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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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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270g | 133*200*20mm
ISBN13 9788954676328
ISBN10 8954676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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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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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고리 속에는 각각 다른 모습의 리플리 부인이 한 명씩 들어 있었다. 회초리 같은 다리를 가진 수줍은 그녀, 뾰족한 하이힐로 미싱사의 뒤통수를 까는 그녀, 재단대에 누워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그녀, 구제 옷을 매장의 정품으로 둔갑시키는 그녀, 돈 많고 빨리 죽을 영감을 고르는 그녀…… 빙글빙글 돌아가던 둥근 고리의 중심이 팡팡 터지면서 그 빛이 사방에 흩뿌려질 때마다 장마철 흙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그녀가 잠깐잠깐 보였다. 흙탕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그녀.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거센 힘으로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망한 노래 바의 홀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리플리 부인」중에서

순수하고 청아하게 태어난 인간은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이 지닌 눈부신 빛덩어리를 힘껏 훼손하기만 하다가 결국 유해한 존재로 세상과 작별한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실수를 줄이는 길이라고 우희는 잘라 말했다.
---「마리나 나의 마리나」중에서

민자씨는 정말로 사업 신청서를 작성할 줄 몰랐던 걸까? 날 수정 마리나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희가 신청서를 작성하게끔 일을 꾸몄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채우지 못한 빈칸은 여전히 남는다. 내가 민자씨를 불신하기 때문에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자신을 믿어준다고 느낄 때 좋은 사람으로 바뀔 의지가 생기는 법인데.
---「마리나 나의 마리나」중에서

돈을 다룰 때는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이면 안 된다. 때로는 영민하게 때로는 둔감하게 다뤄야 돈에 먹히지 않는다. 돈이 없으면 항상 돈 생각을 하게 되지만 많으면 보이지 않는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때부터 위험하다. 돈의 기운을 누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돈의 수사학」중에서

모든 엄마에게 모성이 깃들지는 않는다는 것, 모성이 결여된 사람한테 그걸 요구하면 또다른 폭력이 된다는 것, 모성을 발현할 처지가 안 되는 엄마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이제는 은주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성이 결여된 사람이 하필이면 자기 엄마라는 사실이 괴롭고 지금도 견디기 힘들었다.
---「천사는 이렇게 탄생한다」중에서

누군가 꽃길을 걸으면 다른 누군가는 이슬에 젖은 밭둑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법칙이다. 한사코 꽃길을 고집한 엄마는 내내 달콤한 장미 향을 풍겼고 일찍부터 배추가 심긴 밭둑길을 걸었던 은주의 몸에서는 엷은 거름 내가 났다. 세상의 모든 천사는 ‘그렇게’ 탄생한다.
---「천사는 이렇게 탄생한다」중에서

숨을 고른 그녀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남자는 심장 속에 쟁여둔 얘기를 털어놓았다. 은밀한 이야기는 자기와 무관한 사람에게 별 얘기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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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기억에도 없었더라면 좋았을 공간, 그러나 기억해야 할 공간이 있다. 소설가 이현수의 고향인 충북 영동 노근리에 있는 쌍굴도 그런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그곳에는 남녀노소 사백 명에 이르는 무고하고 무해한 피난민들이 있었다. 미군들은 나흘 동안 그들에게 십이만 발의 총알을 무차별로 발사했고, 그 흔적은 굴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칠십 년이 지난 오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는 걸 일깨우듯 쌍굴 밑으로 맑은 물이 너무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얼마 전 어떤 인연으로 그곳을 찾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그녀였다. 그곳을 떠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도. 그녀는 그곳에서 온기로 떠돌며 그들을 끌어안고 가만가만 보듬고 있었다. 늙고 남루해진 인생마저 ‘애썼다, 위대하다’ 토닥여주고 높여주는 법을 터득한 그녀여서 다행이다 싶었다. 덕분에 나는 숙제를 면제받은 학생처럼 조금은 홀가분한 심정으로 그곳을 떠나올 수 있었다. 나이들수록 점점 더 금기어처럼 꺼려지는 ‘우리’라는 말을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녀와는 언제까지나 ‘우리’로 엮이고 싶어진다. 그녀가 부디 오래오래 그들을, 저마다의 생의 조건에서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를 끌어안아주었으면 좋겠다.
- 김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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