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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일러두기 1. 房兵曹胡馬(방병조의 호마) 2. 畵鷹(매 그림) 3. 春日憶李白(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다) 4. 陪鄭廣文遊何將軍山林十首(정광문을 모시고 하장군의 산림에 놀러 가서 지은 시 10수) 5. 重過何氏五首(다시 하씨에게 들러서 쓴 시 5수) ... 93. 風疾舟中伏枕書懷三十六韻奉呈湖南親友(풍질에 걸려 배 안에서 침상에 엎드려 감회를 쓴 36운을 호남의 친구들에게 드리다) 참고문헌 시구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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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그림 속의 매, 즉 화응畵鷹을 노래한 것이다. 저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는 개원 연간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두보는 맹금猛禽을 대상으로 여러 편의 영물시를 읊었는데, 이 시는 그중 최초의 것이다. 마지막 연을 보면 그림의 매를 실제의 매인 양 간주하여 자신의 바람을 담았으니, 기탁을 중시하는 두보 영물시의 특징이 이 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첫 연에서는 도치법을 사용하여 돌올突兀한 느낌을 주고 있으니 이른바 ‘돌올지필突兀之筆’을 구사하여 강한 필세를 추구하는 頭시의 작법도 이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 p.3
이 시는 두보가 최씨의 초당을 방문하여 주변의 경관을 통하여 느낀 한적한 운치와 이웃한 서장西莊의 왕유에 대한 풍자를 적은 것이다. 이 시에 언급된 최씨 동산초당은 왕유의 내형인 최계중의 장원으로 왕유의 망천장과 이웃하고 있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두보는 이웃한 왕유의 별장에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한 듯한데, 당시 왕유는 조정에 벼슬을 살러 가면서 장원의 문을 닫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시인은 한적한 자연 속에서 누리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이를 버리고 떠난 왕유에게 속히 돌아올 것을 권한 것이다. 이 시의 저작 시기는 건원 원년 가을로 보이는데 당시 두보는 화주의 서남쪽에 자리한 남전현에 있었다. 이 시는 또한 특이한 구법의 요체시로도 주목된다. --- p.75~76 이 시는 상원 원년 여름 성도의 초당에서 지은 것이다. ‘만리교’에는 고향을 뒤로하고 떠나온 머나먼 거리가 느껴지고, ‘초당 하나’에는 몸을 붙여 살 곳을 정하기까지의 신고와 안도감이 함께 배어난다. ‘백화담’에선 또 지천으로 피고 지는 꽃들이 눈에 선하니, 그곳을 세계인 듯 살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에서 달관이 엿보인다. 어렵게 얻었기에 부서질까 봐 마음 졸여 가만가만 가는 붓으로 둘째 연을 이었다. 미풍은 푸른 대를 품고 머금은 물기로 곱게 씻어 주고, 부슬비는 붉게 핀 연꽃을 적셔 그 맑은 향기를 조금씩 전한다. --- p.133 이 시는 상원 2년 봄에 성도에서 지은 것으로, 봄날 밤의 비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봄비의 공을 예찬하고 봄비를 반기는 심사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두보는 성도에 거처를 마련하여 생활이 안정되었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때보다는 심정이 훨씬 여유로워졌을 때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세밀한 관찰을 통하여 강촌의 밤비 내리는 경물을 묘사하고 아울러 내심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시 전체의 결구가 엄정하며 표현이 정확하고 정련되어 가장 많은 사람에 의하여 회자되는 명편이다. --- p.155 이 시는 화경정이 단자장을 토벌한 공을 믿고 교만하게 천자의 예악을 사용하자 이를 풍자하여 지은 것이다. 화경정花驚定은 당나라 때 장수로서 이름을 경정敬定이라고도 한다. 숙종 상원 초에 단자장段子璋이 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최광원崔光遠을 성도윤으로, 화경정을 아장牙將으로 삼아 토벌하였다. 단자장을 주벌하고 나서 화경정이 군사를 데리고 동촉을 노략질하자 숙종은 최광원을 먼 곳으로 내쫓았다. 화경은 화경정이 아니라 당시 성도의 가기라고도 한다. 상원 2년에 지었다. --- p.180 이 시는 두보가 보응 원년에 성도成都에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두보는 형제들과 떨어져 혼자 성도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노환으로 힘든 생활을 보내면서도 군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들판에 나가 멀리 경관을 조망하지만 세상사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나라와 가족을 염려하는 두보의 진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 --- p.189 이 시는 대력 2년 가을 기주夔州에서 지은 것이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은 온 가족이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산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고 국화주를 마시며 즐기는 명절이다. 대력 2년 가을 두보는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기주에서 홀로 중양절을 맞았다. 병든 몸을 이끌고 홀로 높은 곳에 올라 만리타향의 스산한 가을 풍경을 마주한 시인의 고독한 모습이 심금을 울린다. 이 시는 역대 칠언율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되었다. 호응린胡應麟은 “이 시는 분명 고금의 칠언율시 중의 으뜸이니 당대의 시인 중에서 으뜸임은 말할 것도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슬프면서도 웅혼한 ‘비장悲壯’의 풍격이 잘 구현된 작품이다. --- p.348~349 이 시는 대력 3년 늦가을에 강릉을 거쳐 공안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여 살 때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늦게 귀가하며 목도한 쓸쓸한 경물을 묘사하면서 이리저리 떠돌며 오갈 데 없고 늙어서도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복잡한 심사를 표현하였다. 두보 요체시의 명편으로 알려져 있다. --- p.354 이 시는 대력 3년 늦가을 공안에서 위광찬을 전송하며 지은 것이다. 위광찬은 당시 소부, 즉 현위 벼슬을 지내던 사람인데 아마도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율연의』에서는 위광찬이 두보를 존경하던 후배일 것이라고 하였다. 두보는 그를 전송하는 주연에 참석하여 이별한 뒤에도 계속 소식을 전하자고 하면서 자신의 시는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쓰는 시마다 어지러운 시절의 심란함이 진하게 묻어나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되어 그랬을 것이다. 토번이 재차 침입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는 때에 강호에서 늙어 가는 처지를 슬퍼하는 심사가 이별의 아쉬움에 더해져 끝 모를 애달픔으로 나아간 시라 하겠다. --- p.356~357 이 시는 두보가 죽기 직전인 대력 5년 겨울에 상강湘江의 배 위에서 침상에 엎드려 지은 장편 오언배율이다. 당시 두보는 담주潭州(長沙)에서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가며 동정호洞庭湖를 지나는 도중에 풍질風疾이 심해져 결국 그해 겨울에 담주와 악주岳州(岳陽) 사이에서 죽었다. 두보의 절필시絶筆詩로 일컬어지는 이 시에서는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마치 죽음을 예감한 듯 시인은 자신의 평소 감회와 지난 일을 일일이 추억하며 근처의 친구에게 부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호남친우湖南親友’는 담주 막부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 p.3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