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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서문 1. 한국프로야구의 출범 2. 롯데 자이언츠 3. 1982년 낮은 기대, 더 낮은 결과 4. 1983년 희망, 그리고 절망 o 자이언츠MVP 1-김용희 5. 1984년 첫 우승 o자이언츠MVP 2- 최동원, 유두열 6. 최동원의 시대 (1) o자이언츠 그때 그 순간-안타까운 운명의 한 방 7. 최동원의 시대 (2) 8. 무너진 삼두마차의 꿈 9. 선수회 파동 10. 사자와 거인, 심장을 바꾸다 o자이언츠MVP 3-허규옥 o자이언츠 그때 그 순간-반년 동안 이어진 연봉협상 11. 슈퍼베이비 박동희 o자이언츠MVP 4-김민호 12. 백만 관중 구단의 우승 (1) o자이언츠MVP 5-김응국 13. 백만 관중 구단의 우승 (2) 14. 백만 관중 구단의 우승 (3) o자이언츠MVP 6-박동희 15. 달콤한 꿈, 거친 현실 (1993년과 1994년) 16. ‘3세대 거인’의 등장 17. 첫 번째 준우승 (1) 18. 첫 번째 준우승 (2) o자이언츠 팬들만의 독특한 응원 기술 19. 외화내빈 o자이언츠MVP 7-박정태 20.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1) 21.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2) 22.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3) 23.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 o자이언츠MVP 8-정수근 24. 888 8577 o자이언츠MVP 9-이대호 o자이언츠 그때 그 순간-3만 석 구장을 찾은 69명의 팬들 25. 만년 꼴찌 팀이 배출한 MVP와 트리플크라운 o자이언츠MVP 10-손민한 26. 로이스터 매직 o자이언츠MVP 11-홍성흔 글을 마치며 자이언츠 히스토리 한국프로야구 리그운영 변천사 연도별 팀당 시즌 경기 수 한국프로야구 신인선발제도 변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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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첫 경기는 그 이튿날, 부산에서 열렸다. 상대는 박영길 감독을 향해 ‘우리 팀에 오면 코치도 못될 사람’이라고 도발했던 김동엽 감독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였다. 영호남 라이벌이자 제과업계 라이벌이라는 경쟁심리는 두 지역과 두 기업의 이목을 모았다. 김동엽 감독과 박영길 감독의 장외입씨름이 흥미를 더욱 자극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는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부산의 좁다란 구덕야구장에서는 16,000명의 관중과 응원단이 터져나가도록 들어차 경기를 관전했다. ---p. 42
1984년의 우승은 최동원에게도 새로운 힘을 주는 사건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휴식하며 치료하고 재충전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무리를 감행해온 28세의 투수. 그는 분명히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고,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고참 타자들도 ‘공의 위력이 예전 같지는 않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의 성적은 다시 올라갔다. 던지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과, 던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의 남은 힘을 짜내갔다.---p. 84 롯데 자이언츠는 대투수를 많이 가졌던 팀이다.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늘 투수력의 빈곤에 허덕이는 팀이기도 했다. 모아놓고 보면 풍성한 이름들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들은 늘 고립되어 있었고,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것을 버티려다 부러지거나 일그러진 채 쓸쓸히 사라져가곤 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늘 애정과 아쉬움과 환호와 분노의 감정이 뒤섞여 터져 나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대투수들이 계주 달리기를 하듯 줄 서서 등장하지 않고 몇 해씩만이라도 포개어 서서 힘을 합칠 수만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롯데의 첫 10년 동안 나타난 ‘대투수’라면 우선 첫 손가락에 꼽힐 최동원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윤학길이 있었다. 그리고 역시 대투수의 자질을 가졌다고 확신했던 양상문도 있었다. 그 세 명의 투수가 함께 마운드를 이끌어가는 것은 한때 부산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꿈이었다. ---p. 102 제2의 최동원으로 불린 투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투수’라고 부르기에도, 그렇다고 ‘실패작’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존재감을 가진 투수로서 기억에 남고 말았다. 바로 ‘슈퍼베이비’ 박동희다. 1990년 4월 1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원정경기가 벌어졌던 대구구장에 야구계 전체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역대 최고의 강속구를 던진다는, 그래서 어쩌면 최동원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최강의 신인 투수 박동희의 프로 데뷔전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 경기 6회말, 전광판에 드디어 박동희의 이름이 새겨지자 관중들은 홈과 원정을 떠나 숨을 죽였다. 