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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뛰어내리기 전에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3장 손을 내려놓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 5장 자유에 이르는 길 옮긴이의 말 해제: 자유죽음론과 장 아메리 _김남시 |
Jean Amery,한스 차임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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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역설적인지 아는가. 나는 다만 ‘자살 상황’이라는 쉽게 풀기 힘든 모순을 따라가보고 그게 어떤 것인지 증언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언어의 힘이 닿는 한 말이다.---p.11
자살을 바라보는 데 있어 역사성의 관점은 피해야 한다. 살아가며 겪는 모든 시절은, 실제에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에 알맞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시간을 통해 성숙한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p.31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일종의 수동태이다. 없는 무엇인가를 우리는 기다린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문법적으로나 실제로나 적극적인 행위이다.---p.33 뛰어내리는 사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뛰어내리는 사람은 생명의 논리와 죽음의 논리 사이에서 찢겨져 있다. 존재적으로 독특한 이런 상황은 바로 이 찢겨져 있음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래서 뛰어내리는 사람은 죽음의 논리 혹은 죽음이라는 안티 논리가 무엇인지 안다.---p.45 죽어 분해되는 자신의 육신을 떠올리면서도 신을 진지하게 찾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자연적인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죽음은 신보다도 위대하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마주치지만, 신은 언제나 숨어 있다. 이게 바로 신이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어쩌랴.---p.75 이제는 죽음의 얼굴도 다른 용모를 띤다. 죽음은 일방적으로 몰아내고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방적인 몰아냄으로 죽음이 왜곡되고 비틀려지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편견 없이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른다.---p.109 어쨌거나 틀림없는 것은 예수는 죽음에 끌리는 성향을 좇았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비스듬하게 기운 그의 얼굴을 보라. 땅에 끌리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왜 자신을 버리느냐고 울부짖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다.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자신은 사라지겠노라고. 모든 게 그게 그거라고.---p.148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내 말은,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겠다고 할 때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을 보이며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p.164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결정적인 선택을 내려야 할 인생의 순간, 자기 자신에게만 속할 뿐이다. 이런 결정은 내가 나와 일대일로 마주본다는 각오로만 내려져야 한다. 그 어떤 단체의 이상, 내가 보기에는 망상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 어떤 사회적 이상에 헌신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속하기를 포기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행동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실존적 자기 결단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으려는 결정조차 그 개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일 따름이다.---p.174 자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타인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말을 걸면서 타인도 자신의 죽음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세상을 몰락하게 만든다. 모순은 자살자의 의식 속에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자살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함으로써 동시에 세계에 속한다. 즉 세계가 그에게 속하는 것인 동시에 그가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맨 앞에서 인용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말보다 더 심오한 게 또 있을까. “행복한 사람의 세상은 불행한 사람의 그것과 다르리라. 죽는다고 해도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저 멈출 뿐이다.” ---p.187 자살자는 천재만큼이나 드문 현상이다. 비록 불쌍한 개를 보듯 아무도 눈물을 흘려주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살자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공허함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든 학문에서든 현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단호하게 경쟁하는 적수가 자살자다. 그는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안다.---p.189 자살자의 메시지를 일상 언어로 옮겨보면 이런 외침이 된다. 사회라는 네트워크의 일부인 너 타자는 나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점은 인정하마. 그러나 똑바로 봐두렴. 나는 너희의 권력으로부터 얼마든지 탈피할 수 있다. 그것도 너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말이다.---p.202 그렇다. 무엇에서 벗어날 자유를 약속해주는 자유죽음은, 논리학이 요구하는 대로 무엇으로 나아갈 자유는 주지 못할지라도, 인간성과 존?성의 단순한 긍정 그 이상의 것으로 자연의 맹목적인 지배에 맞선다. 이게 우리가 보는 자유죽음이다.---p.216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실제로 자유를 가졌다. 그러나 자유롭고자 선택하지는 않는다.” 자살자보다도 더 지독하게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자유로 죽음을 선택해 이 자유와 함께 모든 자유의 끝장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끝장은 더 이상 강제가 아니다. 자살자는 이 금기를 깨려는 프로젝트를 세웠다. 그가 실존으로 투기投企한 것은 자유죽음이다.---p.234 남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일 따름이다. 장차 이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나를 다루리라. 나를 추억하든 망각하든, 그들 원하는 대로 하리라. 그런 것에 얽매이지도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에는 이미 부자유와 같은 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저런 사람이야 하고 주장하고 싶은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p.243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p.245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p.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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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장 아메리, 드디어 한국 번역 소개!
