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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카밀라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 사과라도 해도, 어쩌면 홍등이라고도 파란 달이 뜨는 바다 아래 오로라물고기 평화와 비슷한 말, 그러니까 고통의 말 바다의 파랑 속에 잠긴 도서실 얼마나 오래 안고 있어야 밤과 낮은 제2부 지은 검은 바다를 건너간다는 것은 우리들의 사랑이야기, 혹은 줄여서 ‘우리사이’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 지나간 시절에, 황금의 시절에 태풍이 불어오기 전 날의 검모래 그대가 들려주는 말들을 내 귀로도 들리고 제3부 우리 적적함, 혹은 불안과 성가심 사이의 적당한 온기 날마다 하나의 낮이 종말을 고한다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저기, 또 저기, 섬광처럼 어떤 얼굴들이 특별전 :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1. 1985년 6월 무렵, 금이 간 그라나다의 뒷유리창 2. 1986년 3월 무렵, 에밀리 디킨슨의 시 3. 2012년의 카밀라, 혹은 1984년의 정지은 - 작가의 말 |
金衍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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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은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1988년부터 1992년까지의 졸업 앨범을 찾아서 교장실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파마머리에 검정색 치마를 입은, 삼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다섯 권의 졸업 앨범을 들고 교장실로 들어왔다. 군청색과 보라색 벨벳 표지의 상단에는 금박으로 졸업 연도가, 하단에는 꽃 모양이 인쇄돼 있었다. 확실하게 비교하려고 나는 가방에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년경)’을 꺼냈다. 그러자 나를 빤히 쳐다보던 교장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사진이 다 남아 있었네요.” --- p.51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 봤을까? 나는 생각했다. 한 번 더.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 이번에는 봤을까? “이게 무슨 뜻이지?” 내가 오빠에게 물었다. “H. O. P. E.” “희망이네.” 그날 저녁, 우리의 희망은 아빠가 그 높은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물론 살아서. 하지만 그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 p.176 그렇다면 우리에게 양관은 밤의 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청 옆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우리 학교인 진남 여고 뒷산의 열녀각과 왼쪽 언덕 위의 양관이 비슷한 높이로 보였는데, 오전에는 잘 모르다가 이따금 하교하는 길에 뒤를 돌아보면 두 건물의 그림자가 학교에 드리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가 두 건물의 뒤편으로 넘어가는 오후 네시 이후 학교는 그늘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학교가 그 정도였으니까 양관은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도 양관을 생각할 때면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십 대 시절 우리는 양관을 떠올릴 때마다 오염, 불길, 타락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그건 아마도 식민지 말기 가족이 모두 떠난 양관을 혼자서 지켰다던 백인 소녀 앨리스의 저주가 그 집에 드리워져 있다던 소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1981년부터 시작된 진남조선공업 이선호 회장 일가의 몰락은 그 소문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p.252 진남호텔로 가면서 나는 언젠가 고해성사를 하러 보좌신부님을 찾아갔던 일을 생각했다. 학생 미사에서 보좌신부님은 강론을 통해 진남조선소에서 네 명의 노동자가 불에 타 죽고, 한 명의 노동자가 타워크레인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을 거론하면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학생들에게 부탁했다. 미사가 끝난 뒤, 나는 사제관으로 보좌신부님을 찾아가 하느님은 자살한 영혼도 구원하느냐고 물었다. 신부님은 아무런 대답 없이 창밖만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꼭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새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신부님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풀더니 자살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존재니까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신부님의 목소리는 떨렸다. 사제관의 공기는 무더웠고, 또 무거웠다. 창문을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부님은 그냥 닫아둔 채로 앉아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닦을 마음도 먹지 못했다. --- p.302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신비를 체험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을 때, 어둠 속에서 포옹할 때, 두 개의 빛이 만나 하나의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듯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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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6개월의 갓난아기 때 미국 백인 가정으로 입양된 후 성장하여 작가가 된 26세의 카밀라 포트만. 뉴욕의 한 출판사와 자신의 뿌리를 찾는 논픽션을 계약한 것을 계기로 친부모를 찾기 위해 모국인 한국의 진남으로 일본계 미국인 약혼자 유이치와 함께 온다. 