박동희가 드디어 프로무대에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p.135 5차전은 다시 하루를 쉰 뒤 잠실로 옮겨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송진우와 정민철이라는 필승카드가 모두 망가진 빙그레가 버틸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 한용덕이 마운드에서 저항했지만, 롯데 타선은 1회와 3회에 두 점씩을 뽑아내며 빙그레 투수진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붙였다. 반면 한국시리즈 내내 ‘빅3’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준 윤형배가 선발등판해 4회까지 1실점으로 막자 강병철 감독은 곧바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던 박동희를 투입해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고, 그렇게 롯데 자이언츠는 두 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p. 170 1999년의 준우승은 롯데 자이언츠의 세 번째 세대가 만들어낸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하지만 1992년에 우승을 이루어낸 뒤 수많은 긍정적인 가능성들이 만들어졌던 것과 달리, 1999년의 준우승 뒤에는 수많은 부정적인 가능성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전력이 쌓여가던 시기에 만든 성과가 아니라, 녹아내리던 시기에 이룬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시즌 뒤 롯데 자이언츠는 선수협의회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간판타자 마해영을, 10년 전 선수회를 만들려고 했던 최동원을 떠나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삼성으로 트레이드해버렸다. ---p. 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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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홈 관중 100만을 돌파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인기구단 롯데 자이언츠! ‘야구의 도시’ 부산이 뜨겁다. 부산 사람이 아니어도 주황색 비닐봉투, 찢어진 신문지만 보면 왠지 모르게 열정이 샘솟는 곳이 사직구장이다. 그리고 그 열기가 하나로 밀집되는 팀이 바로 롯데 자이언츠이다. 2006년 타격 트리플크라운, 2010년 9경기 연속 홈런의 세계최고기록, 타격 7관왕까지 이룬 이대호 선수는 부산에서 우는 아이도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친다는 ‘부산의 대통령’ 버금가는 존재일 정도이다. 부산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의미는 시민 모두의 희망이자 용기요, 삶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열기는 단순히 지금 2011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여름 롯데가 8년 만에 가을야구의 꿈이 영글어가던 그 때, 한 부산지역 고등학교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바라지도, 바라지 않을 수도 없는 한숨을 토로하기도 했다. “롯데가 4강에 가면, 부산지역 고등학교들 입학성적은 다 망하는 겁니다.” 수험생도, 직장인들도, 어르신들도, 아이들도 부산을 들끓게 하고 미치게 하는 것. 바로 롯데 자이언츠. 과연 롯데 자이언츠는 어떤 팀이기에 이토록 부산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걸까? 롯데 자이언츠의 탄생에서부터 우승, 준우승, 최하위 기록, 선수회 파동, 선수 트레이드, MVP 등 롯데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담은 책. 《롯데자이언츠 때문에 산다》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부산 연고, 2회의 우승과 2회의 준우승, 8번의 최하위, 끊임없는 열정과 투혼의 자이언츠 그 감동의 다큐멘터리 한국에서 프로야구 출범이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975년. 그렇게 창단된 한국프로야구에서 롯데 자이언츠 역시 부산 지역 출신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며 22명의 선수들과 계약을 이루어냈다. 당시 그 명단에 한국이 낳은 역대 최고 투수 최동원과 주전포수 심재원이 포함되지 않았던 점은 치명적이었지만, 대신 국가대표 3루수로 이름을 날렸던 김용희가 선수단의 간판 격으로 존재했다. 그 외에 김용철, 김정수, 김일환, 권두조 등도 당시의 멤버들이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첫 경기는 부산에서 열렸다. 상대는 해태 타이거즈. 영호남 라이벌, 제과업계 경쟁구도로 이목을 모았다. 이후 OB, 삼미를 모두 이겨 3연승. 롯데는 ‘다크호스’에서 ‘우승후보’로 까지 격상되었지만 다음 날부터 하락해 시즌을 모두 치르고 나서 6개 팀 가운데 5위에 해당했다. 1983년부터 최동원, 심재원, 유두열이 롯데에 등장했다. 당대 최고의 투수와 포수, 외야수였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입단계약까지 맺었던 최동원의 몸값은 박철순의 두 배가 넘는 1억 원(계약금 7천만 원, 연봉 3천만 원)이었지만, 첫해 최동원이 보여준 활약은 기대를 못 미쳤다. 시즌성적 9승 16패. 부진의 이유는 떨어진 구속, 그것은 커브를 비롯한 다른 무기들까지 한꺼번에 무력화하는 요소였다. 