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게 밀초입니다. 2시간용입니다만,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자정쯤에는 끝날 거니까. 항상 그랬어.”
“성냥은 갖고 계십니까?”
“그렇지, 갖고 왔어.”
“그러시면 촛불을 켜고 끄실 때, 부디 불단속에 유념해주십시오.”
“알아, 하도 많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밤길에 발밑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사지 님의 염원이 녹나무에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p.9
덤불숲을 빠져나가면 문득 시야가 툭 트이고 그 앞쪽에 거대한 괴물이 나타난다.
정체는 녹나무다. 지름이 5미터는 되겠다 싶은 거목으로, 높이도 20미터는 넘을 것이다. 굵직굵직한 나뭇가지 여러 줄기가 구불구불 물결치며 위쪽으로 뻗어나간 모습은 큰 뱀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압도되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땅바닥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뿌리줄기도 굵고 복잡하게 불룩불룩 이어졌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발밑을 조심하면서 레이토는 나무 기둥 주위를 왼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 p.12
“협상이 성립된 뒤에 도요이 사장이 말했어.” 이와모토가 입을 열었다. “결함 있는 기계는 아무리 수리해도 또 고장이 난다, 그 녀석도 마찬가지여서 어차피 결함품, 언젠가 훨씬 더 나쁜 짓을 저질러서 교도소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레이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부디, 라고 변호사는 뒤를 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예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해.”
레이토는 이와모토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데요?”
“그에 대한 답이 그 방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이와모토는 레이토가 들고 있는 메모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다음부터는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분명한 자기 의사에 따라 답을 내는 게 좋아. 동전 던지기 따위에 기대지 말고.” 안경 너머 이와모토의 눈에는 냉철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 pp.28~29
“그간의 경력을 들어봤는데, 고등학교 졸업 뒤에 대학에는 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가지 않은 게 아니라 못 간 거예요. 그럴 돈도 없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갈 수 있었을 테지만, 좋아요, 그건 됐습니다. 장래의 꿈은 무엇이지요?”
“꿈?”
“전망이라도 좋아요. 뭐가 되고 싶다든가, 어떤 식으로 살고 싶다든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요?”
“전망이라…….” 레이토는 치후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목 뒤를 긁었다. “딱히 없는데요. 어떤 식이든 상관없으니까 아무튼 살아갈 수만 있으면 된다는 느낌이랄까.”
치후네는 후우 숨을 내쉬고,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더욱더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쪽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나만 할 수 있는 일? 그게 뭔데요?”
그러자 치후네는 중요한 선고를 할 테니 한 마디도 놓치지 말라는 듯이 등을 곧추세우고 가슴을 들먹이며 심호흡을 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쪽이 해야 할 일……. 그건 녹나무 파수꾼입니다.”
--- pp.38~39
그런 전설이 언제쯤 생겼는지는 알지 못한다, 라고 치후네는 말했다. 월향신사의 녹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윽고 이루어진다, 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지역 사람들만의 구전(口傳)이었지만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영험한 파워스폿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별 볼거리도 없는 변두리 시골인데도 휴일이면 찾아오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는 얘기였다.
--- p.45
레이토는 망설였다. 이런 한밤중에 아버지를 미행해온 것을 보면 뭔가 긴한 사정이 있는 것이리라. 아무래도 사지의 기념을 방해할 생각은 없고 뭘 하는지 살짝 들여다보려는 것뿐인 모양이다. 그런 정도라면 못 본 척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얼핏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사지에게 들키면 일이 커진다. 파수꾼의 역할이 뭐냐, 라고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다. 그걸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치후네에게 말이 건너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 문제다.
그렇게 레이토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흠흠흐응 흐흠 흐응…….” 억양을 붙인 기묘한 소리가 녹나무 안에서 들려왔다.
--- pp.53~54
“그렇다면 이건 얘기해줄 수 있지? 낮 시간에는 누구든 거기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근데 밤에는 예약제라서 다른 사람은 녹나무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 라고 했잖아. 그건 왜 그런 거야?”
“왜냐니, 그건…… 원래 규칙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어.”
유미는 답답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런 규칙이 생겼는지를 묻는 거잖아. 혹시 밤에 하는 게 효과가 있기 때문인가? 한밤중에 소원을 빌면 정말로 이루어져?” 몰아붙이듯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잘 모른다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채용된 지 얼마 안 됐어. 그냥 정식 기념은 한밤중에 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야.”
--- pp.68~69
“밤에 하는 기념, 일정한 기간에 예약이 몰리는 것 같더라고요. 대략 2주일 간격으로 바짝 몰려들고 그사이에는 거의 예약이 없었어요. 여기의 과거 기록들도 똑같이 그런 식이네요?”
“그렇죠. 왜 그런지 알겠어요?”
“혹시, 라고 짐작한 건 있어요.”
“들어볼까요?”
“혹시 달과 관계된 거 아닌가요? 어젯밤에 기념하러 온 사지 씨가 달을 올려다보면서 좋은 예감이 든다고 얘기했어요. 어젯밤은 보름달이었죠. 그래서 기록을 들춰봤더니 다달이 보름날 전후로 예약이 몰렸던데요. 사지 씨가 오시는 날도 보름날 밤이나 그 전후예요.”
“드디어 알아냈나요?” 치후네가 시험해보는 듯한 눈빛으로 레이토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보름날은 한 달에 한 번뿐입니다. 그런데 예약이 2주일 간격으로 몰린다고 방금 그쪽이 말했지요?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 얘기군요.”
“네, 맞아요. 그래서 또 한 번 예약이 몰리는 기간에는 어떤 달이 뜨는지 알아봤죠. 그랬더니 달이 없는 날, 즉 그믐날 밤이었어요. 어때요, 딱 맞혔죠?”
---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