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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편견과 오해에 갇힌 문학, 카프(KAPF)를 정리하며

김기진 붉은 쥐

박영희 전투
사냥개
지옥순례

최서해 탈출기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홍염紅焰

조명희 낙동강

이기영 원보[一名 서울]
서화鼠火

한설야 과도기[一名 새벽]

윤기정 양회굴뚝

권환 목화와 콩

김남천 공장신문
물!

이북명 암모니아 탱크
민보의 생활표

백신애 꺼래이

지하련 도정道程

저자 소개 13

金南天, 본명:김효식(金孝植)

1911년 평남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다. 1930년 카프 도쿄 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1931년 호세이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 때도 체포되어 복역하
1911년 평남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다. 1930년 카프 도쿄 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1931년 호세이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 때도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35년 임화·김기진과 협의하여 카프가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계를 낼 때까지 조직에 충실하면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8·15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까지 올랐으며, 한국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대하』외에 연작소설인『경영』, 창작집『소년행』『삼일운동』『맥』등이 있으며, 1953년 휴전 직후 남로당계 박헌영 세력 제거와 관련해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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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箕永, 호 민촌(民村)

농촌현실의 발견과 새로운 인물유형의 창조를 통해,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냄으로써 농촌현실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사실주의소설의 가능성을 확보하고 '경향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작 『고향(故鄕)』을 쓴 작가 이기영이다. 충남 아산 출생으로 1924년 『개벽』에 「오빠의 비밀편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이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1931년과 1934년의 카프검거사건 당시 구속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카프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월북하여
농촌현실의 발견과 새로운 인물유형의 창조를 통해,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냄으로써 농촌현실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사실주의소설의 가능성을 확보하고 '경향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작 『고향(故鄕)』을 쓴 작가 이기영이다. 충남 아산 출생으로 1924년 『개벽』에 「오빠의 비밀편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이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1931년과 1934년의 카프검거사건 당시 구속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카프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월북하여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4년 사망하여 평양에 묻혔다.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한 초기작 『민촌』, 『농부 정도룡』, 노동자 관점에서 현실을 반영한 후기 작품 『서화』, 『고향』, 『두만강』등이 대표작이다. 또한 소설집에는 『민촌』(1927), 『신개지(新開地)』(1938), 『생활의 윤리』(1942), 『봄』(1942), 『동천홍(東天紅)』(1943), 『광산촌』(1944), 『처녀지(處女地)』(1944), 『어머니』(1948)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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曙海, 학송(鶴松)

