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내 꿈 은 늘 선생님이었다. 더 큰 꿈을 꿔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 비행 참가자, 이소연 과학자를 동경하며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에 ‘항공우주연 구원’이라고 적었던 그때에도 내 마음은 여전히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친구도 알고, 부모님도 알고, 나와 친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나는 친구들에 게 내가 아는 것을 설명하는 일을 좋아했고 잘했다. 고등 학교 3학년, 대학 원서를 써야 할 때, 공부를 아무리 잘하 더라도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아 섣불리 원서를 쓰지 못하던 친구들을 보며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잘하기도 했으니까.
--- pp.46-47
고기를 잠깐 담갔다 뺀 설렁탕처럼 밍밍하기만 했던 교 생실습 시간이 어느덧 다 지나가고 마지막 날이 되었다.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물바다가 된다던 그 교생 마지막 날, 난 아무렇지 않게 교실에 들어 갔다. 아이들과 수업 시간 말고는 친분을 쌓기 어려웠기 때문에 역시 아이들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루종일 각 교무실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알려주신 선생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른 반 수업 시간에 들어 가 마지막 인사를 한 후, 드디어 마지막의 마지막 우리 반 종례시간이 되었다. 이미 마지막 이별 파티가 시작되어 시 끌벅적한 인기짱 교생 선생님 반을 애써 무시하며 1학년 3반의 문을 열었는데….
교탁 위에 올려진 케이크와 롤링페이퍼, 서툰 솜씨로 잔뜩 꾸민 칠판, 아쉬움에 가득 찬 아이들의 표정을 보자 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말았다. 삐 뚤빼뚤한 글씨로 눌러쓴 롤링페이퍼에는 놀랍게도 그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들이 적혀 있었다. 아무도 내 가 하는 말에 관심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모두 기억 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한 말, 내가 한 행동, 내가 지은 표정까지. 아이들이 자신의 진심을 누군가에게 표현하기 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짧았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 달았을 때 바로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80퍼센트만 주었던 것이 오히려 아이들 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
지금까지 임용고시라는 나무를 바라보기만 하고 직접 올라보지도 않은 주제에 오르지 못할 나무라 단정 지으며 마음을 단념했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그래서 인생에 한 번뿐인 교생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아이들과 친 해질 수 있는 기회들을 스스로 놓쳤으며, 즐겁다고 느끼는 내 진심을 애써 무시하며 재밌어도 그렇지 않은 척 자신을 속여 왔다.
이제야 솔직하게 말해본다. 나는 아이들이 너무 좋았 고, 수업을 하는 내 모습이 좋았고, 학교가 너무 좋았다.
아무래도 나는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 pp.57-58
여느 날처럼 빵집 알바를 마치고 독서실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셨다. 음 식을 포장하러 오신 것 같았는데,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내가 생물을 가장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선생님 때문이었다. 늘 재밌게, 이해하기 쉽게 수업해주시던, 내 가 존경하던 선생님임을 인지한 짧은 순간에 인사를 드릴 까 말까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다가 말았다가 했다. 하지 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공부도 잘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던 그때 그 학생이 20 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혼자 식당에 앉아 밥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이라면 생물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나를 기특해하실 게 분명했지 만, 그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시집가서 사
는 게 바빠 엉망이 된 집과 자기 모습을 친정엄마에게 들 키고 싶지 않은 딸의 마음이 이럴까? 다시 만나 뵙게 된다 면, 반드시 선후배 교사로서 인사드리고 싶었다.
--- pp.89-90
대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임고생 신분이 되면서 취 미생활을 접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보통 고시생이라고 하 면 1분 1초가 아까워 밥 먹으면서도 공부한다고 보는 인 식이 있다. 하루 20시간 공부하기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나 역시 고시생답게 최대한 공부만 하자고 결심하고 임고 생 초반기를 보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불안정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가 자꾸 떠오르며 부정적인 생각이 나의 머리에 들어찼다.
급기야 이런 걱정들 때문에 밤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 거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어 잠을 잘 이루지 못 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증상이 너무 심해 가족들 몰래 병 원에 가서 심전도 검사를 받기도 했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고 결국 나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후 다시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마음이 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에게 행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 pp.97-98
하루 공부하고 하루 스터디에 나가는 일정이 빠듯했지만, 앉아서 전공책만 들여다보는 것보다 칠판 앞에 서는 것이 훨씬 행복했다. 같은 꿈을 꾸는 스터디원 모두가 최 선을 다해 참여하니 어느새 나도 당연히 2차 시험을 보는 것처럼 몰입했다. 나의 수업실연이 계획한 대로 잘되고 스 터디원들의 피드백이 긍정적인 날은, 당장 내일이라도 2 차 시험을 봐도 문제없을 것처럼 자신감이 넘쳐나곤 했다.
