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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기린
3월 토끼 닥스훈트의 우울 거울 나라의 펭귄 어둠의 까마귀 마지막 네메게토사우루스 에필로그 |
Tomoko Kano,かのう ともこ,加納 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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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에요. 이러지 마세요.”
목소리는 이제 쉬지도, 떨리지도 않았으나, 그 말을 한 순간 거센 자기혐오가 그녀를 덮쳤다. 부탁이라니 내가 왜 부탁을 해야 하지? 내 목숨이 왜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손에 쥐어져야 하지? 그런 부조리한 일이 어째서 일어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뭐라 말할 수 없는 노여움이 한꺼번에 끓어올랐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가는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어차피 죽임을 당한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여기서 죽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결심했다. 소녀가 도망치려고 몸을 비튼 것과 남자가 칼을 휘두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pp.12~13 ……그 세계는 모든 것이 옅은 파랑에, 투명하고, 늘 눈부신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동물도 모두 투명하고, 먹는 것은 유리 풀과 유리 나무 열매, 그리고 마시는 것은 유리 물이었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유리로 된, 아주 신비한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그 유리 세계의 유리 들판에 기린이 한 마리 살았습니다. 기린은 늘 긴 목을 꼿꼿이 치켜들고 어느 먼 곳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길은 단단하고, 차갑고, 그리고 투명했습니다. 유리로 된 몸뚱이와 똑같이. ---p.21 “마이는 왜 죽었을까요.” 꽃줄기를 갖고 장난치면서 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안도는 자진해서 죽은 게 아니야. 죽임을 당한 거지. 범인은 분명히 곧 경찰이 잡아줄 거야.” “그렇죠. 하지만 똑같아요. 죽임을 당하는 거나 자살하는 거나 둘 다 그냥 없어져버리는 거니까.” ---p.77 재킷 위로 주머니에 든 것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곳에는 날카로운 칼이 잘 접혀 칼집에 넣어져 있었다. 옆에 있는 가로등에 한숨처럼 불이 훅 들어왔다. 그제야 비로소 날이 저문 것을 깨달았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도, 큰길을 지나는 차 소리도 모두 여기서는 충분히 멀었다. 조건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이제는 그 순간을 기다리면 되었다. 고대해 마지않던 순간을. 놓치면 안 되는 절호의 기회를. ---p.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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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위험할 만큼 불안한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낸 청춘 미스터리 걸작
소녀들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 속에서 경쾌하게 재잘대고 웃지만 얼마나 불안정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가. 사춘기 소녀들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불안하고 위태로운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혼자가 되는 시간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우상화해서 그의 완벽해 보이는 삶에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소녀들이 동경했던 소녀 안도 마이코. 아름다운 외모에 경제적으로 윤택한 가정에 살고 있으며 성적 또한 우수해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안도 마이코 역시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다른 또래 소녀들처럼 외롭고 불안했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소녀들보다 더 많이 외롭고 불안했다. 그녀에게는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또래 친구조차 없었던 것이다. 안도 마이코는 직접 쓴 동화 유리 기린과 마지막 네메게토사우루스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두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매력은 소녀들의 진짜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훌륭한 미스터리 얼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첫 장면은 주인공 안도 마이코가 살해당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죽고 남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엄친딸로만 알려져 있던 안도 마이코의 진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되기도 한다. 《유리 기린》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와 청춘의 감성을 잘 표현한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청춘 미스터리 걸작이다. 깨지지 쉽고 불안정하며, 늘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사춘기 소녀 같은 ‘유리 기린’ 주인공 안도 마이코가 쓴 동화 유리 기린. 모든 것이 유리로 된 아주 신비한 세계에 역시 유리로 된 기린이 살고 있었다. 섬세하고 투명하지만 깨지기 쉬운 유리 기린. 기린은 늘 긴 목을 꼿꼿이 치켜들고 어느 먼 곳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갈림길에 서서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기도 한다. 안도 마이코에게 동화 속 유리 기린은 바로 자신이었다. 위태롭고 불안한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른 동화 마지막 네메게토사우루스는 홀로 남겨진 네메게토사우루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외롭고 불안하지만 사춘기 소녀 특유의 자존심으로 타인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동화 속 유리 기린이 안도 마이코의 심리를 대변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안도 마이코가 살해당한 후였다. 안도 마이코는 죽은 후에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을 지나왔거나 그 시절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도 마이코로 대표되는 진짜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는 공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진짜 소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여섯 편의 연작소설이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완성되는 하나의 이야기 《유리 기린》은 한 편, 한 편이 독립성을 갖추면서 동시에 하나로 연결되는 여섯 편의 연작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살해당한 주인공 안도 마이코의 이야기를 친구 나오코의 아버지 시점에서 그리고 있는 유리 기린, 안도 마이코가 죽은 후 종업식을 앞둔 교실의 풍경을 담임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는 3월 토끼, 개학을 앞둔 봄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린 닥스훈트의 우울, 죽은 안도 마이코의 유령을 보기 시작한 친구의 이야기를 담은 거울 나라의 펭귄, 죽은 마이코의 편지를 받은 선배의 이야기를 담은 어둠의 까마귀, 안도 마이코의 또 다른 동화와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네메게토사우루스까지 여섯 편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안도 마이코와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양호 선생 진노 나오코가 있다. 안도 마이코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를 대변하는 인물로 진노 나오코는 그들을 이해하고 사건을 풀 수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비록 살인 사건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안도 마이코를 이해하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은 어둡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춘기 소녀들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게 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