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은 우리가 신화를 올바르게 해석하면 다시 내면의 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봤다. (...) 언제나 인간의 영혼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이 힘은 인간이 수천 년 세월을 헤쳐나올 수 있게 해준 종種의 지혜를 나타낸다. 그렇기에 신화는 과학이 찾아낸 것으로 대체된 적이 없을뿐더러 대체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우리가 잠자는 중에 진입하는 의식의 깊은 곳이 아니라 외부세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꿈과 신화 연구를 통해 이들 내면의 힘과 대화하면 우리는 좀 더 심오하고 지혜로운 내적 자아의 좀 더 넓은 지평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 있게 하는 사회는 인간 영혼의 가장 온전하고 풍요로운 층에서 양분을 얻을 것이다.
---「1. 신화가 과학을 만났을 때」중에서
기독교와 불교 설화의 상징적 이미지는 이처럼 형태상으로는 유사하나 관점은 서로 어긋난다. (...) 성경의 설화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수준에서 불복종과 그에 대한 벌을 다루며 흡사 부모 자식 관계에서처럼 의존과 두려움, 공손함과 헌신을 심어준다면, 불교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실 이 둘에 공통되는 이미지는 구약성경보다, 불교보다, 심지어 인도보다도 더 오래됐다. 뱀과 나무, 영생의 정원 이미지는 초기 설형문자 문헌과 고대 수메르의 원통 인장, 전 세계 원시부족 촌락의 미술과 의례에 이미 나타나기 때문이다었다.
---「2. 인류가 출현하다」중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의식ritual의 기능은 표면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인간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3. 잃어버린 의례를 찾아서」중에서
원시사회의 통과의례, 나아가 전 세계의 교육이 하는 최초의 기능은 청소년의 대응체계를 의존에서 자기 책임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은 결코 쉽지 않은 데다, 요즘처럼 부모로부터 자립하는 시기가 20대 중반, 심지어 후반까지 늦춰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워서 우리 사회의 실패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신경증 환자는 성인으로서 ‘제2의 탄생’이라는 중요한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3. 잃어버린 의례를 찾아서」중에서
다시 말해 그리스의 신은 인간의 편으로, 그의 공감과 신의信義는 인간의 것이었다. 반대로 유대인은 신의 편이다. 그리스 사람이라면 욥과 같은 말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하고 정직한” 욥은 “까닭 없이 그를 친” 뒤 폭풍우를 타고 나타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회개라고? 뭘 회개한다는 말인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작자 미상의 욥기가 쓰인 5세기에 활동했던 위대한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그 역시 “낚시로 리워야단(레비아단)을 끌어내고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듯 하며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는” 신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하게 만든다. “그는 괴물이요. (…) 나는 제우스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라.”
---「4. 동양과 서양의 분리」중에서
살아 있는 신화적 상징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사람을 각성시켜 삶의 에너지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 상징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요샛말로 ‘스위치를 켜주는데’, 스위치가 켜지면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개인이 삶에 참여하고 사회집단이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사회집단이 제공하는 상징이 효력을 잃고 다른 집단의 상징이 유효해지면, 개인은 집단에서 떨어져나가 소속감과 방향감각을 잃고 우리는 상징의 병리학이라 할 것에 직면하게 된다.
---「5. 동서양 종교는 어떻게 대립하는가」중에서
부주의로 인한 죄(경계하지 않고 깨어 있지 않은 죄)는 삶의 순간을 놓치는 죄다. 반면에 무위는 끊임없는 경계의 기술이다. 그러면 항상 깨어 있게 되는데, 삶은 의식의 표현이므로 그 상태에서는 저절로 삶을 살게 된다. 따로 가르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삶이 알아서 움직인다. 알아서 산다. 알아서 말하고 행동한다.
---「6. 동양 예술이 주는 영감」중에서
황홀경에 빠진 젊은이는 여전히 ‘나는 신이다. 저 코끼리는 신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키라는 소리를 듣고 ‘신이 신을 두려워해야 하나? 신이 신 앞에서 비켜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남자는 계속 비키라고 소리치고 코끼리는 다가오는데, 젊은이는 명상을 중단하지 않고 길에서 비키지도 않고 초월적인 통찰을 고집했다. 이윽고 진리의 순간이 찾아와 코끼리는 거대한 코로 이 미치광이를 감아 길옆으로 던져버렸다. 젊은이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고 땅에 쿵 떨어졌다. 다행히 멍은 심하게 들지 않았지만 너무 놀라 옷매무새를 바로잡지도 않고 스승에게 돌아갔다. 그는 사정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은 제가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구루는 “그래, 너는 신이다”라고 대답했다.
