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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제1부 역사의 이론과 방법 근대과학으로서의 여가 발전에 관한 네 개의 장 1. 18세기 이후의 역사학의 진전 2. 역사 인식의 정신적인 과정 3. 역사의 이념 4. 역사학, 그 현대적 위상과 삶을 위한 가치 역사 개념의 정의 19세기 중엽 이후 역사의 형태 변화 제2부 문화와 문화사란 무엇이가 역사 개념의 미적 요소 르네상스의 문제 문화사의 과제 [해제] 하위징아와 문화 및 문화사의 길 출전 찾아보기 |
Johan Huizi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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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의 대가, 요한 하위징아 - 그는 왜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론을 펼쳤을까
우리에게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로 널리 알려진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함께 사학사상(史學史上) '문화사의 대가'로 손꼽히는 역사학자이다. 하위징아와 부르크하르트는 그들의 저작에서 드러나듯이 주제의 선택이나 서술 방법, 역사, 문화관에서도 유사점이 많다. 그런데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나 문화에 관한 이론적 규명이나 사학사적 논의를 거의 외면한 반면, 하위징아는 강연이나 학술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역사와 문화, 역사학과 문화사를 둘러싼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밝혔다. 이번 책에서도 시사하듯이 역사와 문화를 둘러싼 이론적 규명은 다른 역사가들(이론사학의 연구자를 제외하고)의 경우와 달리, 하위징아에게 하나의 소명(召命)과도 같은 과제로 여겨졌다. 왜 그랬을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지만, 하위징아는 특정한 용어나 개념으로 시대구분을 일삼고 인간의 삶처럼 복잡 미묘하고 불확실한 역사의 세계를 교과서적으로 정의하고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경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상상력에 따라서 이미지를 환기하는 미적 방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위징아는 1941년에 쓴 「19세기 중엽 이후 역사의 형태 변화」(본문 117~35쪽)라는 글에서 전통적 역사학의 종말과 새로운 역사학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 배경으로 그는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타락과 특히 날로 증대되는 경제의 우위를 지적했다. 그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은 그에게 역사 세계에서의 '형태의 상실'로 나타났다. 하위징아에게 역사는 무엇보다도 '형태'(form)로서, 바로 보편적 정신 창조의 표출이며 상징인 '형태'로 부각되고 인식되었다. 그가 미적 요소를 역사의 본질로 중요시하고 역사를 이미지로, 서사시적ㆍ극적 이야기로 관조한 입장도 형태로서의 역사의 본질과 깊이 관련된다. 반 에이크의 그림에 감동하여 『중세의 가을』을 묘사하게 된 사실도 그로부터 연유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위징아에 따르면 고대나 중세와 달리 근대 이후의 역사는 형태 상실로 특징지어진다. 그 예로서 그는 프랑스 혁명과 달리 소비에트 혁명에서의 극적인 요소의 결핍을 지적한다. 특히 형태 상실 내지 변위(變位)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전환기에는 개별적 요소가, 즉 뛰어난 인물이 역사의 한복판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데 비해 경제적 요인이 우세한 시대에는 집단적 요소가, 즉 대중이 역사의 무대에서 큰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극중 인물의 개개인의 형태"를 볼 수 없게 되고 "집단의식과 리얼리즘"에 파묻힌다. 하위징아에게서 아름다움과 이미지, 이야기의 상실은 바로 역사??문화의 일대 위기인 것이다. 경제적 요인이 우세한 시대, 즉 역사적 세계의 수량화는 역사를 특정한 개념, 일정한 이데올로기로써 개괄하고 재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로부터 이야기와 그림, 상상력을 빼앗는 행위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구체적 '인간'이 도외시된 정치사, 경제사 위주의 역사서술의 위험성 경고 하지만 이러한 하위징아의 역사관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하위징아는 몇몇 뛰어난 인물이 주도하는 역사를 높이 평가했다(그렇다고 영웅주의 사관을 펼친 것은 아니다). 더불어 그는 "역사학은 모든 교양인이 공유하는 역사적 문화에 근거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문화란 바로 교양인의 문화를 뜻했다. 이때 "교양"이란 엘리트 계층이 전통적으로 누린 고대 그리스??로마풍의 후마니타스에 근거한 고전적 교양-문화였다. 즉 그에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인민주권'에 눈을 뜬 '대중'의 역사적 등장을 도외시한 것일까. 아마도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엘리트와 대중의 구별이 확연했던 시대가 한참 지난 요즈음 '교양'은 더 이상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민 대다수가 속한 중산층까지도 교양을 추구하게 된 오늘날을 보면 이런 점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위징아의 문화사론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하위징아가 전체의 역사로서의 문화와 문화사를 강조하면서도 역사에서 '정치사의 우위'를 결코 이론(異論)이 없음을 다짐했다는 데 있다. 즉 그가 역사 내지 역사서술에서 두려워한 것은 오늘날의 정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로서의 정치의 범람과 횡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