자살의 자유에 대한 논쟁적 성찰! 현대 자살론의 고전 삶과 죽음에 대한 통념을 바수는 진실하고 처절한 에세이! 폭력의 세기에 대한 증언, 고통의 기억 속에서 탄생한 휴머니즘 “자유죽음을 미친 짓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뛰어내렸다고 해서 반드시 미친 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살피지 않고 무조건 ‘정신착란’이거나 ‘광기’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짓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면, ‘치욕스런 좌절과 냉혹한 실패?chec’ 상태에서의 인생이 더욱 추한 것이라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더 이상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경우, 존엄성과 자유는 곧 율법이 된다. 주체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당사자 개인의 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던 생명이라는 고유 재산을 파괴한다. 손을 내려놓는다." 고통을 넘어 자유를 예찬한 ‘숭고한 인간의 이름’ 장 아메리는 누구인가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한 지식인의 ‘폭력의 시대’에 대한 비망록 장 아메리는 1912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붙여준 이름은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 그는 문학과 철학 학위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증언작가’ 3인방으로 꼽히는 그는 『자유죽음』을 쓰고나서 2년 뒤인 1978년 10월 17일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이른바 ‘자유죽음’을 실행하였다. “반유대주의가 있기에 유대인인 내가 태어났다”고 말했던 아메리는 열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 가톨릭 문화에 적응하며 살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졸지에 유대인 부인과 함께 낙인찍혀야 했던 그는 벨기에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다.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굴욕과 모멸을 안기던 나치 권력에 아메리는 저항했으나 세상은 그를 밀고하고 추방했다. 나치의 손아귀에 있던 프랑스 남부의 귀르 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에 성공하고, 다시 벨기에로 잠입해 더욱 처절한 싸움을 벌이던 아메리는 2년여의 지하투쟁 끝에 1943년 7월 또다시 게슈타포에 붙들린다. 모진 고문과 치욕 속에서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등 나치 수용소로 끌려 다닌 그는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45년 독일의 패망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브뤼셀에 정착한 아메리는 신문의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며, “이 끔찍한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평생 홀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무지막지한 고문, 인생이라는 이름의 부조리, 삶을 허락하고 죽음을 강요하는 신 앞에서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생명을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아메리. 전쟁의 끝이 그 싸움의 끝은 아니었다. 그는 입을 다물게 만들려는 세력의 회유와 압박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메리는 늘 초연하고 정갈했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말하며…. 독일어를 매우 사랑했던 언어학자였던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자신의 모어(母語)인 독일어가 훼손되는 것을 괴로워했다. 어느 날 직업이 뭐냐고 묻는 독일군에게 ‘독일문학자’라고 대답하자 친위대원은 크게 화를 내며 아메리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이후 해방이 되자 그는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장 아메리로 바꾸고 고향을 떠나 살며 죽을 때까지 독일어로 글을 쓰며 살았다. 그는 자신의 글이 독일에서 출판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스위스에서만 책을 출간했다. 아메리는 애초에 강제수용소에서의 가혹한 경험을 글로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구한 젊은 독일 시인(헬무트 하이센뷔텔)과의 우정과 권유로 『죄와 속죄의 저편』(1966년, 영어 제목은 ‘정신의 한계에서’)이라는 제목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고문과 폭력을 기록한 책을 독일어로 출간하게 된다. 1970년 독일 비평가상, 1971년 바이에른의 ‘아름다운 예술아카데미’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7년에는 함부르크 시가 수여하는 레싱상을 수상할 정도로 장 아메리의 독일어 글쓰기는 정평이 나 있다. 아메리의 주저(主著)로 불리는 『자유죽음』은 단순히 ‘자살론’이나 ‘회고록’이 아니다. 한 지식인이 끔찍한 세기를 관통하며 겪은 ‘시대의 비망록’이다. 그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자 역시 수용소를 체험한 유대인 ‘증언문학’의 대표작가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쓴다.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에서만 할 일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끝내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레비에게, ‘수용소 이후’ 인생 최대의 목적은 증언을 통한 인간성의 재건이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의 의무’를 강조했던 레비에게 동료 유대인 아메리의 자살은 크나큰 충격을 주었으리라. 