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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텍스트T-00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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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216쪽 | 370g | 145*220*20mm
ISBN13 9791191119947
ISBN10 1191119947
KC인증 kc마크 인증유형 : 적합성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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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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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떠나고 열흘쯤 흐른 것 같다. 학교에서 출석으로 인정해 주는 날은 고작해야 오 일. 그러니까 지금 난생처음 미인정 결석을 저지르고 있다. 사람은 다 다른데 천편일률적으로 죽은 이에 대한 애도 기간을 정해 놓고 그 기간을 넘어서면 미인정이라니. 규정이 너무 가혹하고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상관없다. 학교 따위에 미련 버린 지 오래다.
--- p.13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숨숲에 들렀다. 내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글은 시이기도 하고 일기이기도 하고 엄마한테 하는 넋두리 편지이기도 했다. 불안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마음속에 흰 구름과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 소리와 햇살을 넣으니 슬픔의 밀도도 차츰 낮아져 갔다. 시는 숨숲처럼 친구이자 삶의 일부가 되었다.
--- p.56

나는 휘청거렸고 주저앉을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가다가 달팽이를 발견했다. 바닥을 보지 않았다면 본의 아니게 귀한 생명을 앗을 뻔했다. 달팽이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혼자 느릿느릿 기어가다가 화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간은 상대적인 거다. 달팽이의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 거다. 그동안 쫓기듯 살아왔는데, 그게 버거워 숨 막히고 우울한 적 많은데, 달팽이한테 한 수 배운다. 수업료는 달팽이가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할 때까지 보디가드 하는 거. 시상이 물거품처럼 보글보글 피어오른다. 터져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계단에 앉아 얼른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 p.69

내 음성이 방 안에서만 맴돌게 낮은 소리로 낭송한다. 입 밖으로 나간 시는 다시 내 귀를 통해 가슴으로 들어온다. 가슴이라는 수면에 잔물결이 인다. 엄마가 했던 말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엄마는 홀로 떠나면서까지 홀로 남을 나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엄마, 아주 가는 거 아냐. 엄마는 항상 네 마음속에 있어. 잊지 마. 때론 식상한 말이 가슴을 쿵 때릴 때가 있다. 그땐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가면 가는 거지 아주 가지 않는다는 건 개소리라고 소리 지르고 싶을 걸 겨우 참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엄마는 내 마음속에도 있고, 저기 저 밤하늘에도 있으니까.
--- p.87

슬픔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소강상태도 없이 실시간 대기하다가 방심한 틈에 잠입해 내 존재 전체를 폭풍처럼 뒤흔든다. 슬픔은 소화도 잘 안 된다. 누군가는 소화를 잘 시키기 위해 여행이나 자기계발서 읽기나 긍정적인 사고를 권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일정한 형체가 없는 슬픔의 수렁은 생각보다 깊고, 항시 시꺼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두렵지만 차라리 슬픔에 심취해 엄마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p.138

나는 대충 메모를 저장하고 잼처 뛰어갔다. 은혜 칼국시는 다리에 서서 너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잠시 숨을 고르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가을걷이도 막바지인지 들판은 거의 텅 비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에 부유하던 너저분한 감정의 찌끼들을 비워 냈다. 계절이 지나고 저 들판은 다시 무언가로 채워지겠지. 내 마음속 비워진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질까. 아니 무엇으로 채울까.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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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의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에는 시를 읽고 쓰는 열일곱 살 소년 겸이 등장한다. 그는 어쩌다 시를 듣고 읽고 쓰게 되는데, 이 ‘어쩌다’가 어느새 ‘필연’이, 마침내 ‘일상’이 된다. 그에게 시는 더 이상 문제 풀기 위해 읽고 외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를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상대를 이해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시적 화자가 처한 입장은 나의 처지와 겹쳐지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주변에서 발견한 작은 존재를 시로 옮겨 적으면서 다친 마음을 한 땀 한 땀 깁기도 한다. 시는 이제 슬픔과 두려움을, 아픔과 그리움을 껴안고 내일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 책을 권하고 싶다.
-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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