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부 배후
배후 빈 화분 그릇 메롱메롱 은주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무엇을 훔쳤는지 간밤엔 모두들 어항에게 생긴 일 햇빛의 구멍 사고 다발 지역 우수리 섭동 뱀이 나오는 가게 외설적 아버지 어떤 자리 햇볕이 지나간 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는 숨는다 제2부 그 옷이 내게 부산 갈매기 그림자들의 야유회 비보호 좌회전 그 옷이 내게 그 옷이 내게 또 출렁거리는 와불 타워팰리스의 공중부양 건너다니는 우물 자가 분석가 복개천 정신병원 지나며 개구리 허깨비들 새만금 눈을 감으면 관음증 아흔아홉 마리의 여우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제3부 여섯 개 안의 일곱 개 아버지, 죽은 아버지 너도바람꽃 나팔꽃 한 소년이 지나갔다 뒤뜰의 오후 사라지는 연분홍 가방을 톡톡 여섯 개 안에 일곱 개 모자를 찾으러 간 사람 도리사 법문 천축사 하루살이 입탈 어떤 데이지꽃 거대한 홑몸 생명이 밉다 제4부 자동차가 지나간다 사잇길에선 언제나 통영 다찌집 자동차가 지나간다 감자꽃 피는 길 광어회를 기다리며 타워 크레인 먼 저 달 |
김점용의 다른 상품
|
메롱메롱 은주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글자 은주 나는 그것이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인지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다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그 나무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 같은데 거기에 소 한 마리 매어서 딸려 보낸 주인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한밤에 부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깔고 앉을 때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 두꺼운 방석을 펴면 이따금 귓전에 울리는 소 방울 소리가 메롱메롱 은주, 하고 날 놀리는 것 같아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아 --- p.13 그는 숨는다 그는 숨는다 장롱 안에도 숨고 마루 밑에도 숨는다 담벼락 속에도 숨고 나무 뒤에도 숨는다 이름에도 숨고 바코드에도 숨는다 한번은 오래된 은수저에서 그가 숨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숨는 데 귀신이다 심지어 구멍 난 양말의 오랜 추억 속에도 그는 제 몸을 숨길 줄 안다 동짓달 초이레의 반달 뒤에도 숨고 늙은 여자의 하품 속에도 숨는다 제삿날 병풍 뒤에도 숨고 사진 속에도 숨는다 일부러 보자고 한 적 없지만 그는 날마다 숨는다 햇볕 속에도 숨고 그림자 속에도 숨는다 그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으나 그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술래가 되어 그를 찾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 p.38 立脫 백여덟 번 절하고 부처 훔쳐 내려오는 산길 집으로 가는 길을 지웠네 내 몸을 지웠네 겨울나무들의 마른 이파리를 지웠네 가지와 줄기의 살점도 지웠네 나무들 속살 속 물관만 남겼네 뿌리에서 잎과 꽃 퍼올리던 물관들 금세 하얗게 얼어붙어 반짝였네 능선에 쏟아지는 황금 햇살에 쓸리며 싸르랑 싸르랑 반짝였네 은사시보다 눈부시게 어느 겨울, 그만 쓰러져 죽어버리고 싶었던 소백산 설화보다 더 눈부시게 꼿꼿한 결벽만이 뜨겁게 타올랐네 햇살에 떠밀리는 황홀한 나무들 사이 금빛 나비 한 마리 천천히 날아올랐네 --- p.90 |
|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삶의 이면에서 삶을 묻기 김점용의 두번째 시집 『메롱메롱 은주』가 출간되었다. 표층보다는 심층, 양지보다는 음지의 영역을 시적 언어로 번역해 보여주고자 하는 시인의 내적 지향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보는 '오늘'은 내 마음의 주인이 사라진 시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시대이고, 신(神)이 사라진 시대이다. 시인이 아무리 실체를 찾아가고자 해도 결국 마주치는 것은 “헛것”과 “허깨비들” “그림자들”뿐이며, 이 실패의 흔적들이 환각, 환청, 귀신 등의 환상적 이미지들에서 발견된다. 죽은 아버지를 꺼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어떤 중년 사내가 끼어들어 같이 찍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폼만 잡았다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부분 내 마음의 주인이 사라진 시대, 그러니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시대는, 곧 전체성의 윤리로서 신(神)이 사라진 시대이며, 법(아버지) 자체가 법을 어기며 향락을 즐기는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이다.