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24년 「토혈」 「고국」으로 등단했다. 1925년에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중견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24년 「토혈」 「고국」으로 등단했다. 1925년에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중견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7년에는 조선문예가협회의 간사직을 맡았으며 전해에 휴간한 조선문단을 남진우가 인수하여 1월에 다시 입사하지만 4월에 또 실직했다. 위문 협착증을 앓던 그는 대수술 중에 과다 출혈로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은 '체험문학', '빈궁문학', '저항문학'으로 규정된다. 몇 명의 엘리트의 눈으로 바라본 일부의 삶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대다수의 극빈층의 생활상을 날카롭게 표현해 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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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화(朴啓華)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집과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영천공립보통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하고,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와 2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1926년 교사 시절, 북풍파인 ‘경성여자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여성운동을 한 것이 탄로 나 권고사직을 당하고 서울로 올라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필명 박계화(朴啓華)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신춘문예 첫 여성 작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결혼 후 경산군 반야월의 과수원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 체험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이 「복선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집과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영천공립보통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하고,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와 2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1926년 교사 시절, 북풍파인 ‘경성여자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여성운동을 한 것이 탄로 나 권고사직을 당하고 서울로 올라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필명 박계화(朴啓華)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신춘문예 첫 여성 작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결혼 후 경산군 반야월의 과수원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 체험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이 「복선이」(1934), 「채색교(彩色橋)」(1934), 「악부자(顎富者)」(1935), 「식인(食因)」(1936) 등의 바탕이 되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는 실향민들을 그린 「꺼래이」(1934)와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음에도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심정을 담아낸 「광인수기」(1938)를 포함해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소설 20여 편과 수필 및 기행문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39년 6월 23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으로는 『꺼래이』, 『채색교』, 『적빈』, 『악부자』, 『소독부』를 비롯해 소설 22편, 수필, 기행문 등 33편을 남겼으며 2008년 고향 영천에 문학비가 세워지고 ‘백신애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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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권경완(權景完)이며, 1903년 2월에 경남 진주부 진해군 서면 오서리(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경행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중동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야마가타(山形)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4년에 단편소설 「아즈매의 사(死)」가 『조선문단』현상공모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후 소년소설,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 교토제대를 졸업한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하였고, 카프 도쿄지부와 무산자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와 프로문학 작품을 발표하고 프
본명은 권경완(權景完)이며, 1903년 2월에 경남 진주부 진해군 서면 오서리(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경행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중동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야마가타(山形)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4년에 단편소설 「아즈매의 사(死)」가 『조선문단』현상공모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후 소년소설,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 교토제대를 졸업한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하였고, 카프 도쿄지부와 무산자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와 프로문학 작품을 발표하고 프로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 공동시집 『카프시인집』을, 1933년에 공동소설집 『농민소설집』을 출간하였다. 1931년, 1934년 두 차례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동안 폐결핵으로 고생하였다. 1935년에 석방된 후 낙향하여 김해의 하자마(迫間) 농장에서 일하였다. 1939년에 재차 상경하여 문학에 매진하였다. 1943년에 첫 단독시집 『자화상』을, 1944년에 두 번째 시집 『윤리』를 출간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서기장을 비롯해 여러 직책을 맡았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1946년에 시선집 『동결』을 출간하였다. 1947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좌익세력 검거의 와중에 귀향하여 경남 마산에 머물렀다. 가난과 병마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1954년 7월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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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명(李北鳴, 1910∼1988)은 주로 1930년대에 작품을 발표하고 해방 이후에는 북측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남측에는 그 행적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생몰 연대조차 불명확했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그가 남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글들과 지인들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해 왔는데, 1999년에 북측의 사회과학원에서 《문학대사전》(총5권)을 펴냄으로써 이북명의 전반적인 행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간의 연구와 《문학대사전》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북명[본명 순익(淳翼)]은 1910년 9월 18일에 함경남도 함흥
이북명(李北鳴, 1910∼1988)은 주로 1930년대에 작품을 발표하고 해방 이후에는 북측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남측에는 그 행적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생몰 연대조차 불명확했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그가 남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글들과 지인들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해 왔는데, 1999년에 북측의 사회과학원에서 《문학대사전》(총5권)을 펴냄으로써 이북명의 전반적인 행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간의 연구와 《문학대사전》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북명[본명 순익(淳翼)]은 1910년 9월 18일에 함경남도 함흥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7년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한 후 공장 ‘친목회’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3년간 근무했다. 그 후 한설야와 경성에서 잡지 편집을 했고, 흥남에서 서적상을 하기도 한다. 1937년부터 장진강 수전공사장에 근무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장진강 발전소 노동자들과 함께 발전소 보위에 나섰으며 그 후 장진강 발전부 ‘전로조합’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1948년에 북로당 중앙위원이 되고,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문화선전과에서 일했다. 1949년에 중앙당학교 6개월반을 졸업하고 중앙당 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문화공작대 성원으로 충청북도에 파견되었으며, 그 후 중앙당학교를 다시 졸업하고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다. 1956년에 노동당 중앙위 후보위원,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 겸 상무위원을 지냈다. 1961년에는 조국 평통위 위원을 거쳐 1967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 부위원장직을 맡은 바 있다. 그는 생의 말년에 금성청년출판사 창작실에서 현역 작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북명은 공장 체험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창작해 ‘최초의 노동자 작가’라 불리기도 했으며, ‘카프’의 방향 전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등단작인 〈질소비료공장〉(《조선일보》, 1932. 5. 29∼31)은 단 2회 연재된 후 중단되었지만, 같은 해에 〈암모니아 탕크〉, 〈기초공사장〉, 〈출근정지〉 등의 단편을 계속 발표했다. 이어서 〈여공〉(1933), 〈병든 사나이〉(1934), 〈정반(正反)〉(1934), 〈오전 3시〉(1935), 〈민보의 생활표〉(1935), 〈공장가〉(1935) 등 공장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는 소재에 변화를 보여 공장 체험 이외의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구제사업〉, 〈현대의 서곡〉, 〈요양원에서〉, 〈도피행〉, 〈암야행로〉(이상 1936년) 등과 〈아들〉(1937), 〈연돌남〉, 〈답싸리〉(이상 1937년), 〈비곡(悲曲)〉, 〈의학박사〉(이상 1938년), 〈칠성암(七星岩)〉, 〈야회〉(이상 1939년) 등이 그것이다. 일제 말엽에 들어서는 작품 발표 빈도가 낮아지지만 계속되었다. 〈화전민〉, 〈희비자(喜悲者)〉(이상 1940년), 〈형제〉, 〈빙원〉(이상 1942년), 〈갑돌어미〉(1944) 정도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친일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해방 이후에는 북측에서 이른바 평화적 건설 시기의 노동 소설로 꼽히는〈로동일가〉(1947)를 발표했다. 그리고 장편 《당의 아들》(1961), 《등대》(1975) 등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재북 작가로서 창작한 작품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성에 대해 강조했던 식민지 시기의 작품들의 주제가 지속되면서도 ‘김일성 중심의 당파성’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부가되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평론으로 〈사실주의 절대기술〉(1935), 〈주제의 적극성 기타〉(1936), 〈공장 문학과 농민 문학〉(1936), 〈문학 건설에 자(資)할 신제창(新提唱)〉(1939), 〈자기비판과 소설의 순수성 파악〉(1939)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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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李現郁

