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슬릭을 만나러 갈 때, 나는 두려웠다. 시헤남의 자격지심이었다. 나의 행실이 충분히 조신해 보일지, 행여나 맨스플레인을 하지는 않을지,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내 주변에는 비건 페미가 주류라서 스스로 검열하는 일이 익숙했다. 하지만 슬릭은 차원이 달랐다. 인터뷰 전날에도 나는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 앞에서 혁명적인 말을 빠르게 내뱉는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전율을 느끼는 한편 무서웠다. 나한테도 내일 저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인터뷰하러 갔다가 혼나고 오는 건 아닐까?”
--- 「프롤로그 ― 전범선의 말」 중에서
“내가 틀렸다. 인간이 나대야 한다. 비건들이 더 나다녀야 한다. 지구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려면, 일단 그 살림을 하는 주체가 살아야 한다. 삶 없이는 살림도 없다. 21 세기 인간은 타살보다 자살이 많다. 비인간 동물은 축산/어업의 학살 기계로 소멸하지만 인간 동물은 사회적 폭력과 소외로 소진된다. 동물을 나누고, 옮기고, 가두는 죽임의 메커니즘이 인간 공동체 역시 파괴한다. 우리는 가족과 분리되어 도시에서 외롭고, 괴롭게 살아간다. ‘닭장’ 같은 빌딩에서 옆 칸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잠든다. 비건 운동의 시작은 비건 해방이다. 내가 살아야 남을 살리고, 내가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슬릭은 그것을 ‘나나 잘해야 한다’고 표현한다. ‘너나 잘해’라고 외치기 전에 나부터 잘해야 한다.”
--- 「프롤로그 ― 전범선의 말」 중에서
“2022 년 비거니즘을 고민하는 우리는 불타오른다. 사랑과 분노로 불타오른다. 덕분에 변화의 물결이 일 인다. 그러나 그만큼 나의 걱정도 커진다. 타오르는 우리가 타버리지 않았으면. 살리는 우리가 계속 살았으면. 아니, 보란 듯이 아주 잘 살았으면. ‘몸짓들’은 그런 마음을 담은 사랑과 연대의 춤이다. 등을 맞대고 경계 너머를 살피는 우리 모두의 몸짓이 거대한 물결을 일으키기를 절실히 바란다.”
--- 「프롤로그 ― 전범선의 말」 중에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2020 년에 한 방송 프로그램 〈굿 걸〉에서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나의 실제 성격을 알게 된 다른 출연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식어와 나 사이에 얼마나 괴리가 깊은지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이다. 물론 나 스스로 앞에 나서야 할 때에는 주저없이 나서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이렇게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앉아 을 쓰는 것이 훨씬 편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페미니스트가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을 것이기에 '페미니스트'하면 떠오르는 운동권이나 과격한 언사를 가진 사람의 이미지는 확연한 오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건이다”
--- 「에필로그 ― 슬릭의 말」 중에서
“페미니즘이건 비거니즘이건 나에게서 무언가를 아무런 경쟁 없이 빼앗아가는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경쟁 없이 어떤 것을 공유하거나 양보하거나 연대하는 것은 일종의 손해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비거니즘이 조롱을 당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나의 손해에 대한 방어적 태도로서 보이는 반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사회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자리 잡혀있을까?”
--- 「에필로그 ― 슬릭의 말」 중에서
“비거니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몇 곡을 만들어 발표했지만 비거니즘이 내 삶에 들어온 이상 내 음악에도 비거니즘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비단 페미니즘, 비거니즘 자아가 들어가지 않은 나의 노래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그리고 연대일 것이다. 나는 능력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경쟁은 처음부터 불공평하고, 불공평한 경쟁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경쟁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회, 그래서 불행한 사회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게 등을 맞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연대와 사랑일 것이다.”
--- 「에필로그 ― 슬릭의 말」 중에서
“전범선: 주변 사람들한테 슬릭 인터뷰한다고 했더니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아니냐고 하던데.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슬릭: 지옥은 어떤 곳이냐면요… ‘착한 여자는 죽어서 천국을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전범선: “어디든”이 좋은 의미인가요?
슬릭: 그렇죠. Everywhere.
전범선: 그럼 이미 지옥에서 온 비건으로도 활동하고 있나요?
슬릭: 쎄요. 비건이 페미니스트만큼 아직 가시화가 덜 되어서인지 몰라도, 지옥에서 온 비건이라고 하는 말은...”
--- 「지옥에서 온 비건입니다」 중에서
“전범선: 페미니즘의 물결이 비거니즘의 물결로 넘쳐흘러 오고 있는 듯한데, 그 과정을 어떻게 보시나요? 슬릭: 지금은 이런 입장이에요. 페미니즘은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왜곡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놀림당하고 있고 조롱당하고 있다. 비거니즘은 놀림당하고 조롱당하지도 못하고 있다.”
--- 「지옥에서 온 비건입니다」 중에서
“전범선: 저는 사실 힙합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좋아하는 힙합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폭력적인 가사가 많고. 가난하게 시작해서 돈 존나 많아졌다, 내가 짱이지, 하는 80 년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성공 신화.
슬릭: 그게 어떻게 보면 힙합의 여러 면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저는 그냥 음악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힙합이라는 음악 위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 장르의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전범선: 우리가 힙합을 리듬이라 말하더라도, 한국 문화상에서 힙합이 자리 잡은 지형이 있잖아요. 저는 슬릭의 작업이 힙합 신에서 쏟아지는 것들을 정면 돌파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슬릭: 어떻게 보면 힙합 신 안에서 있었던 시간이 저를 더 빨리 페미니스트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 「페미니즘 안 할 거면 너네 다 나쁜 래퍼들이야」 중에서
“슬릭: 저에게는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이 소수자 감수성으로 묶 어요. 결국에는 페미니즘, 에이지즘, 디스에이블리즘, 퀴어 인권, 동물권이 그 사회의 소수자 감수성과 연결되는 거잖아요. 누군가가 사회적 소수자라는 것이 서로 약속이 된다면, 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에 살고 싶어요.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그거야말로 차별이고 권력 차이니까요.”
---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중에서
“전범선: 저는 기후위기라는, 문명의 존속 자체가 걸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슬릭이 말한 감수성이 필수적이라고 느껴져요. 다양한 소수자가 정치적으로 연대해야만 윗세대가 만든 사회구조를 체제 결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질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현대 문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이 문명이 지옥으로 가지 않을 혜안이 있나요?
슬릭: 연대? 연대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요. 전범선: 왜죠? 어깨동무를 하고 있거나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요?
슬릭: 서로 등을 맞대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게, 결국엔 내가 볼 수 없는 시야를 내 뒷사람에게 맡긴다는 의미잖아요. 전범선: 어쩌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셨어요?
슬릭: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요? 모인 사람들의 안쪽을 바라보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모인 경계의 바깥을 바라봐야 모인 의미가 있고, 그러려면 서로 등을 맞대야 하고. 등을 맞대려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겠죠.”
--- 「연대란 서로 등을 맞대는 모양이에요」 중에서
“슬릭: 내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를 겁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과오를 최소화하고 옳은 말을 듣고 수용하고. 사실 나이가 들면서 10 대 시절보다 설득당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워지잖아요. 배우려는 마음을 닫지 않는 게 중요하겠죠. 계속 계속 옳은 게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의심하는 게 나나 잘하는 길 같아요.
전범선: 너나 잘해가 아니라 나나 잘해.”
--- 「연대란 서로 등을 맞대는 모양이에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