“만물이 신이라고 하셨죠.”
“그래, 만물이 신이다.”
“그럼 코끼리도 신이었습니까?”
“그래, 코끼리도 신이었다. 그런데 왜 너는 신이 코끼리 머리 위에서 비키라고 소리치는데 그 말을 듣지 않았느냐?”
---「7. ‘선禪’을 찾아서」중에서
내가 아는 사랑의 이미지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페르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사탄이 누구보다도 신을 사랑하고 신에게 충실한 존재로 그려진다. 신이 천사들을 창조했을 때 오로지 자신만을 경배하도록 명령했다는 이야기는 다들 알 것이다. 신은 이어서 인간을 만들고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가장 숭고한 작품에게 절하도록 명령했다. 우리는 루시퍼가 자존심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신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사랑한 나머지 다른 존재 앞에서 머리를 숙여 절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그 때문에 그는 지옥으로 떨어져서 자신이 사랑하는 신과 영원히 헤어져 지내는 벌을 받았다. (...) 페르시아의 시인들은 “사탄은 어떻게 버텼는가?” 하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그들이 찾아낸 대답은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라고 말한 신의 음성을 기억하면서’였다. 사랑의 환희와 번뇌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영적 고통의 이미지로서 참 절묘하지 않은가.
---「8. 사랑의 신화」중에서
대립을 초월해 세상을 긍정하는 그 같은 자세로 동양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것은 앞에서 이미 상세히 다룬 바 있는 무한한 자비를 베푸는 관세음보살이다. 평생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다가 세상을 영원히 떠난 붓다와 달리, 윤회의 소용돌이 안에 남기를 선택한 관세음보살은 살아서 영원한 해방을 아는 것의 신비를 상징한다. 그렇게 해서 가르치는 해방은 역설적이게도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자비에 의해 자발적으로 그 슬픔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8.. 사랑의 신화」중에서
서구의 2대 전쟁 신화는 《일리아드》와 구약성경이다. (...) 뿐만 아니라 두 전설의 기본적인 신화적 개념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양쪽 모두 세계는 지상과 신들이 존재하는 천상 두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상에서는 전쟁(‘우리’ 민족이 ‘상대’ 민족을 정복하는)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전쟁의 추이를 결정하는 것은 천상의 신이었다. 《일리아드》의 경우, 천상의 여러 신이 양 진영을 지지하며 다투었다. (...) 그런데 구약성경과 예루살렘의 신화 속 천상과 그곳에 거하는 신은 《일리아드》나 아테네와는 매우 다르다. 여러 신이 양 진영을 동시에 지지하는 게 아니라 유일신이 언제까지고 한쪽 편만을 든다. 그리고 그리스에서와 달리 적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된다.
---「9. 전쟁과 평화의 신화」중에서
신화의 영웅, 샤먼, 신비주의자, 조현병 환자의 내적 여행은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그들의 귀환 또는 증세의 완화는 ‘재생’으로 체험된다. 다시 말해 현실의 지평에 더는 구속되지 않는 ‘거듭난’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10. 내면으로 떠난 여행: 조현병의 연구」중에서
이전에 우리를 지상에 묶어놓았던 것은 모두 깨졌다. 우주의 중심은 이제 어디든 될 수 있다. 지구는 하나의 천체이되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답다. 이러한 생각에 담긴 경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문학은 이제 낡은 것이다.
---「11. 세상 바깥으로 떠난 여행: 달 위를 걷다」중에서
따라서 우리 신화는 이제 무한한 우주와 우주의 빛(안에 있는 동시에 바깥에 있는)의 신화여야 한다. 우리는 나방처럼 그에 매료되어 밖으로, 달과 그 너머로 날아가지만, 그러면서 또한 안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지구에서는 우리를 갈라놨던 모든 지평이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에 사랑을 주고 다른 곳에 공격성을 투사할 수 없다. 지구라는 이 우주선에는 이제 ‘다른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곳’과 ‘국외자’를 계속해서 가르치는 신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게 아니다. 이제 이 장을 열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12. 끝맺으며: 지평의 소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