본명 이숙희(李淑姬). 필명 이현욱(李現郁), 지하련. 1912년 7월 11일 경남 거창 태생. 일본 소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경제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5년 카프의 지도자인 임화와 결혼하였고, 1940년 소설 「결별」이 백철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발표되면서 등단했다.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1947년 임화와 함께 월북할 때까지 작가로 활동하였다. 1953년에 임화가 사형에 처해지고, 만주에서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지하련은 실성한 채 헤매 다녔다고 하며, 1960년 초에 평북 희천 근처의 교화소에 격리 수용되었다가 병사했다는 설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
본명 이숙희(李淑姬). 필명 이현욱(李現郁), 지하련. 1912년 7월 11일 경남 거창 태생. 일본 소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경제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5년 카프의 지도자인 임화와 결혼하였고, 1940년 소설 「결별」이 백철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발표되면서 등단했다.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1947년 임화와 함께 월북할 때까지 작가로 활동하였다. 1953년에 임화가 사형에 처해지고, 만주에서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지하련은 실성한 채 헤매 다녔다고 하며, 1960년 초에 평북 희천 근처의 교화소에 격리 수용되었다가 병사했다는 설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결별」 「체향초」 「가을」 「산길」 「종매」 「양」 「도정」 등이 있으며, 소설집 『도정』이 있다.

지하련의 다른 상품

에스페란토어로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약칭이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을 의미한다. 카프는 1925년 8월 프로문학 단체인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제휴로 탄생했다. 김기진·박영희 · 이상화 · 송영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조명희 · 최서해 · 이기영 · 조중곤 · 윤기정 · 한설야 · 임화 · 김남천 등이 가담했다.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하에 문학 운동을 벌였으나,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친 검거 사건으로 조직이 와해되어 결국 1935년 5월 해산했다.

金基鎭

호는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은 도쿄 유학 시절에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뒤 1923년 귀국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에는 박영희, 이상화, 김복진 등과 함께 좌익예술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했고, 1925년 염군사와 제휴하여 카프를 창립했다. 그는 1926년 박영희와 <내용?형식 논쟁>을, 1929년 임화 등 젊은 카프작가들과 <예술대중화 논쟁>을 벌이며 한국문학과 비평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1931년과 1934년의 ‘카프 검거 사건’ 때 모두 검거되었으며, 1935년 김기진과 임화 등이 카프 해산계에 서명함으로써
호는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은 도쿄 유학 시절에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뒤 1923년 귀국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에는 박영희, 이상화, 김복진 등과 함께 좌익예술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했고, 1925년 염군사와 제휴하여 카프를 창립했다. 그는 1926년 박영희와 <내용?형식 논쟁>을, 1929년 임화 등 젊은 카프작가들과 <예술대중화 논쟁>을 벌이며 한국문학과 비평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1931년과 1934년의 ‘카프 검거 사건’ 때 모두 검거되었으며, 1935년 김기진과 임화 등이 카프 해산계에 서명함으로써 카프는 10년 활동의 막을 내렸다. 이후 친일 행보를 보여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체포돼 즉결처분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생환했다. 1985년에 사망한 뒤 1989년에 『김팔봉문학전집』(전7권)이 발간되었고 같은 해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팔봉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朴英熙, 회월

