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죽음에 대해서 죽은 사람은 말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은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산 자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겪는 사람 모두에게 얼마나 부당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인지 알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산 자들은 모른다.
아버지가 편안히 내쉰 마지막 숨조차도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괴롭다. 남 보기에 좋은 죽음은 있으나 내 아버지에게 좋은 죽음이었는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랴. 내 슬픔은 그 알 수 없음에서 비롯한다.
--- pp.26-27
귀는… 마지막까지 감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뒤에도 ‘혼의 귀’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들어주실 거예요. -텐도 아라타, 《애도하는 사람》
마지막 순간 당신께, 당신이 아버지이기 전에 얼마나 좋은 스승이었는지, 그런 당신을 내가 얼마나 존경했는지 말했어야 했다. 당신을 차가운 병원차에 실어 홀로 보내는 대신, 당신 곁에서 혼의 귀가 듣도록 말했어야 했다. 죽자마자 차디찬 냉동실로 보내지는 오늘의 시스템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대신, 당신이 평생 그랬듯 그것이 최선인지 물었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 p.34
처음에는 바위만큼 무거웠다가 점점 작아져서 돌이 되고, 결국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조약돌처럼 작아지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하지만 문득 생각 나 손을 넣어보면 만져지는 거야. 그래, 절대 사라지지 않아. -영화 〈래빗홀〉
별리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가슴 속에서 구르고 구르며 그저 숨 쉴 구멍을 내고 길들여질 뿐.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죽어 자신의 사리를 남긴다. 깊은 슬픔의 사리. 작고 해진 돌멩이. 단단한 슬픔의 뼈를.
--- p.52
모든 것은 학습을 요한다. 독서부터 죽음까지. -귀스타브 플로베르
죽음과 신경증은 상관이 없다고 믿었던 프로이트와 달리, 얄롬은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슬픔의 상당 부분은 죽음,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죽음이 자신의 문제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들에게 말만 한 게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모든 사람과 똑같이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하며 두려움을 넘어설 방법을 찾았다.
--- pp.78-79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육체가 푸른 잔디와 구름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물과 먼지에 불과하니까. -야누시 코르차크, 《게토 일기》
생의 무정함에서 생의 긍정을 보았던 시인에게 배운다.
마지막이 닥쳤을 때 부디 내가 이런 마음이면 좋겠다. 인위(人爲)의 평생을 살았으되 마지막에는 자연에 순명할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이른다.
너는 죽는다. 죽고 싶지 않아도 죽을 것이니 미리 죽지 마라. 오직 그때,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네 죽음을 받아들여라.
--- p.141
병원 침상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마치 공장 같다. 이런 대량생산에서는 개개의 죽음이 훌륭하게 처리될 수가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우리는 익명의 평준화된 대중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병원에서 환자가 되어 죽어간다. 그 사정은 너나없이 비슷해서, 나의 고유성 ─ 나만의 사정, 개성, 취향, 소망 등 ─ 은 사라지고 환자라는 보편성만 남는다. 의료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시스템이 작동하고 매뉴얼에 따른 행동 규칙이 요구되는 순간, 의사나 간호사의 개인적인 고민과 판단은 힘을 잃는다. 환자도 의료진도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움직이고, 삶과 죽음은 개성을 잃고 획일화된다. 그 결과 가는 이도 남는 이도 괴로움을 겪는다.
--- p.183
적절한 시기에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권리다. -세네카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환자를 돕되 해를 끼치지 말라”는 목표 아래 의술을 펼쳤다고 한다. 의학이 질병을 다 치료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고통 완화에 방점을 두었던 것인데, 그 바탕엔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 이유든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에 들어서면서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기독교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정했고, 고통은 죄의 대가이니 감수해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에선 신앙을 위해 순교하거나 죽음을 불사한 수행은 높이 평가하지만 자살이나 안락사는 부정하며, 고통은 신앙의 시험대와도 같아서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 pp.190-191
이젠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지는 신밖에 아무도 모릅니다. -소크라테스, 《변론》
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연구한 국내외 의료인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죽음을 공부하고 대화하는 것이 좋은 마지막을 위한 최선의 길이란 거다. 얼마나 다행인가. 공부와 대화는 값비싼 의료장비처럼 큰돈이 들거나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거리낌 없이 마지막을 직시하고 이야기하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고민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공연한 불안이나 걱정을 덜고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 p.224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야. 슬퍼하고 있잖아. 그거 아주 힘든 일이야.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애도와 위로는 힘들고, 잘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릴케는 “우리가 뭔가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나같이 용렬한 사람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상실과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헤어지고 슬퍼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슬픔을 나누는 일도 피할 수 없다. 당장은 도망친다 해도 결국은 겪을 일.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맞기 전에 미리 준비하면 충격은 줄고 결과는 더 나으리라.
--- pp.261-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