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분명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사진관 주인인지 배다른 형인지 알 수 없는 중년 사내(「외설적 아버지의 시대」)도, 교차로 2층에 있다는 오토바이 가게(「비보호 좌회전」)도, 심지어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년 계산(「우수리」)도 명확하지 않다. 시인은 이 흐릿하고 불명확성으로 가득 찬 세계의 이면을 파고들며, 죽음과 그림자의 세계를 드러내고 끈질기게 죽은 "아버지"를 찾아다닌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그는 꿈쩍도 않고 대신 문둥이가 뭉개진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쉿거렸다 등을 보인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버지 친구일 터 상심하여 돌아서는데 그가 이번 판만 두고 보내마, 그랬다 덜컥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으니 문둥이가 사라진 입술로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렸다 원문고개 호떡집 아줌마한테 물어봐라,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 집은 없어진 지 오래인데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부분 그는 번번이 아버지를 찾는 데 실패한다. "힘이 장사인 아버지는 점점 더 젊어져서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고, 하릴없이 돌아온 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옷을 입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실체를, 본질을,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생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시인이 연속된 좌절로 인해 느끼는 실망과 혼란의 흔적들이 그의 시들에 군데군데 번져 있다. 이 끝없는 실패는 왜 계속 되는 것일까. 시인은 그 '왜'를 물어간다. 그림자들의 야유회 인식의 왜곡으로 비대해진 허상의 세계 김점용은 그의 시 세계를 통해 섣불리 구조적인 비판이나, 혹은 개인에 대한 윤리론적 비난을 전언하지 않으면서도 '그만의 시대관'을 정립한다. 실상을 알아볼 수조차 없는 비극의 시대. 이는 사람들의 왜곡된 인식, 굴절된 시선의 문제다. 시인이 보는 이 세계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거대한 '어항'과 같았다. 투명한 어항은 무엇이든 다 지나간다 그 어떤 루머도 어항을 지나면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 사방이 캄캄하였다 대낮처럼 어둡고 명징하였다 ―「어항에게 생긴 일」 부분 루머도 지나가고 나면 사실이 되는 왜곡과 은폐의 공간이 바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어항이다. 시인은 이 공간 자체를 폭로하려 하기보다는 이 안에 담긴 우리 자신들의 시선에 주목한다. 대낮에도 어둡고 명징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삶의 실재에 가 닿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래서 늘 헛것을 찾아 나서고 만나고 유희하는 일 자체가 김점용 시의 일부가 된다. 메롱메롱 은주 눈을 감고 다다른 소리의 세계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에 새겨진 글자 은주. 그 은주는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그 나무의 이름인지[隱柱], 혹은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隱舟] 모를 일이다. 인간 본연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자기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것을 시인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는 그에게, "숨은 주인[隱主]"이라는 의미로까지 변주 가능한 이 "은주"는 "메롱메롱 은주" 하고 놀리듯 그의 귓전에 들려온다. 주인을 잃고 떠돌기 때문에 "메롱메롱" 하고 들리는 것이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다"고 고백한다. 눈을 감으면 귀 하나가 한 없이 커져 어느 깊은 산속 떡갈나무 이파리 그 여린 숨소리를 듣네 ―「눈을 감으면」 부분 김점용은 이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그만의 답을 찾아낸다. 그것은 격한 탈주나 방관, 외면이 아니다. 눈을 감고 소리로 세상을 여는 것이다. 그러자 헛것이 덮고 있던 값진 것들이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황홀한 나무들 사이에서 떠밀리는 금빛 나비 한 마리(「立脫」), 검은 보자기돃럼 둥글게 떠오른 산새 울음(「관음증」)과 같은 자연 그 자체다. 그의 고요한 입탈은, 시적 언어로 다시 구현된 소리의 세계를 세상에 쥐여주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