호는 懷月, 창씨명은 芳村香道. 1901년 서울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 도쿄 세이소쿠[正則(정칙)]영어학교 수업을 받았다. 초기에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탐미주의적인 시를 발표했으나,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1924년 [개벽]에 입사한 뒤로는 프로문학으로 전향했다. 1925년 카프를 창립하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아 소설과 평론을 주로 발표했다. 같은 해 [개벽]에 발표한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는 무산계급문학의 필요성과 역사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경향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1926년 김기진과 [내용ㆍ형식 논
호는 懷月, 창씨명은 芳村香道. 1901년 서울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 도쿄 세이소쿠[正則(정칙)]영어학교 수업을 받았다. 초기에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탐미주의적인 시를 발표했으나,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1924년 [개벽]에 입사한 뒤로는 프로문학으로 전향했다. 1925년 카프를 창립하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아 소설과 평론을 주로 발표했다. 같은 해 [개벽]에 발표한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는 무산계급문학의 필요성과 역사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경향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1926년 김기진과 [내용ㆍ형식 논쟁]을 벌인 뒤 카프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곧 임화 등 뜻을 달리 하는 젊은 카프 작가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로 인해 카프 활동에 회의를 품게 되어 1933년 카프를 탈퇴하고 1934년 [동아일보]에 사설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하며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말을 남기고 카프 탈퇴를 공개 선언했다. 그 후 친일 행보를 보였으며 한국전쟁 발발 뒤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된 것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저서에 『회월시초』 『문학의 이론과 실제』 단편소설 『사냥개』 『전투』 등이 있다.

한병도

본명은 한병도(韓秉道). 1900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2세에 동경 유학길에 올라 니혼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이때부터 소설을 습작했다. 귀국한 뒤 1925년 26세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그날 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뒤 1927년에 카프 재조직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카프 이론가로 등장하면서 작품 창작도 병행, 「프롤레타리아 예술선언」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카프 내부의 논쟁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이기영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
본명은 한병도(韓秉道). 1900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2세에 동경 유학길에 올라 니혼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이때부터 소설을 습작했다. 귀국한 뒤 1925년 26세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그날 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뒤 1927년에 카프 재조직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카프 이론가로 등장하면서 작품 창작도 병행, 「프롤레타리아 예술선언」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카프 내부의 논쟁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이기영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창설하고 위원장을 맡았으나 곧 임화 중심의 조선문학가동맹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월북했다. 1947년 북조선문학총동맹 중앙위원장을 맡은 뒤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특히 김일성의 정권 창출에 기여하여 정치적 중심에 섰다. 또 북한문학의 전범이 되는 작품들을 집필해 북한 문단의 초기 활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53년 무렵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숙청과 비판에 앞장섰으며, 그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신 역시 숙청되어 1962년 자강도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가 1976년 고향 함흥에서 사망했다.

효봉

호는 효봉(曉峰). 윤기정은 1921년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2년에 염군사에 입단하여 파스큘라와의 통합을 주도해 1925년 카프의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이때 김복진, 박영희, 한설야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아나키스트 김화산이 [조선문단]에 발표한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로 촉발된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사이의 논쟁에서 아나키스트들을 비판하며 “프로문예의 본질은 그 투쟁적ㆍ선전적 기능에 있음”을 분명히 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에 힘을 실었다. 대표작 「양회굴뚝」은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소재로 하여 볼셰비키적 창작방
호는 효봉(曉峰). 윤기정은 1921년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2년에 염군사에 입단하여 파스큘라와의 통합을 주도해 1925년 카프의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이때 김복진, 박영희, 한설야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아나키스트 김화산이 [조선문단]에 발표한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로 촉발된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사이의 논쟁에서 아나키스트들을 비판하며 “프로문예의 본질은 그 투쟁적ㆍ선전적 기능에 있음”을 분명히 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에 힘을 실었다. 대표작 「양회굴뚝」은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소재로 하여 볼셰비키적 창작방법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카프의 방향 전환 이후의 소설적 경향을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1945년 광복 후에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여 서기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이듬해 월북하여 조ㆍ소문화협회 서기장에 취임했다. 1955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석(抱石)