아메리의 죽음을 두고서 모든 존재 증명을 부정당했던 사람이 부조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했던 레비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또 한 사람의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적극적 명상! -자살에 대한 금기와 편견을 허무는, 삶의 진실에 육박하는 철학적 에세이 “이 글에서는 ‘자기 세계 속에 있는 자살자’와 만나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시도되는 것은 ‘자유죽음의 현상학’으로 자살자가 처한 상태에 대한 묘사이다. …자유죽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해하려’ 하는 한 인식될 수 없는 자살자를 정당하게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살자는 ‘신의 권능에 도전한 자’였으며, 공동체와 가족으로부터의 의무를 져버린 패륜아이자 이기적인 배신자로 치부되었다. 장 아메리는 이러한 금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인지, ‘손을 내려놓기’ 직전에 그가 자기 자신과 타인-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물음으로써 ‘자살의 자유’와 만나려고 한다. 장 아메리에게 자살은 “모든 삶의 충동, 살아 있는 존재의 끈질긴 자기보존 충동에 맞서” 인간 실존이 인간에게 보장하는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가장 생생하게” 실행하는 행위이다. 아메리는 ‘자기 자신을 살해’한다는 의미의 ‘자살’이란 단어를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한다’는 ‘자유죽음’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아메리의 사유를 이끄는 것은 삶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경외와 자기 삶에 대한 자기 결정 권리, 그리고 자유에의 갈망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강요하는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바로 아메리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이다. 이때 ‘자유죽음’은 “제 인생을 온전하게 살아내자”는 다짐과 다르지 않다. 아메리는 깊숙이 묻는다. 자살을 금기시하며 심지어 비자연적이고 몰지각한 범죄 행위로 몰아붙이는 종교와 사회. 이것은 세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살아남은 자들의 무심하고도 가혹한 편견과 선입견이 아닐까?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웃의 존엄과 자유를 짓밟는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사’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자유죽음』에서 아메리는 생을 냉소적으로 멸시하며 내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삶의 가치는 물론 인간적 존엄마저 앗아가는 ‘강제상황’에서도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는 논리가 부자유와 비인간적 속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삶의 상황은 당연한 듯 외면하면서 자살자를 윤리적으로 낙인찍는 맹목적 삶의 논리는 얼마나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가? 그에 맞서 아메리는 신과 사회라는 거대한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이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할 생명(삶)에 대한 권리,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선택한다. ‘어떻게 자살을 옹호하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궤변을 펼 수 있느냐’고? 이 책은 자살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찬미한다, 아메리의 ‘끝 간 데 있는’ 사유는 단호히 말한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래서 이 부정 앞에서는 변증법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발달한 논리도 이 부정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고. 그렇다면 왜 아메리는 스스로 ‘무의미하게’ 목숨을 끊었는가? 죽음을 선택하는 당사자의 내면으로부터 자살을 이해하기 위해 『자유죽음』을 썼듯이,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끌안고 반평생을 산 자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일체 짐을 지우지 않고 깨끗하게 자신을 정리한 최후의 선택. 그것은 아마도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자 한 ‘치열한 삶의 충정’일 것이다. 아메리의 처절한 사유는 ‘외롭고 깊고 뜨거워’ 놀랍다.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지성사는 물론 아메리 당대의 철학(실존주의, 니체) ? 문학 ? 사회학 ? 정치학을 탐문하며, 그 바탕에는 인간 삶의 아픔과 기쁨과 희망에 대한 생생한 관찰과 감응으로 가득하다. ‘생각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아메리의 문체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 그 배경과 맥락을 파헤쳐 들어감으로써 ‘자유죽음’하려는 자의 고뇌와 결심, 그 진실에 육박하게끔 만든다. 군말을 보태자면, 유독 많은 죽음과 더불어 역사의 기억과 사건이 전환하고 폭발한 한국 현대사와, OECD 국가 평균 자살률의 두 배가 넘는 ‘자살 강국’ 한국 사회의 병리적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자살의 사회학’ 연구를 ‘자살하려는 사람의 인간학’으로 안내하는 이 책으로부터 시작해보아도 좋겠다. 자신의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삶의 가능성을 짜내보려 했던 아메리의 사유는 그만큼 독하되, 막다른 곳에서의 치유 효과를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