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남성으로 살아왔던 계절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예감했다. 금이 한번 가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 p.16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운명이란 끊임없이 실패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평생 거듭”해야만 하는 실패 속에 있어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4
우리는 서로에게 ‘집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바로 집사람.
--- p.66
일요일 저녁을 먹고 거실 소파에서 앉아 바느질을 할 참이면, 너무 평화로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지경이 되고 만다. 이 반복의 파토스, 한 땀 또 한 땀의 에로스. 산모 팬티에, 배냇저고리에 아이의 이름을 바늘로 적고 나니 입에 바늘구멍이 났는지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 p.85
젖이 도는 기분은 어떤가요. 젖이 차는 느낌은 어떤가요. 정말 핑핑 하고 도는 느낌이 있나요.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 느낌의 세계에 초대받고 싶습니다.
--- p.84
매일매일 미역국을 끓이다 보니 어느새 나는 미역국 장인이 될 기세다. 미역국 끓는 소리. 들깨미역국, 홍합미역국, 쇠고기미역국, 북어미역국, 꽃게미역국, 닭고기미역국. 분명 나는 미역국 장인이 될 태세를 완벽히 갖추었다.
--- p.110
나도 이렇게 아버지의 품에 안겨 긴 새벽을 소낙소낙 건넌 적 있겠지. 나도 이렇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침 모양으로 가랑가랑 잠든 적 있겠지. 나도 이렇게 품을 키워가며 아버지가 되어가는 거겠지?
--- p.117
집밥을 매일같이 차려낸 어머니를 요즘 자주 떠올린다. 나는 어머니의 수고만으로 차려지는 집밥을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 고 마음먹었다. 어머니를 겪고 있는 탓이다.
--- p.121
반복되는 집안 살림과 하루 세끼 밥상 차림은 굉장한 체력을 필요로 했다. 허리가 나갈 것 같고, 손목이 쑤셨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열을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100일 쯤 익히고 나니 본격적으로 집사람,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 p.124
품에서 젖이 도는 것처럼 가슴이 따뜻하다. 사랑한다, 행복하다는 말을 가장 나중에 쓰고야 마는 나 같은 사람이 요즘은 나도 모르게 사랑해, 행복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품의 세계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 p.158
돌봄이 “사회생활의 필수 원리”로 받아들여져 “돌봄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기획”하기 시작할 때, 돌봄은 ‘돌아보다’, ‘보다’, ‘돌아버리다’를 포함한 천 가지 지층을 가진 두꺼운 낱말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낱말을 끝끝내 아끼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 p.163쪽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돌아본 그 자리에 아가의 비릿한 똥냄새가 있다. 아기의 침과 음식물이 얼룩져 있는 옷가지가 있다. 코고는 소리와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가 있다. 젖 맛을 풍기는 아내의 브래지어가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더 빠는 걸레가 있다. 내 사랑하는 집사람들이 있다.
--- p.179
분홍색 티셔츠를 하나 사서 자주 입고 다닌다. 자주색 원피스를 자주 입고 다닌다. 아이에게도 젠더 규범에 맞추어 옷을 입히지 않는다. 빨간색 베레모를 씌워주고, 모로코에서 선물받은 원피스를 입힌다. 누군가에게 놀림받으면, 남의 외모평가 하는 거 아냐! 라고 대답하라고 슬쩍 일러준다.
--- p.226
남자니까, 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기로 한다. 남자답게, 라는 말은 지워버리기로 한다. 남자라 해야 하는 일과 여자라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준다.
--- p.226
집안일은 비트다. 반복되고, 동일한 시간에 거의 정확하게 해내야 한다. 이것이 내 삶에 음악성을 부여하는 근간이 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가 아침밥을 차리고, 빨래를 갠다. 7시에 아침밥을 먹이고 8시까지 설거지, 청소, 걸레질, 정리/정돈을 끝낸다.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집을 두드리며 하루의 비트를 만든다.
--- p.228쪽
아기가 나오니 정말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보다는, 마음을 다해서 아이와 아내를 돌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가능하면 육아휴직을 써. 1년 동안 쓰는 게 어려우면 최소한 100일이라도 써야 해. 아이는 물론 아내에게도 100일 동안은 전폭적인(!) 돌봄이 필요하더라. 딱 100일 만이라도! 나는 그 100일 동안 정말 대단한 경험을 했지. 고민 너무 많이 하지 말자.
--- p.241쪽
차상위계층 신청하러 주민센터에 갔다. 배우자는 시각장애인, 나는 실업자, 아이 한 명. 이렇게 쓰고 나니까 조금, 우울해졌다. 국가는 나를 기분 상하게 했다. 서류를 쓰라고 해서 쓰기 시작했다. 자동차 없음. 부동산 없음. 유산 없음. 생각보다 없는 게 많았다. 없는 게 많은 나에게 국가는 1년에 8만 원씩 문화활동비를 주겠다고 했다. 정부미를 할인해서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통신비, 전기세를 할인해주겠다고 했다. 사회보장 서비스를 먼저 이용하게 해준다고 했다.
--- p.247
저는 애인의 젖 앞에서는 언제나 두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젖을 무는 느낌, 젖이 나가는 느낌, 젖이 차는 느낌을 저는 늘 궁금했지만 언제나 간접적으로, 비유적으로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두 번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서의 안간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p.281
내가 실존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 지긋지긋한 가부장(남성, 국가, 자본) 세계에서 하나의 반항 행위가 되는 ‘시민과 시인으로서의 시시한 일상’을 떠올려본다.
--- p.303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대상을 먼저 창조하듯, 우리가 사랑할 세계를, 우리가 사랑할 공동체를, 우리가 사랑할 사랑이라는 관념을 재창안해나갈 것이다. 사유하는 사랑은 분명, 무모하고 감히, 아름다울 것이다.
--- p.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