호는 포석(抱石). 조선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이다. 1923년에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판했다. 이 시기의 희곡이나 시는 종교적 신비주의·낭만주의의 색채가 짙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 관념적인 시를 지었으나 1925년 8월 카프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자전적 단편소설인 「땅 속으로」 발표를 기점으로 혁명적 투쟁을 그리는 작가로 변모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대표작 「낙동강」은 카프 문학사에 있어 신경향파 소설로부터 목적의식기의 소설로 방향 전환을 이룩한 걸작으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김기진
호는 포석(抱石). 조선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이다. 1923년에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판했다. 이 시기의 희곡이나 시는 종교적 신비주의·낭만주의의 색채가 짙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 관념적인 시를 지었으나 1925년 8월 카프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자전적 단편소설인 「땅 속으로」 발표를 기점으로 혁명적 투쟁을 그리는 작가로 변모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대표작 「낙동강」은 카프 문학사에 있어 신경향파 소설로부터 목적의식기의 소설로 방향 전환을 이룩한 걸작으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김기진은 「낙동강」을 “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 없는 인생 기록이자 획시대적인 작품”으로, 조명희를 “제2기에 선편을 던진 작가”라 평했다.

조명희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는데, 망명 이후에도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시와 소설을 집필하는 한편 농민청년학교 교사와 조선사범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며 고려인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이주되었으며, 1938년 예조프의 ‘대숙청’ 당시 KGB에 의해 일본 간첩으로 몰려 4월 15일에 사형언도 받고 5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브스크에서 총살당했다. 사후 약 20년이 지나 흐루쇼프 정권 때 소련작가연맹회원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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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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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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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UB(DRM) | 12.88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22.7만자, 약 7.5만 단어, A4 약 142쪽 ?
ISBN13
9791189271848
KC인증

출판사 리뷰

가려진 작가, 지워진 작품. ‘카프(KAPF)’와 그들의 문학

뼈 빠지게 벌어서는 한 푼 저축이 없이 그저 입살이도 바쁘게 거의 거의 살아가는 자기가 한없이 가엾게 생각되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이달도 출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이 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딱 막혔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오늘날 읽어도 한 치 어색함이 없이 직장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 문장은,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 ‘조선 최초의 노동자 출신 작가’ 이북명이 쓴 단편 「민보의 생활표」(1935)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북명은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1932년 첫 작품 「질소비료공장」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체험으로 얻은 구체적인 현실성을 바탕으로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당대 문인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을 제외하면 오늘날 ‘이북명’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카프’의 후신인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소속 작가이자, 월북 작가였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른다.
- 한국 근ㆍ현대문학의 잃어버린 파편, 카프

중ㆍ고등학교를 마친 한국인이라면 문학 시간에 한번쯤은 ‘카프’라는 명칭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카프’ 하면 흔히 ‘일제강점기 때의 사회주의 문학단체’ ‘작품 대부분이 살인과 방화로 끝난다.’ 혹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관념적이고 정치적 목적성이 짙어 그 작품 수준은 높지 않다.’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작품을 읽어 보았는가 하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 1950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거치며 카프 문인들을 비롯해 월북한 작가들의 작품은 우리 문학사와 교육계에서 배제되었다. 1987년 6ㆍ29 민주화선언 이후 시행된 ‘월북 작가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그들의 작품집과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부 작품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카프문학에 대한 인식은 실제로 읽은 작품에 근거하기보다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의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카프문학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편이자 당대 하층민의 삶을 보여 주는 창(窓)이었고, 카프 내ㆍ외부의 활발한 작품 활동과 논쟁은 우리 한국문학을 발전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을 살펴볼 때라야 한국문학의 온전한 자취를 파악할 수 있다.
대한민국 스토리DNA 스물네 번째 책, 『탈출기?카프문학 작품 선집』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한국문학의 성장과 발전에 큰 축을 담당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검열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어 가려지고 지워졌던 ‘카프문학’을 온전히 마주 보고자 엮은 책이다. 카프 결성(1925) 이전의 신경향파문학부터 카프의 해산(1935)까지 김기진, 박영희, 최서해 등 주요 작가 열두 명의 작품 스무 편을 발표된 순서에 따라 배치하여 카프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사회주의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짐작케 하는 작품까지 수록해 당대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 한국문학의 잃어버린 파편, 카프문학을 만나 보자.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우주
‘대한민국 스토리DNA’ 스물네 번째 책

