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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정호승 묵향 가득한 자연의 글씨
서문·강병인 붓이 울고 글씨가 운다 한들 꽃 지는 저녁 /상처는 스승이다 /수선화에게 /별들은 따뜻하다 /봄길 / 결빙 /새벽편지 /풍경 달다 /하늘의 그물 /술 한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선암사 /여행 /이슬의 꿈 /봄비 /어느 소나무의 말씀 /벗에게 부탁함 /설해목 /허허바다 /어린 낙타 /폐지廢紙 /부치지 않은 편지 /굴비에게 /겨울강에서 /햇살에게 /강물 /첫눈 /달팽이 /라면 한 그릇 /별 /또 기다리는 편지 /가을폭포 /삶 /못 /밥 먹는 법 정호승 산문 ―시와 시인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鄭浩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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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노보다 상처 때문에 시를 쓴다. 상처보다 그 상처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시를 쓴다. 기쁨보다 슬픔 때문에, 햇빛보다는 그늘 때문에 시를 쓴다. 상처 없는 사람은 결코 먼 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 길을 떠난 사람에겐 그 상처가 오히려 힘이 된다. 나는 지금껏 그 상처와 고통의 힘으로 시의 길을 걸어왔다. 세상에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할 길이 있다. 나에게 그것은 시의 길이다.
-나는 아직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 한때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시가 무엇인지 좀 알고 쓰면 좋겠다는 열망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른다는 것은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지금 모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다. 만일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영원히 알 수 없지만) 지금쯤 나는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앎을 실천해야 한다면, 내가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 누구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인가. -시의 배경은 침묵이다. 시는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시에 있어서는 침묵의 가치가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내 시가 짧아진다. 인생이 짧은데 어떻게 시가 길어질 수 있으랴. 말 없는 말이 더 중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시는 말 없는 말이다. 언어 없는 언어다. ---「시와 시인에 대한 몇 가지 생각」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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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인은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캘리그래피를 대중화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해온 작가이다. 한글의 창제원리를 작품 철학으로 삼아 한글 글꼴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알려왔으며, 집요하게 소리 문자의 영역을 넘어 뜻 문자로서의 가치를 글씨에 담아내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의 글씨가 단순한 흘림글씨나 과도한 디자인과 상업성에 천착하는 캘리그래피와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글의 제자원리에서 드러나는 천인지(天人地)와 합자, 순환의 원리이다. 하늘(초성)과 땅(종성), 사람(중성)의 세 요소가 합하여 문자를 이루는 원리에서 한글의 입체성과 예술성을 도출해 내며, 모음의 변화를 통해 기운의 생동과 자연의 변화, 인간의 삶과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봄’이라는 글자에서 꽃의 생장이 그려지고, ‘바람’이라는 글자에서 불어오는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강병인의 글씨 도구는 붓이다. 모필의 탄력을 이용해 소리가 없어도 음률(音律)이 와닿고, 빛깔이 없어도 현란한 색채감을 느끼게 한다. 시가 가지는 고유한 미적 요소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 최적의 도구라 할 수 있다. 강병인의 글씨는 ‘소리 문자’ 한글에 ‘뜻 문자’의 기능을 부여해 자연의 미세한 변화와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여기에 붓이 가지는 미적 기능을 더해 시의 또 다른 감흥과 도저한 문자향(文字香)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시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 시어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 활자로는 전달되거나 표상되지 않는 이야기들 획 하나하나에 스며들고 입체적으로 일어나 또 다른 시어가 되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저 옛날 왕희지가 난정서를 썼듯이. 추사를 따르는 이들이 인왕산 아래 송석원에 모여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렸듯이. ―강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