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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는 얇은 연어 조각을 불빛에 대고 비춰 보았다. 색이 너무나 고와!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녀는 흥분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한 조각만 먹어야지. 그녀는 입을 벌리고 연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뒤이어 연어를 입천장에 대고 혀로 지그시 눌러 보고 나서 천천히 맛을 즐기며 씹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연어를 삼켰다. 연어가 사라졌다. 입안이 텅 비었다. 그녀는 아직 남아 있던 연어 두 조각을 성급히 입으로 쑤셔 넣었다. 이번에는 기름이 전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또한 맛을 음미해 보지도 않고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삼켜 버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는 이제 기름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식빵 두 조각을 꺼내 토스터에 넣었다. 그러나 빵이 다 구워지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에바가 안달이 나서 기계 옆에 달린 레버를 위로 올리자 빵 조각이 위로 튀어 올랐다. 빵 조각은 아직 흰색에 가까웠지만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재빨리 버터를 펴서 바르고 그것이 녹기 시작하는 모습을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버터는 처음에는 더 얇게 발린 가장자리에서, 잠시 후에는 가운데서도 녹기 시작했다. 냉장고에는 아빠가 즐겨 먹는 고르곤졸라 치즈도 한 덩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치즈를 나이프로 한 조각 잘라 낼 여유도 없이 단숨에 한 입 베어 물었다. 빵을 베어 물고, 치즈를 베어 물었다. 베어 물고, 씹고, 삼키고 또다시 베어 물었다. 냉장고는 얼마나 근사한 음식으로 골고루 채워져 있었던가. 삶은 계란 하나, 토마토 두 개, 햄 몇 조각 그리고 약간의 살라미가 연어와 토스트와 치즈의 뒤를 이었다. 에바는 황홀한 기분으로 씹고 있었고, 그녀는 오직 하나의 입이었다. --- p.36~37 문제 중의 문제인 이 문제 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비곗살이었다. 이 역겹고 부드러운 지방층, 이 지방층이 그녀와 주변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것은 완충 장치이자 누에고치였고, 쿠션이자 무쇠 고리였다. 오직 비곗살만이 문제였다. 비곗살은 슬픔과 소외와 배척을 의미했고, 조롱과 불안과 치욕을 의미했다. 비곗살에 파묻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진짜 에바인 그녀가 말이다. 원래의 그녀는 지방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음 편히 살아가고, 사랑받으며 살아야 마땅했다. 이 지방층에 그녀는 갇혀 있었다. 실제의 에바인 그녀가 말이다. 실제의 에바는 끊임없이 음식과 영양분과 속을 채워 넣을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토록 부끄러워하며 남몰래 먹는 거라면 무엇이든 달려들어 입으로 마구 집어넣지 않았다. 마치 기계처럼, 마치 굴착기처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이 누에고치 속에 들어앉아 또 다른 에바가 살아가고 있었다. 그 에바는 탐욕을 몰랐고, 닥치는 대로 우적우적 씹고, 허겁지겁 먹어 대고, 삼키고, 억지로 밀어 넣는 것도 몰랐다. --- p.13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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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바는 뚱뚱하다. 에바의 표현대로 하자면 ‘비곗살’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갈라놓는 원인이다. 비곗살은 오로지 사람들로부터의 소외와 배척, 조롱과 치욕의 대상일 뿐이다. 몸에 대한 이런 의식은 결국 좀 더 날씬해 보이도록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는 등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에바는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거절감과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외로움으로 더욱 음식에 집착한다. ‘맛있는 걸로 달래줄 수 없는 불행은 없다’는 말대로 에바는 음식으로 위로받지만, 바로 그 순간 ‘오직 하나의 입’일 뿐인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굴욕감에 더 깊이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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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뚱뚱한 소녀’
평범한 표면적 일상 속에 고여 있는 모멸과 자학의 심연 문명이라는 사회를 뒤덮고 있는 오래된 전통이자 강력한 내면화를 이루는 이미지는 바로 ‘여성의 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라기보다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의 이미지’이다. 모든 미디어가 보여 주는 날씬한 몸매는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기보다 그것을 즐기는 타인들에게 보여지고 아름답다고 인정받았을 때에서야 가능한 자기 과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에바는 레너드 코헨의 노랫말 ‘그녀는 몸매를 그토록 대담하고 자유롭게 드러내고 다녔지, 만약 내가 그것을 멋진 기억으로 간직해야 한다면(She was taking her body so brave and so free, if I am to remember, it’s a fine memory.)’을 들으며 근사한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뭐 그리 대담한 일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뭇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판정받은 여자는 자신을 구경거리로 대담하게 드러낼 수 있는 법이고, 에바의 무의식은 그런 사회적 조류에 반항적이지만, 그렇다고 거스르지도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에 맞추고자 남몰래 단식을 하지만 배고픔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통증은 다시금 폭식을 불러오고, 결국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만다. 덩어리, 덩어리들. 이 얼마나 징그러운 말인가. 구역질나는 말이다. 누구에게 드러낼 수도 없는 자학과 자기혐오는 평범한 일상 아래 고여 있어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다. 뚱뚱하니까 더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고, 뚱뚱한 몸으로 이미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으니까 눈총을 받을 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내면화는 외로움에도 사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의식으로 이어진다. “나와 함께 있으면 거북하지 않아? … 내가 너무 뚱뚱하니까.” 동일성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미(美)의 감옥 에바는 조금 더 날씬해 보이고자 밝은색 옷을 피하고, 뚱뚱한 몸매를 되도록 가리기 위해 늘 치마를 입는다. 큰 부피를 가질수록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보호색을 쓰는 동물과 같은 자기보호본능은 타인과 소통하고 무리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결국 외따로 떨어진 섬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왜 뚱뚱한 몸은 멸시되어야 하는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60억의 각기 다른 인격체와 각기 다른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날씬함’이라는 단 하나의 미의 기준만을 요구받는 것일까? 대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패션 잡지 사진에 나오는 그런 여자들처럼 보이는 소녀들만 아름다운 건가? 긴 다리, 날씬한 생기 넘치는, 호리호리한, 아리따운 등과 같은 말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갔다. 그녀는 옛 거장들의 그림들에 나오는 여인들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통통하고 풍만하고 살이 쪘었다. 에바는 웃었다. 하나의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폭력적인 미의 감옥. 끊임없이, 거리낌 없이 그러한 폭력을 재생산하는 미디어를 향해 가볍게 웃음을 날리며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굿바이’할 수 있는 소설이 우리를 찾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