‘대한민국 스토리DNA 100선’. 새움출판사가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이 선집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째는, 이야기성이 강한 작품을 골라 펴냈다는 점이다. 둘째는, 드라마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원형(DNA)이 되는 작품 위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성에 주목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의 내력을 오롯이 껴안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정신사를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작품들을 꼼꼼하게 챙기고 골랐다. 옛날 민담에서부터 현대소설과 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 가운데 스토리가 풍부하고 뚜렷한 작품을 선정해 과거와 현재,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100권을 채워 나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모든 역사 드라마와 영화의 원형이 된 이광수의 장편소설 『단종애사』, 도시 빈민들의 뒷골목을 생생하게 조명한 80년대 베스트셀러 『어둠의 자식들』, ‘첫사랑’과 ‘없는 자의 슬픔’을 주제로 한 단편집 『소나기』, 한국 대표 문학상들의 시작점이 된 작가들의 탁월한 작품들을 모은 『무진기행』 등이 대한민국 스토리DNA를 구성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탈출기 ? 카프문학 작품 선집』은 시리즈 중 스물네 번째 책이다. 대한민국 스토리DNA는 이후에도 국문학자나 비평가에 의한 선집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대중의 선호도를 우선적으로 반영하여 새로운 한국문학사를 구성해 갈 계획이다.

● 본문 속으로

그렇다, 사람은 한 번 살다가 한 번 죽는다. 이것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 있느냐. 무엇이 귀하냐? 무엇이 대단하냐? 사람은 났다가 죽는다는 것을!
_31쪽. 김기진 「붉은 쥐」

그러나 오직 싸움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어지는 때에 일어나는 치명적으로 부르짖는 싸움이며, 생활의 안락을 여지없이 빼앗길 때에 일어나는 붉은 피 마당에서 싸움이 비롯되는 것이다.
_68쪽. 박영희 「전투」

아내가 나간 뒤에 나는 아내가 먹다 던진 것을 찾으려고 아궁지를 뒤지었다. 싸늘하게 식은 재를 막대기에 뒤져내니 벌건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그것은 귤껍질(橘皮)이다. 거기는 베어 먹은 잇자국이 났다. 귤껍질을 쥔 나의 손은 떨리고 잇자국을 보는 내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 ?오죽 먹고 싶었으면 길바닥에 내던진 귤껍질을 주워 먹을까! 더욱 몸 비잖은 그가! 아아,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아내를 나는 의심하였구나!
_112쪽. 최서해 「탈출기」

나는 여태까지 세상에 대하여 충실하였다. 어디까지든지 충실하려고 하였다. 내 어머니, 내 아내까지도 뼈가 부서지고 고기가 찢기더라도 충실한 노력으로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속였다. 우리의 충실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충실한 우리를 모욕하고 멸시하고 학대하였다. … 김 군!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_117~118쪽. 최서해 「탈출기」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같은 여성에 대하여, 남성에게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하여야 합니다.”
_213쪽. 조명희 「낙동강」

“어떻든지 이 세상은 돈만 있으면 제일인즉 무슨 짓을 하든지 돈을 버는 것이 첫째가 아니냐 말야.”
_268쪽. 이기영 「서화」

“우리들 하는 일이 그렇게 편한 줄 아나배……. 오뉴월 염천에 끓는 물을 앞에 끼고 앉아서 손을 담가 보라지, 하루도 못 배길 걸.”
“하루는커녕 단 한 시간이라도 견뎌 보래라.”
“남이 하는 일은 모두가 쉽게 뵈나 봐.”
_355쪽. 윤기정 「양회굴뚝」

급료는 오르지 않는데 물가는 나날이 올라갔다. 살림을 시작하니 십이삼 원씩은 들었다. 작년 유월에 승급이 되어서 잔업수당까지 합하여 일급이 구십 전이 되었다. 좋은 반찬 한번 못 사 먹으면서 이달까지 애를 쓰나 돈은 나날이 부족되었다. … 남이 두부를 사다 먹으면 민보는 비지를 사다 먹었다. 쌀값은 자꾸 올랐다. 전달보다 더 절약하여도 물가가 고등하니까 남은 돈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 이렇게 생활이 궁하고 보니 민보는 요행을 바라는 병에 걸렸다.
_449~451. 이북명 「민보의 생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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