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들어가며_ 무엇이 서울음식인가
1장 서울 설렁탕 오, 소대가리 서울이여! 조선의 왕에게 얻어먹다 2장 종로 빈대떡 거기 가면 빈대떡 신사를 만날 수 있을까 가난도 낭만이게 하다 3장 신림동 순대 순대 볶는 소리가 요란해질수록 전라도의 이름으로 4장 성북동 칼국수 서울이라고 바꿀소냐, 국시는 국시다 골목길에 숨은 경상도의 권력 5장 마포 돼지갈비 대포 한 잔에 뼈에 붙은 살 한 점 한때 남자의 음식이었던 6장 신당동 떡볶이 이제 며느리도 안다 고삐리를 해방시키다 7장 용산 부대찌개 부글부글 냄비 속에 김치와 햄이 섞이고 전쟁과 가난을 추억하다 8장 장충동 족발 서울 어디에서도 장충동의 이름으로 체력은 국력이었던 그 시절의 보양음식 9장 청진동 해장국 새벽을 여는 속풀이의 맛 조선 장꾼의 음식이었다 10장 영등포 감자탕 감자탕은 ‘쏘주’다 뼛골 빠지는 삶 11장 을지로 평양냉면 이것이 백석의 국수 맛일까 평양이라는 이름의 맛 12장 오장동 함흥냉면 타향살이 매운맛을 매운 양념으로 달래다 함경도 아바이의 삶이 이리 질길까 13장 동대문 닭한마리 섬세한 일본인도 반한 터프한 한국음식 시장 사람들의 저렴한 보양 14장 신길동 홍어 홍어는 삭혀야 맛인 거라 날것의 전라도 15장 홍대 앞 일본음식 서울에 울려 퍼지는 ‘이랏샤이마세’ 반일과 친일 사이의 입맛 16장 을지로 골뱅이 한여름밤, 뒷골목의 뜨거운 건배 소리 동해에서 인쇄 골목으로 온 까닭은 17장 왕십리 곱창 다른 듯 닮은 왕십리의 곱창 맛 살을 못 먹는 변두리 나가며_ 음식이 있어 서울살이가 견딜 만했다 |
황교익의 다른 상품
정은숙의 다른 상품
|
음식과 관련되는 서양의 격언 중에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음식이 인문학적 고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생각을 서울의 음식에 적용하면,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p.15
냉면, 중화요리와 함께 설렁탕도 배달음식 중에 하나로 1920~30년대 근대잡지에 자주 등장한다. 모락모락 김을 내는 배달부의 설렁탕은 종로통에 사는 양반들 집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렁탕을 받아들고 허연 국물을 휘휘 저어 한 방울 남김없이 해치우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찌 배달뿐이었겠는가. 초롱을 든 상노를 앞세워 설렁탕집으로 들어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알아 주지도 않는 양반 체면이 뭐 대수인고 하며 혼자서 설렁탕집을 찾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서민들의 설렁탕이 위로 퍼져 나간다. ---p.30 농촌 인구의 서울 유입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농촌 경제 구조의 변화에 따라 땅을 얻지 못한 소작농이 많아졌고,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조선의 농촌 사정이 일제강점기 때보다 나았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으므로 일제 때 서울로의 이주가 조선에서보다 여러 면에서 더 쉬워졌기 때문에 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돈암동, 신당동, 아현동 등지에 진을 쳤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유입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는데, 전쟁으로 파괴된 한반도에서 그래도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서울에 많을 것이라 여기고 모여든 것이었다. 청계천변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 판자촌이 세워졌다. 1960년대에 들어 정부는 도심의 판자촌 주민들을 서울 변두리로 밀어내었다. 이 철거민을 위한 서울 변두리 중 하나가 관악산 북쪽 사면인 신림동, 봉천동, 난곡동 일대였다. 달동네라는 이름도 이즈음에 생겼다.---pp.85~86 혜화칼국수도, 국시집도, 술 한잔에 곁들일 수 있는 안주를 내고 있다. 두 곳 모두 경상도의 상징적인 음식인 문어숙회를 낸다. 대표안주는 좀 다르다. 국시집에 생선전이 있다면 혜화칼국수는 ‘바싹불고기’다. 양념한 불고기를 석쇠에 물기 없이 고실고실하게 구워 참깨를 뿌려 내는데, 불맛이 들어 향미가 좋고 고소하다. 좀 달달하긴 하나 소주, 막걸리, 맥주, 동동주와 두루 잘 어우러진다. 주당들은 술 한잔으로 몸을 풀어 준 후 칼국수를 먹는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칼국수로 속을 달래는 것이다. 술과 안주로 배가 불러도 칼국수 국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먹는 것이 공들여 육수를 낸 수고에 대한 보답이다. 그릇을 들고 국물을 쭉 들이켠다. 