을 확보했다는 증거다. 중기 시(카프 해산 이후 광복 이전까지의 시)는 초기 시에 드러났던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일탈하지는 않은 채 두 방향으로의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세월」,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홍수 뒤」 등에서처럼 낭만적 세계관이나 향수의식 쪽으로, 다른 하나는 「바다의 찬가(讚歌)」, 「통곡(慟哭)」, 「자고 새면」 등에서와 같이 역사적 암흑기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각으로 나아간다. 이에 따라서 이 시기의 시편들은 초기 시에 비해 현실 비판의 강도가 현격히 약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임화 자신의 개인적 신념이 약화된 데서 기인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두 차례에 걸친 카프 맹원들에 대한 검거 선풍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집요한 문화적 탄압과 더 깊이 관계된다. 임화는 세계 문학사에서도 흔치 않은 복자(伏字)의 시대에 시적 화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즉 일제의 철저한 검열과 탄압 아래서 최소한의 문학 행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제적 변모를 시도했던 것이다. 후기 시(광복 이후의 시)는 광복과 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시대 현실에 다시 밀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 치하의 기나긴 질곡의 시대를 밀고 나와 맞이했던 광복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처럼 감동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곧이어 벌어진 동족상잔의 6·25전쟁은 남북의 이념적·정치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로 벌어진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임화는 이 비극의 와중에도 그 현장에서 느낀 점을 작품으로 충실히 남겼는데, 그것은 두 방향으로의 시적 지향점을 갖는다. 하나는 「9월 12일」, 「계관시인(桂冠詩人)」 등에서처럼 광복직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유 의지나 혼란스런 시대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다른 하나는 「서울」,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서 보이듯이 6·25전쟁과 관련된 비극적 정서나 당파적 승전욕망으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 후자는 현실 비판의 날카로움이 사라지고 선무 방송의 문구와 같은 교조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 비록 「너 어느 곳에 있느냐」와 같은 작품은 이산가족의 비극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대개는 전쟁시의 투박성과 목적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그런데 임화 시는 시대적 상상력과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만 오롯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전반적으로 정치성과 사상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문학성을 제고하기 위한 시적 표현이나 형상화 방법도 다양하게 활용했다. 그 구체적 양상으로 우선 주목해 볼 것은 소통 구조와 미적 거리 등의 형상화 기법이다. 소통 구조에서 임화 시에는 표면적 화자와 표면적 청자의 양상이 가장 많이 나타나면서 화자만 등장하는 형태인 본격적 독백시나 화자와 청자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사물시(이미지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점은 임화가 시의 창작 과정에서 일련의 대화적 ·서술적 담화 구조를 선호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시적 대상에 따라 미적 거리가 다양하게 설정된다. 임화의 시에서 미적 거리는 1)부족한 거리(대상의 주관화), 2)지나친 거리(극적 이야기의 제시), 3)적절한 거리(사건의 내면화) 등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1)은 「서정소시」, 「향수」, 「통곡」, 「밤의 찬가(讚歌)」, 「헌시」, 「학병(學兵) 돌아오다」 등 초기 시에서 후기 시에 이르기까지 두루 나타난다. 2)는 「네 거리의 순이」, 「우리 옵바와 화로」, 「우산 밧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단편서사시 계열에 주로 드러난다. 또한 3)은 「담―1927」, 「지구와 ‘빡테리아’」, 「꼴프장」, 「현해탄(玄海灘)」, 「9월 12일」,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등 임화 시 전반에 걸쳐 분포한다. 임화는 또한 시 창작 과정에서 이미지, 비유, 상징 등의 표현 기법도 빈도 높게 활용했다. 이미지는 시각적인 것, 그중에서도 흑(黑), 백(白), 적(赤)의 색채 이미지를 빈번히 활용했다. 이들 가운데 흑(黑)은 어두운 시대(「옛 책(冊)」, 「눈물의 해협」 등)를, 백(白)은 식민 치하의 매개적 인물상(「해협의 로맨티시즘」, 「바람이여 전하라」 등)을, 적(赤)은 삶에 대한 열정과 혁명적 의지(「황혼의 아들」, 「젊은 순라의 편지」 등)를 각각 표상하곤 한다. 또한 비유는 비교적 간단한 형태인 직유를 자주 사용했으며, 은유는 기본형인 계사형과 조사 활용형인 동·속격 ‘의’형, 그리고 용언 활용형인 동사형을 빈도 높게 활용했다. 이들은 임화 시의 표현미를 고양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그의 사상 편향의 시 내용에 시성(詩性)을 부여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특기할 것은 임화가 추구했던 것이 인민성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 시학이었기 때문에 고도의 아포리아를 간직한 복잡한 메타포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임화는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살다 간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불과 45년밖에 되지 않는 삶의 여정 속에서 그는 어느 한순간도 평화로운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신봉하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월북을 했지만, 거기서 그를 종국에 맞이한 것은 정치적 음모에 의한 잔인한 처형이었다. 또한 임화에 대한 평가는 그의 비극적 죽음만큼이나 문제적이다. 그는 처형 이후 아직까지도 북한에서는 정치적·문학적 압살 상태에 놓여 있다. 문학사류에 언급이 전혀 없거나 간혹 문학사의 한 귀퉁이에 언급이 된다고 해도 반동 문학자의 한 본보기로 기록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얼마 전까지 남한의 문학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 남한의 문학사에서 임화는 전면에 부각되지 못하고 좌익 문인이라는 폄하와 비난만이 이루어져 왔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남한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파란만장했던 임화의 시와 삶을 접하다 보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임화에게 정치적 죽음이 곧 문학적 죽음이었는가? 임화에 대한 처형과 비판 이후에 북한에서는 임화 시에 견줄 만한 작품이 생산되었는가? 만일 임화가 처형되지 않고 광복 이후의 북한 체제에서 시를 계속 썼다면 그때까지의 문학적 성과를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일제 치하의 한국 리얼리즘 시 가운데 과연 임화 시를 능가할 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임화가 월북을 하지 않고 남쪽에 남아 있었다면 더 나은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들 앞에서 어느 것 하나에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임화의 삶과 문학이 하나의 지독한 비극이요 역사적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비극이나 아이러니처럼 한국 현대문학의 운명을 적실하게 표현해 주는 말도 없을진대, 그러니까 임화는 한국 현대문학의 한 상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