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안나 제거스의 망명기 문학과 그 미학적 기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신여대 연구 교수 및 서울대 인문학 연구원, 한남대 인문과학 연구소 선임 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아주대 특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카프카의 『변신』, 『소송』,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카를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전4권, 공역), 안나 제거스의 『통과비자』 등이 있다.
산에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 길은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옆으로 휘었으며, 성에서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K는 걷는 내내 이 길이 결국엔 성으로 접어들고야 말 거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으며, 그 기대 때문에 계속 걸었다. --- p.21
「당신은 누굽니까?」K가 물었다. 그녀는 말을 내던지듯 경멸적으로 대답했는데, 경멸의 대상이 K인지 자신의 대답인지 분명치 않았다. 「성에서 온 여자.」 --- p.25
한스는 자신이 K를 도우려 한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이제는 아버지에게 맞서기 위해 K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터라, 갑자기 나타나 어머니의 입에까지 오른 이 낯선 남자가 혹시 자기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탐지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본심을 감추고 있었기에 음험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 p.236
「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예요. 그중 어느 길로 가는 게 유행이면 대부분 그리로 가고, 다른 길이 유행이면 다들 그곳으로 몰리지요. 어떤 규칙에 따라 그렇게 유행이 바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 p.350
「여기는 겨울이 길어요. 아주 길고 단조롭죠. 그러나 저 아래 사는 우리는 불평하지 않아요. 겨울에 대해 우리는 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글쎄, 언젠가는 봄이 오고 여름도 올 테니 그 모든 게 나름의 때가 있는 법이겠죠. 그러나 지금, 내 기억 속에서는 봄과 여름이 어찌나 짧은지 이틀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이틀조차 아무리 화창한 날이더라도 간간이 눈이 내리곤 해요.」
--- p.499~500
카프카 소설 속의 성은 기존의 고딕 소설들에서와 달리 공허한 중심이다. 주인공 K는 외지인으로서 어떻게든 성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접촉을 시도해 보지만 끝내 성은 굳게 닫힌 채 그에게 입장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먼발치에서 어렴풋이 성의 겉모습만 바라볼 수 있을 뿐 그 입구 근처의 땅조차 밟아 보지 못한다. 이 소설의 본래 제목인 독일어 명사 [성Das Schloss]이 동사인 [닫다schließen]와 [닫힌geschlossen]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제목 자체에 함축된 뜻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말하자면 [나는 굳게 닫혀 있다], 다시 말해 [암호화되어 있다Ich bin verschlusslt], 그러니까 [어디 열 테면 열어 보라], [나를 열 수 있는 열쇠Schlussel], 즉 [암호Verschlusselung를 찾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 저녁, 성이 자리 잡은 언덕 아래 어느 마을에 K가 도착한다. 그는 마을 여관에 잠자리를 마련하는데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즉시 마을을 떠나라는 통보를 받는다. 이에 자신은 성의 베스트베스트 백작으로부터 토지 측량사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점으로 가득하고 성은 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K는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며 성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만 오히려 갈수록 더 복잡한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