시원하다! ---p.101 1974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신상웅의 소설 〈배회〉에는 돼지갈빗집이 자주 등장한다. 다음은 을지로6가 계림극장 맞은편에 있던 돼지갈빗집을 묘사한 장면이다. “이쪽의 주문도 없이 찢은 날파와 마늘과 고추장과 김치 등속을 이글거리는 숯불과 함께 날라 오고 이내 널따란 갈비가 치직거리며 타기 시작했다.” 단편적인 묘사지만 이곳에서 돼지갈비와 함께 차려 나온 찬으로는 찢은 날파와 마늘, 고추장, 김치뿐이며 상추는 빠져 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상추에 싸 먹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식습관일지도 모른다. ---p.125 1970년대 들어서는 돼지고기 수출을 위한 대규모 양돈단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돼지고기는 수출되었지만 다리과 머리, 내장, 피 등 그 부속물은 이 땅에 남았다. 이 부산물은 재래시장에 공급되었고, 이를 재료로 한 족발과 순대, 머릿고기 등이 한국 서민의 음식으로 제공되었다. 삼겹살이 한국인의 주요 음식이 된 까닭도 이와 비슷하다. 1980년대 들어 돼지고기가 등심과 안심 등 부분육으로 수출되면서 삼겹살이 남아돌게 되고, 그게 시장에 풀리면서 한국인의 ‘삼겹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인이 돼지고기 중에 등심과 안심을 고급 부위로 여기는 데 비해 한국인만 기름 많은 삼겹살 부위에 집착하게 된 까닭은, 슬프게도 이 고급 부위를 먹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211 197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어떤 이는 청진동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으니까 밤새도록 춤추고, 통금이 해제되는 4시에 나가는 거죠. 그때 무교동, 명동의 고고장, 호텔 나이트클럽은 통금 끝날 때까지 영업했거든요. 나오면 배도 고프고 그러니깐 청진동에서 해장국에 해장술로 소주도 한잔 하고 가는 거예요. 젊은 날의 추억이죠!” 지금이야 24시간 영업이니 해서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이 많지만 당시에는 꼭두새벽에 속을 풀 수 있는 식당이 흔치 않았다. 그 시절에 청진동 해장국 골목은 통금이 끝나면서 새벽을 맞는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드는 서울의 오아시스였다. ---pp.218~219 뼈다귀도 그렇고, 감자도 그렇고, 감자탕은 태생에서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쇠뼈의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그러니, 감자탕은 어느 특정의 지역에서 유래한 음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하층민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이 음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 감자탕을 서울음식에 넣자 생각한 것은 그 하층민이 가장 큰 집단으로 모였던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 노동을 팔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돼지등뼈와 감자는 안주 겸 끼니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pp.262~263 1948년 《경향신문》에 실린 독자투고의 짧은 글이 퍽 인상적이다. 서울 시민이 투고한 것인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냉면에 대한 서울 시민의 자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양냉면. 냉면옥에는 흔히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평양냉면이 아무리 맛있은들 삼팔선을 넘어 운반해 왔단 말인가요. 서울서 만드는 냉면을 평양냉면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남은 북녘 실향민들에게 서울에 포진한 평양냉면이 위안의 음식이 될 수는 있지만, 서울에도 오랜 전통이 있음에도 스스로 서울냉면이라 주장하는 냉면 전문점이 단 하나 한일관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서울은, 서울에 사는 모든 이에게 타향인 것은 아닌지. ---pp.289~290 서울에서 삭힌 홍어가 인기를 얻으면서 홍어음식 역시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변해 가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 특히 삭힌 홍어회를 즐겨 먹는 전라남도 아랫녁 사람들은, 좀 과장해서 입천장이 ‘홀라당 까질’ 정도로 푹 삭힌 홍어를 즐기지만, 그렇게 하면 맛이 너무 강해 서울의 타지 손님들이 먹기 힘들어한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 출신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먹기에 부담이 적은 덜 삭힌 홍어를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말은 서울에서 홍어회를 먹는 손님층이 다양해졌고, 그에 따라 맛의 보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푹 삭힌 거”라고 주문하지 않는 한 적당히 타협한 서울의 홍어 맛을 보게 된다. ---pp.339~340 |
