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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메별, 꽃과 별의 이름을 가진 아이

두메별, 꽃과 별의 이름을 가진 아이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88이동
리뷰 총점9.5 리뷰 33건 | 판매지수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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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7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42g | 140*205*14mm
ISBN13 9788954447478
ISBN10 8954447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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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요, 아재는 안 무섭습니까?”
나는 사탕을 왼쪽 볼에 물고는 물었다.
“무엇이?”
“양반한테 이리 구는 거.”
오름 아저씨는 박하사탕을 와득와득 깨물어 먹었다.
“무섭기는. 조선 양반이 뭐 일본 사무라이처럼 칼을 차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순사처럼?”
“그렇지. 그리고 곽 훈장은 이젠 양반도 아니야. 호적 팔았잖아. 양반 취급 해 주면 아이고 고맙구먼, 해야지. 뭐 저리 고개가 빳빳한지 모르겠어.”
“호적을 팔면 양반도 더 이상 양반이 아닌 겁니까?”
오름 아저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 양반 그거 그까짓 종이 한 장이다. 두메야, 너는 똑똑하니깐 잘 새겨들어라. 세상이 변할 거다. 양반이고 농민이고 천민이고 간에 앞으로는 돈 있는 놈이 최고가 될 거야.”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나는 헛소리라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오름 아저씨이기에 진짜 앞으로는 그런 세상이 될 것만 같았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백정에게 금지된 모든 것을 가진 오름 아저씨. 백정이 당하는 온갖 멸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아저씨.
--- p.21

대송 오빠와 오름 아저씨가 나누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나는 종이 읽기에 집중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우리의 취지이다, 까지 읽었다. 한 문장을 다 읽고 나서야 그림 속 깃발에 커다란 글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형평.”
깃발의 글씨는 단번에 읽혔다.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대송 오빠를 돌아봤다.
“오라버니! 형평운동을 하나?”
“응? 그치.”
“와 말을 안 했나! 이야, 그렇구나. 오라버니가 형평운동을……. 오라버니, 그럼 이제 여기두 강습소 생기나? 내도 보통학교 갈 수 있기 되나? 그기는, 그 형평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원래 뭐를 하던 사람들이고? 몇 살부터 들어가나? 가시나도 있나?”
“야, 니 숨넘어가겠다.”
얼굴이 뜨거웠다. 대송 오빠가 형평사 사람이라니. 진주는 형평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대송 오빠가 진주에서 예천까지 왔다는 것이 무엇이 바뀔 것이라는 신호처럼 여겨졌다. 내 몸 안에서 작은 불꽃이 마구 터지는 것만 같았다.
--- p.72

손에 큰 태극기를 든 사람들 몇몇이 앞장서서 외쳤고 그 뒤를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따랐다. 나와 오빠도 손을 마구 흔들며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인파에 떠밀려 장터를 벗어나는데 헌병이 달려왔다. 어머니는 나와 오빠를 끌어안고 쌓여 있는 가마니 뒤로 주저앉듯 숨었다. 나와 오빠의 손바닥에 그렸던 태극기를 침 묻힌 손끝으로 마구 문질러 지우는 어머니의 숨결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그 거친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이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샘님, 만세 불렀던 거 나라 구하려고 했던 거지요?”
“그렇단다.”
“근데 노촌 어른들이요. 백정이 양민이 되면 조선이 망한다고 하던데 참말입니까?”
춘앵은 살포시 웃었다.
“두메야, 조선은 이미 무너졌단다. 지금 이 나라는 대한제국이야. 완전히 다른 세상이란다. 그리고 백정은 이미 양민이지.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 그게 사실이란다. 나는 대한제국은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백정이든 여자든 모두가 국민으로서 행복한 나라. 그게 내 꿈이야.”
조선은 이미 무너졌다. 이곳은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이다. 춘앵의 말은 내게 신비한 주술 같았다. 춘앵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무언가를 와르르 무너뜨렸다가 다시 쌓아 올렸다
--- p.116

“놔라. 안 놓나, 이 가시나야!”
김돌섬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팔을 휘두르며 몸으로 나를 밀어냈다. 나는 집 마루 아래로 튕겨져 나갔다. 마루 아래 놓여 있던 맷돌이 내 가슴을 찧었다. 엄청난 아픔과 함께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두메야, 괜찮니?”
춘앵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아득히 멀게 들렸다.
“내 가죽신을 훔친 거 니들이 분명타.”
“아니어라, 진짜 아니라예.”
아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김돌섬이 아지와 막송이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다. 저 사람들이 백정촌 아이들을 해칠 것이다. 저들에게 백정은 사람이 아니다. 백정조차 소를 죽일 때에는 기도를 하고, 소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되짚어 보고, 소와 눈을 맞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백정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우리에게 해 온 차별조차 모른다. 우리의 눈을 보지 않는다.
--- p.160

“아부지!”
나는 한천의 강둑을 뛰어 이미 멀어진 아버지를 쫓아가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와 나는 안 되나! 아부지도 경성에 갔었지 않나. 아부지도, 아부지도 다른 세상을 꿈꿨던 거 아니가. 근데 와 나는 못 가게 하나!”
“치아라!”
아버지는 내 손을 뿌리쳤다.
“니가 뭘 아나! 오냐, 다른 세상? 오겠지. 올 것이라 안 믿으면 어찌 살겠나. 하지만 그 세상 오기까지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죽어 나갈지 누가 아나. 그리해서 온 세상에 우리 자리가 있을 것이라 누가 장담한다나. 오냐, 나도 갔었다. 그르나 내가 지금 어디 있나? 니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이. 실패해서 몸하고 마음만 다칠 거라 이거다.”
아버지의 말소리는 채찍이 되어 내 마음을 후려쳤다.
“와 실패할 거라 생각하나? 내는 실패 안 한다. 실패해도 또 도전하면 되지 않나.”
“양반도 실패했다. 사내아들도 실패하고. 그들도 다시 기올라 가지 못했다. 그것을 네가? 백정에, 가시나인 네가 뭘 어쩐단 말이냐. 못 한다. 경성 따위 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내는 할 거다! 하고 말 거다!”
아버지는 내 외침 따위 듣지 않겠다는 듯 뒤돌아서 멀어졌다. 빛은 백정촌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갔다. 나는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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