그해 팀은 최하위로 처진 채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이후 최동원은 롯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고, 역사 그 자체였다. 최동원을 따라가다 보면 롯데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자이언츠 전설의 투수, 역사 그 자체였던 최동원 1984년은 롯데에게서 잊을 수 없는 해였다. 한국시리즈 최초 우승. 롯데 자이언츠가 창단 3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팀의 반열에 오른 해였기 때문이다. 이 우승은 최동원에게도 새로운 힘을 주는 사건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휴식하며 치료하고 재충전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무리를 감행해온 28세의 투수. 그렇게 1980년대 내내 최동원은 롯데의 마운드 자체였고, 혹시 대신할 투수가 있으면 쉬고 대신할 투수가 없으면 던지는 투수였다. 1986년에는 팀 승리의 40%안팎을 책임졌을 정도였다. 최동원은 1970년대 후반부터 근 10여 년간 대한민국에서 야구 자체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고교 2학년 시절부터 계속 늘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1981년 최동원은 전기리그 1차 대회에서 팀의 8승 중 7승을 따냈고, 시즌 내내 팀이 치른 이닝의 60%가 넘는 206이닝을 던지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가을에 열린 실업야구 코리언시리즈에서는 8일 동안 치러진 6차전에서 모두 등판해 혼자 3승을 따내며 먼저 두 판을 내준 5전 3승제 승부에서 극적인 뒤집기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물론 그는 진학을 하고 졸업을 할 때마다 ‘역대 최고액’이 걸린 스카우트 파동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어깨에 거액의 보험을 들었다는 가십의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연세대 시절 1년 선배 박철순과의 ‘체벌시비’로 팀을 이탈하며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에서 비롯된 장외의 입씨름들은 늘 최동원의 압도적인 활약과 기록에 의해 지워졌다. 또 최동원은 선수파동에도 앞장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1988년 선수연금 제정, 최저연봉수준 향상 및 연봉인? 상한선 폐지 등 선수회를 만들기 위해 애썼으며 결국 1988년 9월 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발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선수회는 붕괴되고 말았고, 최동원은 1988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최동원과 김시진은 ‘삼성 자이언츠와 롯데 라이온즈’의 대결이라는 자조어린 한숨을 야구장에서 뿜어나게 했던 주역이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전설은 진행중이다 롯데가 잊지 못할 또 한 순간은 1992년이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선수는 바로 롯데가 배출한 유일한 신인왕이자 1992년 우승의 선봉장 염종석이었다. 빠른 공과 슬라이더를 잘 던지는 투수였다. 그해만큼은 염종석이 선동열보다도 나은 성적을 올린 투수가 되었다. 롯데는 빙그레를 맞아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 해 롯데는 기본 전력이 좋았던 빙그레, 해태, 삼성과의 경기에서는 약한 모습이었지만 약체 팀 빙그레, 태평양, LG, 쌍방울, OB만 만나면 강해졌다. 게다가 홈 경기에서 유독 좋은 경기를 펼치자 팬들은 더없이 열광했다. 이미 1991년에 100만 관중을 돌파했던 롯데는 1992년에 다시 120만 관중을 넘어서는 인기를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서울 LG와 두산이 각각 60만과 50만 수준의 관중을 모은 것과 비교하면 그 인기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이어 1995년과 1999년 준우승. 그리고 2011년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2006년 타격 트리플크라운, 2010년 사상 최초 타격 7관왕, 세계프로야구 최초의 9연속경기 홈런 기록 등을 보여준 롯데 자이언츠 최강의 타자 이대호 선수를 키워냈으며, 그간 거쳐간 감독만 10여 명, 한국야구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를 발탁하기도 했다. 그동안 정규리그, 올스타전 MVP에서도 많은 선수들을 배출하며 우리나라 최고 인기 팀을 증명했다. 최동원, 김용희, 김용철 등이 이끌었던 1980년대 초반의 1세대, 1990년대 초반의 2세대, 주형광, 강상수, 마해영, 박현승 등 1994년과 1995년의 3세대, 거기에 이대호와 손민한을 공수의 축으로 삼았던 2000년대 중반 이후의 4세대가 롯데의 살아있는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롯데의 전설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저자 김은식은 글을 마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며 롯데 팬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롯데 자이언츠에게 최동원의 시대와 염종석의 시대와 박정태의 시대, 그리고 ‘888 8577’의 시대와 로이스터의 시대는 곱씹어 자양분으로 만들 소중한 경험이고 교훈들임에 분명하다. 그것을 더는 놓치지 말아주기를, 그래서 ‘애증’이 아닌 ‘사랑’을 받는 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 말고 날마다 사직야구장의 3만 석을 가득 채운 채 울고 웃는 팬들이 원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