|
혀끝이 아닌 삶으로 맛보는 서울음식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의 두 저자 황교익과 정은숙은 이런 생각을 갖고 약 1년 동안 서울을 먹으러 다녔다. 서울음식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지였으니 궁중음식이나 반가음식이 먼저 떠오르지만 두 저자가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에서 소개하는 음식 중에 궁중음식이나 반가음식은 없다. 서울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저자들은 어떤 음식을 통해 어떤 서울을 발견했을까? ■ 서울은 이주민의 도시이다 저자들이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에서 소개하는 음식은 17가지이다. 그런데 그 음식 중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서울 명물로 소문난 설렁탕 외에 냉면, 홍어회, 빈대떡, 부대찌개 같은 음식이 포함되어 있다. ‘저 음식들이 서울음식이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 음식들이다. 냉면은 늘 앞에 평양이나 함흥이라는 지명을 달고 있으며, 홍어는 대표적인 남도음식으로 꼽힌다. 빈대떡도 이북이 고향이라 생각되는 음식이며, 부대찌개 하면 사람들은 으레 의정부를 떠올린다.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의 저자들이 이런 음식들을 서울음식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2004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본인 세대부터 서울에 거주를 시작한 세대가 57.2퍼센트, 부모 세대부터 살기 시작한 세대의 비율은 33.6퍼센트라고 한다. 토박이라고 부를 만한 기준인 3대째 이상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세대는 불과 6.5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90퍼센트가 넘는 서울 사람들이 비교적 근래에 팔도 각지에서 서울로 옮겨 온 이주민인 것이다. 서울음식에는 이런 이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이북 실향민들의 삶이 을지로 평양냉면과 오장동 함흥냉면에 스며 있다. 평양냉면 전문점인 우래옥, 을지면옥 등에 가면 연세 지긋한 실향민들 만나기가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보다 쉽다.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추운 겨울밤 뜨거운 아랫목에서 먹던 어머니의 냉면 맛을 을지로에서 찾는다. 신림동에 가면 순대타운이 있다. 원래 재래시장 노점에서 시작한 순대볶음집들이 두 개의 건물에 입주하여 타운을 이룬 것이다. 이곳 순대타운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간판이 전라도의 지명을 붙이고 있다. 신림동 인근에는 1960~70년대 전라도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읍내와 같았던 신림시장에서 값싼 순대볶음에 소주 한잔 하면서 낯선 서울에 적응했다. 음식을 통해 본 서울은 이주민의 도시이다. ■ 음식으로 엿보는 서울의 삶 서울음식에는 서울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서슬 퍼렇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밤새 기사 쓰고 나온 광화문 일대 언론사 기자들, 철야한 노동자들, 밤새워 술을 마셔 댄 글쟁이들, 통금에 걸려 잡혀 있던 사람들, 주변 여관에서 자고 나온 사람들 그리고 밤새 클럽에서 춤을 추다 나온 고고족들이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에 청진옥에서 속을 풀었다. 장충동 족발 골목은 장충체육관에 빚을 지고 있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시합을 보며 김일의 박치기 한 방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응원에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체력은 국력이던 시절의 보양을 위해 족발 골목을 찾았다. 