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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지은이에 대해 빛 속에 칠현금 엮은이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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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으로 출간하는 한국 근현대문학은 작품이 처음 발표된 대로 현대에 살려내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초판본을 그대로 싣고자 했습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문학과 혁명 사이―김사량의 삶과 문학 문제적 인물 김사량 김사량(1914∼1950)의 짧았던 삶의 궤적을 되짚어 볼 때, 일제 말 일본어로 창작을 했다는 점과 1945년 5월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피해 중국 연안으로, 더 정확하게는 항일 근거지인 태항산 남장촌으로 망명한 사실은 커다란 굴곡에 해당한다. 이러한 굴곡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을 가로지르는 동북아의 역사에 폭넓게 관련된 그의 문제적 삶을 보여준다. 일제 말 김사량의 문학은 협력과 저항의 양극화에 기초하고 있다. 김사량은 일제 말 조선인 사회의 양극화를 작품의 초점에 놓고 이를 통해 일본의 식민주의와 이에 협력하는 조선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강한 연대감을 표시했다. 이러한 양극화는 비단 조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조선인 사회에까지 미치고 있다. 김사량은 『토성랑』, 『천마』, 『무궁일가』, 『향수』 등의 작품을 통해 조선, 일본,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협력과 저항의 양극화를 그렸다. 한편, 김사량이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중국으로 탈출하여 항일 전선에 뛰어든 사실과 6·25 전쟁에 종군기자로 참가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점은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를 반영한다. 김사량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랑에 주체적으로 몸을 실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인이자 혁명가다. 이러한 삶의 굴곡은 남·북 어디의 문학사에서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다 월북한 문인으로 간주되어 논의가 배제되었고, 북에서는 그의 출신 성분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점과 연안으로 탈출하여 활동한 소위 연안파라는 계보 때문에 배척됐다. 이렇듯, 김사량은 조국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저항 지식인이었지만,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외면받는 소외된 문인으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그가 오히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랫동안 지속된 분단 현실이 그의 삶과 문학을 압도했기 때문이리라. 다행스럽게 북한에서는 1987년 『김사량 작품집』(문예출판사) 출간을 계기로 그의 작품이 부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작품에 대한 내재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김사량에 대한 일본의 평가를 의식하고 씌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빛 속에』를 “우리 인민의 비참한 모습과 식민지 인텔리의 정신적 고민, 민족적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 평가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운명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놈들의 내선일체 정책을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하였다”고 제한성을 논하면서도 “이것은 당시의 엄혹한 시국과 가혹한 검열을 고려할 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유연하게 평가해 준 대목은 북한의 문예정책을 고려할 때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도 1990년대부터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실천문학사가 공동으로 작성한 친일문학 작품 목록에서 그의 작품이 제외되고, 그 또한 친일작가의 명단에서 제외된 사실은 김사량의 문학이 정당하게 평가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사례다. 일본어 글쓰기, 혹은 문학적 응전 일제 강점기 문학에서 동경과 북경은 상이한 이미지로 존재한다. 일본이 유학생의 신분으로 경험하는 ‘근대 학습의 공간’이었다면, 중국은 망명객의 신분으로 ‘자기 부정을 통해 근대를 극복하려 했던 혁명의 공간’이었다. 김사량의 삶은 이러한 일본과 중국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가 주로 일본에서 일본어로 창작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과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형상화했다는 점은, 일제 말 동경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표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 김사량이 1945년 5월 북경을 통해 태항산으로 탈출한 점은 이러한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북경은 그에게 일제가 점령하지 못한 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탈출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먼저, 김사량의 일본어 글쓰기가 지닌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가 일본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김사량은 언어는 기본적으로 현실적 상황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해 내기도 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모국어를 낶나 일본어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려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그 의식 속에서 ‘번역’이라는 과정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한 함정도 숨어 있다.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본어로 사유하고 사상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경우 ‘일본적인 감각이나 감정에 휩쓸려 갈 듯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여기에는 조선인을 조선 민족의 외곽 지대로 몰아내고, 민족이 처한 현실을 방관자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무릅쓰고 일본어 창작을 하게 된 이유는 작품의 실제적인 독자를 조선에 거주하는 조선 민중이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김사량 또한 「조선문화통신」에서 일본어 창작의 ‘통절한 심적 동기’를 ‘조선 문화를 내지나 동양이나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미력하나마 그 중개자의 몫’을 맡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어와 모국어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 대한 자의식이야말로 ‘일본적인 감각이나 감정에 휩쓸려 갈 듯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김사량에게 일본어와 모국어는 거의 동격에 놓인다. 