가끔은 일타강사라도 된 양 몰입한 나머지 수업실연 스 터디가 끝나고 현실 자각 타임이 와서 민망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1차 시험을 준비할 때보다 2차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내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지금 노력하고 있다는 걸 확연히 느끼게 해주었다. 진짜 수업인 것 같아 들뜨기도 했고 재미있었다. 그러다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는 더 충격이 크고 아팠다.
모두가 열심히 했던 4명의 스터디원 중 지은이는 공립 1차 합격을 했고, 1명은 공립엔 떨어졌지만 차순위로 지 원했던 사립 1차 합격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2명은 떨 어졌다. 잔인하고 힘든 순간이었지만, 곧 합격할 것만 같 이 두근거렸던 이 한 달의 시간 때문에 나는 또 다시 임용 고시에 도전했다.
--- pp.105-106
내가 처음 과학 전담 교사로 초등학교에서 일하게 되었 을 때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내가 기간제 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기간제 교사라고 다르게 대우하지 않고 오히려 초임이라고 더 챙겨주었다.
하지만 극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선생님들은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는 엄연히 다른 부류이며, 처우가 다른 건 당 연하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대놓고 차별받는 일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의 본색을 쉽게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문 제가 되는 건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 학교의 막내였다. 나와 동갑인 선생님이 두세 명 더 있었다. 첫 교직원 회의를 하기 위해 시청각실에 모 든 선생님들이 모였을 때 그 해 처음으로 부임하신 교감 선생님의 환영회가 열렸다. 학교의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 선생님들이 모여 며칠간 노래 연습을 했다는데, 나는 그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무대가 아니 라 좌석에 앉아 있는 선생님 중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 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날, 그때 느꼈던 감정이 소외감이라는 것을 꽤 뒤늦게 알게 되었다. 첫 회식 자리에서 교장 선생님이 막 내 선생님들을 언급하면서 내 이름을 빼먹었을 때도 ‘깜 빡하셨나 보다.’ 하고 넘어갔고, 교감 선생님이 우리 학교 막내 선생님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며 칭찬하며 내 이름을 빼먹었을 때도 ‘내가 담임을 맡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보 다.’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작 은 상처들이 쌓이면서 상처들의 부피는 어느새 괴물처럼 커다랗게 부풀어났고 나는 그 괴물의 이름도 모른 채 점점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 pp.146-148
“2학기도 함께 하고 싶었는데, 휴직하신 선생님께서 갑 자기 다시 복직하고 싶으시다고 연락이 왔어요. 말을 갑자 기 바꾸니까 저도 재차 전화해서 확인했는데, 본인도 상황 이 어쩔 수 없다고 하네요. 미안해요, 선생님. ”
마스크로 반쯤 가려졌음에도 교감 선생님의 미안한 표 정이 보이는 듯했다. 임용고시 준비하고 있는지 물으시면 서 이번에 꼭 붙을 것 같다며 솔직함보다는 미안함으로 가 득 찬 응원을 해주셨다. 교감 선생님의 잘못이 아님에도 거듭 사과하고 앞길을 응원해주시는 따뜻한 마음에 나 또 한 정말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교무실을 나서고 보니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2학기 계약 연장 제안을 받았을 때와 다르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묘하게 멍한 상태로 교무실에서 묵묵히 업무를 보았다. 퇴근 시간이 되어 학교를 나서고 나서야 깨달았다. 교감 선생님과의 10분간의 대면을 기억 저편에 묻어 두고 떠올 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는 것을. 그리고 교문을 나서자 힘이 풀리며 눈물 터져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마스 크 속으로 눈물이 고였다. 서러웠다.
결국 내가 기간제 교사라 생긴 일인데, 나를 탓하기 싫 어 미워할 사람을 찾았다. 육아 휴직 연장하기로 했으면서 말을 바꾼 선생님. 그 선생님을 타깃으로 삼아 마음속으로 실컷 욕했다. ‘일머리가 없어서 동료 선생님들께 미움이나 받아라.’ 저주를 퍼부으며 형편없는 사람이길 바랐다가도, 우리 반 아이들의 담임이 될 선생님이니 그래도 마음은 따 뜻한 사람이었으면 싶었다.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혹시 나 나중에 교직 생활에 마주칠 일이 생기면 그때 힘들었다 고 귀엽게 툴툴대보려고 한다.
다시 나는 또 아이들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한 번 만 아파도 될 일을 2번 당한 기분이었다. 반년이나 남았던 아이들과의 시간이 한 달로 줄었다. 앞으로 1학년이 등교 하는 주는 2번이다. 2주 동안 아이들에게 반년의 사랑을 눌러 담아 전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 pp.25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