지금 신당동 떡볶잇집은 고등학생보다 가족 손님이 더 많이 찾는다. 신당동 떡볶잇집에서 수줍은 미팅도 하고, 디제이를 보며 열광하던 ‘고삐리’들이 이제 아들딸의 손을 잡고 와 젊었던 그 시절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가난하였다. 서울음식 또한 가난이 만들어 낸 음식이다. 1970년대 좁은 작업장에서는 쉴 새 없이 미싱이 돌아갔다. 작업장으로 들이던 원단이 지게에 실려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분주히 다니던 곳이 동대문 일대이다. 동대문에서 왕십리 쪽으로 조금 벗어나면 마치코바라고 불리던 조그만 철공소들이 밀집해 있었다. 봉제 공장에서, 철공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저녁시간을 위로하던 음식이 곱창구이다. 살코기는 외국으로 수출해야 했던 가난한 한국의 더욱 가난한 노동자들은 소와 돼지의 부산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서울살이를 견뎌 냈다. 같은 시기, 현재의 동대문종합시장의 1층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동대문 일대에서 일하던 사람들, 동대문을 통해 서울로 오가던 사람들이 그 뒷골목에서 ‘닭한마리’를 먹었다. 원래는 백숙이었던 음식이 손님들이 “닭 한 마리!”라고 주문을 하면서 음식의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제 흔하디 흔한 것이 닭이지만, 가난한 시절의 보양식 닭백숙의 기억은 ‘닭한마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 서울과 서울의 삶을 기억하다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에는 서울의 변화도 담겨 있다. 젊은이들은 이태원이 아닌 신촌과 홍대 거리에서 부대찌개를 먹으며, 꿀꿀이죽의 가난이 아닌 군대 간 남자친구를 그린다. 동대문의 닭한마리 골목은 일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음식을 찾아온 일본 관광객들로 비좁다. 을지로 인쇄노동자들이 구멍가게에서 맥주에 곁들여 먹던 ‘대충 안주’ 골뱅이무침은 이제 회식을 즐기는 넥타이부대가 찾는 맥줏집 전문 안주가 되었다. 골목에 한 집만 있어도 냄새 난다며 원성을 듣던 홍어가, 이제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중년 탤런트도 오고 동대문에서 옷 공장 하는 젊은 사장이 꽃 같은 여직원들과 회식하러 오는 대우받는 음식이 되었다. 달가운 변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청진옥은 통금 시절의 전성기와 밤샘 영업의 경쟁을 다 이겨 냈으나 재개발에 밀려 거대한 빌딩의 한 구석을 간신히 차지하고 있다. 노인들의 별식이자 인근 월급쟁이들의 든든한 한 끼를 해결해 주던 이문설렁탕은 10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2층 목조건물을 버리고 견지동 뒷골목으로 쫓겨 이전했다. 왕십리 곱창 골목은 모두 헐리어 이제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곱창구이를 파는 포장마차는 단속반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날품팔이 노동자부터, 인천으로 안양으로 막차를 놓친 사람들의 푸념을 받아 주던 영등포의 감자탕 골목은 이 책의 취재가 끝나자 재개발로 사라졌다. 청일집에서 빈대떡은 여전히 먹을 수 있지만, 옛 정취는 식당이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찾아야 한다. 두 저자는 서울의 삶을 기억하는 골목들이 사라지는 것 역시 아프게 기록하고 있다. ■ 서로 다른 시선으로 풀어낸 서울과 서울음식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은 음식 기행작가 정은숙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공저이다. 음식 기행작가 정은숙은 서울음식을 만들어 파는 이들과 이 음식을 먹고 즐기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사람 냄새를 담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음식의 유래와 그 음식을 파는 식당이 한 지역에 모여 있게 된 배경을 인문학적 통찰과 함께 제공한다. 같은 대상을 취재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글을 풀어내 함께 엮은 이 책은 생생한 현장감과 사유의 재미를 함께 느끼게 한다.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은 그저 ‘수도’라는 건조한 호명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서울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일리?를 제공하는 책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