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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 가을비 내리는 저녁의 해후 3. 그 여자의 남편, 그의 연인 4. 노은림이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5. 안개, 자욱한 안개의 거리 6. 황량한 추억의 시간들 7. 세 여자 8. 기억 속에서 무너지는 나날들 9. 지금의 나는 생각하지, 한때 나는 왜 인간이었을까 10. 잃어버린 세대 11. 또 다른 이별의 시작 12. 가을이 떠난 자리엔 바람이 밀려오고 13.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 작가 후기 |
孔枝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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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멀어지는 목소리를 부여잡기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그가 다시 말했다.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저쪽의 목소리이니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신기루처럼 꺼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나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착각은 아닐까, 혹시 그의 고객 중에 노은림이라는 이름이 또 있던가……. 그는 그런 불길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했다. 잠시 웃음을 멈추고 여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냥 웃음이 나왔어. 생각해보니까 우스운 것 같아서……. 여기 지하 다방이야. 꼭 내가 스물여섯 살 적에 형한테 몰래 전화 걸던 생각이 나는 거 있지?” “…….” 은림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는 걸 그는 그제야 깨달으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귓불이 확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랬다. 은림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여자, 노래하듯 경쾌한 서울 토박이 말씨로 이야기하는 여자, 7년 만에 전화를 걸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웃을 수도 있는 여자. ---「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중에서 “명우 씬 왜 그렇게 음악이라든가 미술이라든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어두운 계단을 오르면서 여경이 물었다. 혹시나 그런 질문에 명우가 자존심이라도 상할까 봐 그의 한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였다. “글쎄……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어.” “그럼 뭐에 관심이 있지? 케니 지도 모르고 짐 모리슨도 모르고, 샤갈 전시회 한번 그렇게 가자고 해도 가지 않고, 요요마도, 미도리도 모두 관심조차 없잖아요?” “대신 난 이미자는 알아. 조용필, 그리고 이중섭.” 그는 자신에게 매달린 듯 걷고 있는 여경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바짝 끼워 넣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녀의 작고 동그란 가슴이 느껴졌다. 여경은 갑갑한 듯 잠시 몸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했다. “나도 뭐 꼭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주는 사람들이잖아. 게다가 볼링도 못한다, 테니스도 쳐본 일이 없다. 수영은 어렸을 때 동네 바닷가에서 한 게 전부다. 정말 재미없어. 대체 그럼 학교 다닐 때 뭐 했어요?” “글쎄…… 뭘 했었지?”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학교 다닐 때 무엇을 했던가. ―「4 노은림이라는 여자를 아십니까」중에서 “(……) 가끔씩 방파제 멀리로 은빛 비늘을 무수히 반짝이며 고등어 떼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는데. 살아 있는 고등어 떼를 본 일이 있니?” “아니.” “그것은 환희의 빛깔이야. 짙은 초록의 등을 가진 은빛 물고기 떼. 화살처럼 자유롭게 물속을 오가는 자유의 떼들, 초록의 등을 한 탱탱한 생명체들. 서울에 와서 나는 다시 그들을 만났지. 그들은 소금에 절여져서 시장 좌판에 얹혀져 있었어, 배가 갈라지고 오장육부가 뽑혀져 나가고.” “…….” 여경의 숨이 골라지고 있었다. 그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들은 생각할 거야. 시장의 좌판에 누워서 나는 어쩌다 푸른 바다를 떠나서 이렇게 소금에 절여져 있을까 하고. 하지만 석쇠에 구워질 때쯤 그들은 생각할지도 모르지. 나는 왜 한때 그 바닷속을, 대체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헤엄쳐 다녔을까 하고.” 여경은 반응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이 들지는 못했다. ---「9 잃어버린 세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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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사랑의 기억을 남긴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은림은 예전에 매던 그 낡은 가방을 메고 명우를 찾아온다. 이별 후 지독하게 앓은 명우는 은림에게 전화해 용서해달라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결코 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가고 난 뒤였다. 친구인 은철의 누이이자 노동운동을 함께한 동지, 그리고 친한 후배 건섭의 아내였던 은림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이후 명우는 노동현장에서 동지로 만난 여인과 결혼하고 딸 명지를 낳은 후 결국 헤어져 지금은 남의 글을 대신 써주는 일을 하며 여동생의 후배인 스물여섯 살 문여경과 사귀는 중이다. 은림의 소식을 들은 그날, 명우는 마침 여경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갑자기 경찰서에서 노은림을 아느냐는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병원이었다. 폐결핵 환자인 은림을 데리고 나오며 놀란 마음에 명우는 화를 내고 은림은 명우의 만류에도 담배를 물더니 피를 토했다. 명우는 마땅히 갈 데가 없는 은림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오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여경과 마주한다. 여경은 명우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찾아온 은림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불쾌해한다. 명우와 은림은 7년 만에 같은 방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오랜 친구처럼 지난 이야기를 나눈다. 때마침 여경이 명우를 찾아오고, 곧이어 아이가 차멀미를 하는 바람에 명우의 전 부인이 잠시 도움을 청하러 오피스텔을 찾아오는데…….
등장인물 소개 김명우 80년대 학창시절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기억을 뒤로하고 대필작가로 살고 있는 남자. 동지이자 후배이며, 지인의 아내였던 노은림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떠나려 했지만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 노은림 약대생이었으나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인물. 김명우와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 했으나 그의 거부로 좌절한다. 고문으로 미쳐버린 오빠와 무기징역형을 받고 갇힌 남편을 둔 채 명우를 찾아온다. 문여경 김명우의 여자친구로 구김살 없고 톡톡 튀는 발랄한 성격의 여인. 스물여섯 살의 노은림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화실을 운영하는 그녀는 명우 여동생의 후배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노은림으로 인해 당황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