그의 일본어 문학이 일본과 한국 사이에 끼인 존재의 정체성을 문제 삼고 있다고 할 때, 김사량이 일본어와 한글을 동시에 내면화할 수 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팽팽한 문학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조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일본어로 조선 현실을 그린다는 자기모순, 즉 일본 땅에서 조선인임을 의식할 때는 늘 무장을 해야 한다는 정신적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김사량은 어떤 언어로 소설을 쓸 것인가보다는, 소설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김사량은 『빛 속에』와 『천마』에서 조선적인 것을 지워버리려는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포착함으로써,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불안을 야기시키는 실체를 우회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에서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의 ‘위선과 비굴’을 비판하려는 의도보다는, 이러한 비겁하고 모순된 존재들을 낳게 한 일본 제국주의의 차별 정책과 구조적 억압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강압적인 탄압에 응전하는 문학적 방식의 하나인 셈이다. 이상을 고려할 때, 저항 의식이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말 김사량 문학이 한계를 지닌다는 지적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조응하는 문학·문화적 저항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어로써 조선의 현실을 그렸다는 점은, 일제의 탄압을 유연하게 피해가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적극적인 저항이 불가능했던 시기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적극적 저항의 관점(실천)에서 본다면 일본어 글쓰기는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를 통해 ‘연안 탈출→조선의용군 입대’로 이어지는 혁명가의 길을 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문인의 삶과 혁명가의 삶을 비교·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문인은 ‘문학’을 통해 저항한다. 혁명가는 ‘실천’을 통해 저항한다. 식민지 문인으로서 김사량의 삶은 조선의 현실을 일본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일제의 탄압(내선일체, 창씨개명 등)이 식민지 지식인에게 끼친 영향을 곱씹는 일에 바쳐졌다. 그의 연안 탈출은 이러한 문인의 삶에서 혁명가의 삶으로 전이를 보여주는 예다. 이것은 저항의 방식이 다른 것이지, 옳고 그름, 선악의 판단 기준이 개입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김사량의 일본어 작품을 혁명가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일(문학성을 배제한 항일 실천가의 관점)이나, 『노마만리』나 『칠현금』, 『종군기』 등을 미적 예술성의 관점(이념을 배제한 문학성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태도는, 양쪽 다 주객전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겠다. 혁명의 길, 혹은 ‘노마만리’ 김재용에 의하면 김사량의 망명은 우회적 글쓰기(일본어 글쓰기)의 돌파구였다. 이러한 논의에는 김사량 문학을 관통하는 저항의 정신을 전제하고 있다. 저항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김사량의 작품이 배치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국제주의적 시각 속에서 사물을 보고 역사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해방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의식 때문이다. 김사량이 중국의 해방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중국인, 일본 제국을 피해 도망해온 일본인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다는 것은 그가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님을 여실히 말해준다. 파시즘의 진군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류의 공통된 노력 속에서 동북아와 조선을 읽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김사량의 시각은 분명 세계적인 것이다. 비민족주의적 반식민주의라는 우리 문학의 지적 저항의 전통에 중요한 자산을 보탠 김사량의 문학은 그런 ?에서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노?만리』는 김학철의 『격정시대』와 더불어 조선의용군의 행적을 생생하게 기록한 문학적 사료의 하나다. 그에게 ‘노마만리’는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신변의 위험으로부터 도피하여 창작의 자율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항일 투쟁에 동참하는 길이었다. 이 작품에는 ‘도시 인텔리의 습속’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던 지난 삶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에 대한 열망이 낭만적 필치로 그려져 있다. 사실적이고 미려한 문체로써 잔악한 일제의 횡포가 중국 땅에서도 예외 없이 벌어졌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자의식보다는 혁명가로서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후 북한에서 그가 남다르게 높이 평가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평양 대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과, 1946년 「호접(胡蝶)」이라는 연극을 통해서 무정(武亭) 장군을 비롯한 연안파 망명인(연안파는 50년대 중반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들의 항일운동의 일면을 소개한 사건은 그가 북한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유일 터다. 김사량은 연안파에 속했다. 북의 체제는 그가 일본어를 버리고 되찾은 모국어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꽃피우는데 또 다른 제약으로 기능한 듯하다. 그가 북에서 남긴 『칠현금』이나 ‘종군기’들은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들을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유리알 같은 정신’으로 날카롭게 직조하여,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까지 오른 문학청년 김사량의 모습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