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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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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272g | 130*200*20mm
ISBN13 9791191262117
ISBN10 119126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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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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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이 금지된 저 골짜기에 가면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난다고 했다. 나무도 하지 않아 무성한 숲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고 했다. 죽은 아이를 먹고 더 크게 자란 짐승들과 더 굵은 더덕이 있다고 했다. 언젠가 저 골짜기에 가 보리라. 팔과 다리에 더 힘이 오를 때, 저 골짜기에 서 있으리라. 큰 짐승들을 사냥하고 그 골짜기를 지배하리라. 근수는 타잔 같은 포즈를 취하고 골짜기에 서 있는 자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쿰쿰한 땀 냄새와 골짜기에 있을 아기 울음소리, 노루 오줌 냄새가 근수를 감싸며 커졌다. 내리쬐는 오후 세 시의 햇볕과 기다림과 기다림의 냄새.
---「그게 무엇이든」중에서

수화기를 던지고 베란다로 뛰어가 창을 열고 다시 리어왕에게 갔다. 맥을 짚어 보니 반응이 없다. 허리띠를 풀고 소방교육 때 배운 대로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바짝 마른 리어왕의 가슴에서 우둑우둑 소리가 났다. 갈비뼈가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입을 열고 인공호흡을 하려 입을 벌리자 목 깊숙이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올라왔다. 비극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엇. 겁이 났다.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북어처럼 입을 열고 있는 리어왕 옆에 앉아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연기를 너무 마셨다. 아, 씨발. 화분에 번개탄부터 껐어야 했나? 아, 씨발 이게 뭐야. 몸이 기울어졌다.
---「지하 생활자」중에서

이번 연구는 실패했어. 너도 그만 인정해.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 더 이상 신화도 종교도 그들에게 통하지 않아. 오히려 자기 식대로 이용만 해 먹고 있잖아. 먹고 싸고 차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실패한 생물이야. 이대로라면 지구는 백 년도 버티지 못해. 솔직히, 이 행성에서 가장 해로운 생명체가 인간이야. 투자한 물과 햇볕이 아까울 지경이라고. 빨리 할당량이나 채우고 이 쓰레기 같은 행성을 뜨자고. 어차피 멸망할 행성 따위야 회사에서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은 다음에 알아서 처리하겠지. 우리는 연구실에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그게 우리가 살길이야.
---「공원 조 씨」중에서

파이프를 타고 세상을 떠도는 사이 지상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바뀌었다. 바다에서는 배가 가라앉고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죽거나 자주 실종되었지만 계절은 계속 바뀌었다. 파이프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하나의 존재로 여겨졌다. 다른 여타의 존재들처럼 자신어치의 삶을 소모하고 소멸할 뿐, 내 삶에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시간 속에 있거나 시간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파이프 속은 그런 내 착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늘 컴컴했고 늘 평화로웠다. 나는 점점 더 파이프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점점 더 혼자가 되어 갔다.
---「기록자들」중에서

도동놈도 추석은 시야지! 시상에 쪼매난 도동놈 아인 놈 어데 있나! 늙은이의 음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목소리에서 카랑카랑한 힘이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리고 내가 들은 말을 잠시 의심했다. 그 말은 마치,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하던 예수의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돌팔매를 맞고 있던 창녀처럼 늙은 원주민을 바라보았다. 원주민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움찔 눈을 내렸다. 그래도, 한꺼분에 마이 따지 말고, 밭이랑 밟찌 말고, 고랑으로 살살 댕기미 쪼매씩 따다 무라. 서둘르지 말고!
---「원주민 초록」중에서

정신이 없어 말을 더듬는 사이 누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상할망이었다. 상할망이 끝분의 손을 잡자 그제야 눈물이 왈칵 나왔다. 할망, 어허어어…. 내 이럴 줄 알아서. 밤중 내내 삽작 밖이 소란스라방 내다봐신디, 굼부리로 올라가는 뒤꼭지가 딱 분이 너랑 닮아서라. 아이고, 이게 무신 일이냐. 정신 채리라게. 지금 정신 안 챙기면 너도 죽어, 알아들엄서? 상할망이 끝분의 뺨을 철썩 갈겼다. 끝분은 울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할망을 쳐다보았다. 빨갱이 마누라로 몰리믄 너도 죽은 거. 저 잡놈들이 살인귀가 씌엉 탐라 사람 모조리 빨갱이로 몰앙 죽이려는 건디, 정신 차령 내 말대로 해라. 그래야 산다, 내 말 알아들어 지커냐!
---「맹순이 바당」중에서

나는 가르치는 재능도 인내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학원을 나왔다. 아내는 가장으로서의 무능력을 탓하지도, 아비의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아내의 그런 태도가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불안하게 생각되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아내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 같았다. 내가 열 살 때 휴화산이었던 갈라파고스 제도의 화산이 서른이 넘은 지금도 휴화산인 것처럼, 폭발 따위는 내 대에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내도 견디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어차피 남녀가 같이 산다는 건 주어진 상황을 함께 견디는 연습 같은 것이었다.
---「아내가 죽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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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지 않다면 작가일 리가 없지만 임성용은 그중 특이하다. 책을 파는 조물주(「공원 조 씨」)라는 설정이 그렇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처연함과 그로데스크한 묘사도 그렇다. 긴 진술이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게 또 그렇다. 거기에 오밀조밀한 묘사까지 더해지고 날것의 비린내와 창작자로서의 노련함이 희한하게 섞이어 있으니 말이다.

소설집 『기록자들』은 폭넓은 세계를 담고 있다. 농촌 마을과 도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그게 무엇이든」은 전근대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그로테스크한 살인사건이고 「공원 조 씨」는 퇴락한 도시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일상 풍경을 SF적 기법으로 풀었다. 이혼한 가정의 처연함과 쓸쓸함을 내장국밥을 먹는 장면으로 그려낸 「아내가 죽었다」, 4 · 3사건을 겪은 제주 해녀의 삶을 담아낸 등단작 「맹순이 바당」. 전쟁 전의 시간부터 현재까지 농촌에서부터 도시 공간까지 아우르는 그의 소설은 야만적이고 비릿한 생명력과 폭력성, 복수와 인간의 애정을 두루 담고 있다. 이런 장점들이 장착되어 있다면 머잖아 ‘어떤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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