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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수긍 귀를 꽃이라 부르는 저녁 민달팽이 집 더듬거리다 앞일 그림자놀이 산길 꽃자리 블랙박스 관심을 보이다 사이 비꽃 식전 산책 하지 밥 가을 물안역 네 이름 하나를 보면 탁란 귀꽃1 제2부 시인 그리운 비트 그믐에 산내에서 이명 십리사탕 다리 새 라플레시아 옛일 귀꽃2 밥 이야기 어떤 만남 생시에 유품 문명의 문맹 알섬 우화 갯비나리 국 대도시 오감도 제3부 노루벌 이름 강릉 잠녜 물질 불쑥 굴피 월동 겨울의 액면 메리 크리스마스 새벽달 우명리 늦봄 유월 부적 회오리 승객 가을소리 고향집 잔상 간이역 산내 차고지 귀꽃3 저자 발문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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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하 시인이 세상을 향해 열어 놓은 ‘귀꽃’은 뭇 생명을 향한 경외라 해도 좋을 것이다. 김현정 문학평론가가 표현하듯 “온갖 현란한 시각적 형상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남의 말에 오랫동안 귀 기울일 줄 아는 넉넉한 몸가짐을 통해 경청하는 힘”의 가치를 드러낸다.
자본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 시대에도 소통과 상생, 배려와 나눔의 살이를 몸으로 체득한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가진 지혜로움이야말로 얼마나 빛나는 ‘시’인지 시인은 주목한다. “바다에서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이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백 사람이 하는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다던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영 사는 아흔아홉은 어떵 살코’(그렇게 일하면 이렇게 사는 나머지 아흔아홉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요).”(저자 발문 「시(詩)에 관한 열 개의 단상」 중) 위 대목에서 보듯 시인은 두루 보살피고 두루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존재들에 귀를 기울여 “시장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보여 준다. 들숨과 날숨 사이 무자맥질에 숨넘어갈 듯 까무룩 몸서리치는 순간만으로 하루 다섯 시간 일 년 열 달 꼬박 숨비소리 내쉬며 성산포 바당에서 오십 년 물질했는데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혼잣소리 흥얼거리며 자식들 낳아 길렀는데 스킨스쿠버 장비 사용하면 백 사람이 하는 일을 혼자 할 수 있다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요, 기자가 묻는 말에 영 사는 아흔아홉은 어떵 살코 - 「잠녜 물질」 전문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제 길 가도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이웃을 밀치거나 밟지 않는다 천수만에 사는 어떤 이는 귀신같이 새소리를 낸다지만 새들은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는다 빈 나뭇가지 고요히 밟는 새는 맨발이다 사람들은 신발 벗어야 하는 곳을 성지라 이르면서 태어나 딛는 곳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지 못한다 성지 순례하다가 폭탄이라는 말에 놀라 좁아터진 다리에서 떠밀고 넘어지다 티그리스 강으로 입적한 사람들 산더미처럼 쌓인 신발들 사이 새의 맨발 아득하다 - 「새」 전문 “사람들은 신발 벗어야 하는 곳을 성지라 이르면서 태어나 딛는 곳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지 못한다.” 반면 새들은 어떠한가. 새들은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는다”, 그저 “빈 나뭇가지 고요히 밟”을 뿐이다. 무엇하나 걸치지 않은 “맨발”로 오롯이. 이처럼 시인 권덕하가 보여 주는 세계는 우리가 익히 보아 온 세상이지만, 새로운 창 하나를 더 낸 것처럼 섬세한 시선과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말의 고갱이가 지닌 힘을 구체화”해내어 시 읽는 즐거움을 가장 정통적인 방식으로 구현해 낸다. 두계역에 내리자 비바람 몰아쳤어요 비닐우산은 마음먹고 뒤집어지려 하고 빗물에 찢긴 부대종이 사이로 갈치 맨살이 드러났어요 이거 뭐 중앙시장서 산 갈치 두 마리도 가리지 못할 우산 들고 그래도 입속엔 가득 그리움이 살고 있으니까 철길 건너갔지요 아껴 먹으며 십 리를 걷고 또 아껴 먹으며 십 리를 걷고 눈도 따라 십 리는 들어갔지만 깨물면 자책했을 단단한 맛 지키며 혀끝으로 살살 녹여 먹는 힘으로 갔지요 어디다 맡길 수도 없는 동생 달래며 기억에 젖고 젖어 질척질척한 먼 길 외갓집까지 뭔 힘으로 걸어갔겠어요 - 「십리사탕」 전문 세상의 모든 길은 식당으로 돌아온다 일 마치고 우리는 함께 말없이 밥 먹는다 밥을 남기지 않고 먹는 사람은 반찬 투정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밥이 곧 하늘이니까 하늘에 어찌 투정하며 하늘을 어찌 남길 수 있으랴 - 「밥 이야기」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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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
콘크리트 계단 갈라진 틈에서 환하게 웃던 씀바귀꽃이여 인간 친목계에서 탈퇴하고 싶었을 때 내 어둠 와락 껴안은 숲의 서늘한 침묵이여 비 오는 밤 먹구름 위에서도 빛나다 빗방울 타고 내려와 그대 눈에서 글썽이는 별빛이여 다시 서럽게 밀물 드는 촛불 화엄 바다여 뜻을 새겨듣고 환히 핀 수많은 낯꽃들이여 2020년 6월 권덕하 모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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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귀’를 ‘꽃’이라 부르고 시집 이름으로 삼았다. 마음속으로 ‘귀꽃아’라고 가만히 부르면 귀꽃이 새겨진 돌탑처럼 격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비법을 쓸 때 온몸에 생동하는 힘과 차분한 활기를 주목하고 시인은 귀꽃의 실존을 시로 나누어 표현한다. 온갖 현란한 시각적 형상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또한 시인은 남의 말에 오랫동안 귀 기울일 줄 아는 넉넉한 몸가짐을 통해 경청하는 힘의 사회적 가치를 드러낸다.
‘마음 모서리 품고’, ‘몸 그늘에 물드는 꽃’은 사람들의 소원과 속 울음소리를 고이 들으며 깊이 공감하고, 다 ‘잠들어도 깨어서 머리맡 지키’는 꽃은 사연 많은 삶의 애환에 밤새 ‘뒤척인다.’ ‘부끄러울 때 가장 먼저’ 붉어지고, ‘기가 막히면 가장 먼저’ 울지만, 우리 ‘몸에서 가장 늦게 지는’ 귀꽃의 생애를 통해 시인은 이 땅의 소외된 현실과 애통한 역사적 상흔을 어루만진다. 이 시집에 실린 시를 읽을 때마다 절차탁마하는 시인의 태도를 느끼게 되는 것은 시 한 편 한 편이 정성을 다한 결과이기 때문이리라. 시집을 마주할 때마다 ‘먼 길 다녀와 벗어놓은 양말 한 켤레’처럼, ‘눕지 못하고 서서 잠든 말’로 살아가는 시인을 만난다. 귀꽃으로 새겨들은 뭇 존재의 표현과 참뜻이 다른 이들의 가슴에 고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詩作에 매진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 김현정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