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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256g | 120*205*20mm
ISBN13 9791190533409
ISBN10 119053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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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에서 진정한 말들이 오가기란 아주 어렵다. 그런 말들은 몹시 드물다. 어쩌면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마침내 우리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책의 페이지를 여는 순간 비로소 듣기 시작하는 건지도.
--- p.13

순수한 아름다움이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랑은 어떤 질료로 이루어지며, 사랑의 초자연성은 어떤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온다. 사랑은 관심에서 온다. 단순한 것에 대한 단순한 관심, 소박한 것에 대한 소박한 관심, 생명 일체에 대한 열렬한 관심.
--- p.28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녀는 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이 길을 따라 올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고정하고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미 여기 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규모의 대상들(숲, 집, 도로)이 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길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대번 숲과 집들과 도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인다. 측량 기사의 눈에는 먼 곳의 한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 우리의 희망에 상응하여 보기 마련이다.
--- p.43

한마디 말이 우리를 열에 들뜨게 한다. 이 한마디가 우리를 침상에 못 박는다. “삶을 바꾸라.” 이것이 목표다.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그러나 목표에 이르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병은 길의 부재며, 수단의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어떤 물음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다. 우리 자신이 물음이다. 새로운 삶. 그것을 우리는 바라지만, 옛 삶에 속한 우리의 의지는 아무 힘이 없다. 마치 왼손에 쥔 구슬을 내미는 아이가 교환의 대가로 오른손에 동전이 쥐어질 때까지 구슬을 놓지 않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새 삶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옛 삶을 잃고 싶지는 않다. 과도적인 순간, 이 빈손의 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 p.64

그림자로 가득한 몇 마디 말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 하찮은 사건이 우리를 생명에 내어 주기도, 우리를 거기서 떼어 놓기도 한다. 하찮은 사건이 만사를 결정한다.
--- p.67

한 가지를 제외시킬 수밖에 없는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건 무無에 불과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말뿐인 사랑, 사랑 없는 사랑이다.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구멍이 숭숭 난 부서지기 쉬운 감정이다.
--- p.71

성인은 미래로부터 오는 무언가를 향해 뱃머리처럼 얼굴을 돌리고 있다. 온갖 천사들이 날라 온 하느님의 꽃가루인 현재를 수분受粉하기 위해서다. 성인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살아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연결 짓는다.
--- p.95

진리는 대단해 보이는 우리의 부富나 우리의 정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진리는 자체 안에 빛을 내포하며, 그걸 말하는 사람 안에 있지 않다. 진리는 초라하고 연약한 삶에 근접해 있을 때만 위대하다. 나사렛의 한 바보가 이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 군중에 의해 왕으로 축성되지만 잠시 뒤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진리가 가장 위대한 순간은, 그것을 선포하는 이가 굴욕을 당할 때다.
--- p.114

그가 그녀보다 먼저 죽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은 처음 시작되는 순간, 첫 전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시간에 대한 오래된 관념을 파괴하니까. 전과 후의 구별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자들의 영원한 오늘이 지속될 뿐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뿐이다.
--- p.129

한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삶이 남몰래 지향하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이 대상에 대고 말한다.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렇다. 그가 자신을 위해 선택한 이 대상에 만사가 달려 있다. 그가 침묵 속에서 대면하는 이 대상에 모든 게 달려 있다. 이 대상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그는 사실과 증거를 축적했으며, 이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현재와 같은 삶의 모습에 이르렀다
--- p.134

사실 우린 그 무엇의 주인도 아니다. 우리가 창조해 낸 건 재빨리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우리의 작품이 우리를 모른다 하고, 우리 자식도 우리 자식이 아니다. 우리가 창조해 낸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사람에게 세월은 뱀의 껍질과 같아서, 햇빛 아래 한순간 반짝이다가 그에게서 떨어져 간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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