카밀라가 가지고 있는 단서는 입양 당시의 기록인 낡은 사진과 편지 한 장밖에 없지만 그녀는 그 안에 있는 단서들을 총동원하여 진남 현지의 관련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 조각을 맞추어간다. 그렇지만 현지 사람들의 기묘하게 차가운 행동은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난 카밀라에게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마침내 그녀가 찾아낸 자기 출생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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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빈 잔은 채워지기를, 노래는 불려지기를, 편지는 전해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돌아가고자 한다. 진짜 집으로. 나의 엄마에게로." 한, 중 문예지 동시 연재, EBS ‘라디오 연재소설’ 전편 낭독을 거쳐 드디어 책으로 만나다 김연수의 신작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2011년 여름부터 2012년 여름까지 계간 『자음과모음』, 중국 격월간『소설계』에 ‘희재’라는 제목으로 한?중 문예지 동시 연재를 했던 작품으로 계간지 연재 종료 이후 작가의 수정을 거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 최종 완성되어 다시 지난 여름 한 달간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서 작품 전편이 낭독되면서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은바 있다. 열일곱 살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생후 6개월령에 미국 중산층 백인 가정으로 입양되어 성장한 작가 ‘카밀라 포트만’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논픽션을 쓰기 위해 한국 진남으로 와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을 전체 줄기로 삼아 작가는 다른 이들의 ‘기록’과 ‘기억’과 ‘증언’만으로는 온전히 말해질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말하려고 하고 또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려고 한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런 소리들 사이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 번의 인생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들리는 목소리인 셈이었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건 그날 새벽, 조선소 사장에게 부탁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양관으로 달려가면서 지은이 수없이 읊조렸던 말이라는 걸 이제 우리는 알게 됐다. 그 말을 생각하면 우리라는 존재는 한없이 하찮아진다. 한 소녀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어둠 속을 달리던 그 새벽에 우리는 숙면에 빠져 있었으니까.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거기에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불길은 우리를 태우지 못했고 그 연기는 우리를 질식시키지 못했다.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 본문 중에서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이 소설에는 2012년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21세기 미국과 한국, 일본, 방글라데시와 1988년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한국 남해안의 소도시 진남을 오가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주인공격인 카밀라 포트만(한국명 정희재)를 비롯하여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운동화 갑피를 만드는 부산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리며 미국 유학 간 아들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업체의 부당해고 투쟁 끝에 병사한 늙은 어머니의 이야기, 그런 어머니를 기억하는 서 교수의 기억,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타워 크레인에 올라갔다가 끝내 투신자살한 아버지의 이야기와 그를 향해 보낸 ‘HOPE’ 모스 부호에 대한 정지은의 기억, 죽은 양모 앤을 기억하는 카밀라 포트만과 얼굴을 모르는 생모에 대한 엇갈린 관련자들의 기억과 증언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이야기 등은 저마다의 ‘장()’에서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혹은 편지와 사진과 라디오 사연과 다큐멘터리 영상 화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서 개벌적인 이야기구조 속에 서로가 끝을 물고 그 시대의 진실로 접근해 들어가는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로 귀결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소설 전체는 심연을 건너 타인에게 가닿을 수 있는 날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관계에서 비롯될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공간인 진남 이야기 박물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그러하듯,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의 의미가 그러하듯 작가는 이토록 어둡고 고통스러운 사건 속에 외면당한 진남 사람들의 과거가 담긴 파편을 주워담아 ‘아카이브’를 만들어간 끝에 카밀라 포트만 혹은 정희재의 탄생이 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진 비밀스러운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심연’과 ‘희망’ 그 사이의 아득한 간격은 그렇게 좁혀지고 ‘나’와 ‘당신은’, ‘우리’는 서로 맞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