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글을 쓰면, 어느 순간, 글에 몰입한 이후부터, ‘나’가 사라진다는 놀라운 현상이다. 인류에게 빛이 되어주는 인물들의 보석처럼 빛나는 글들은 거의 틀림없이 ‘나’가 사라진 몰입 이후에 나왔다고 하니,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나’는 사라져야 할 거추장스러운 형식인지도 모르겠다. --- p.20
‘나’로부터 한발 떨어져 나와 그때의 ‘나’ 자신과 주변의 일들을 바라보면, 당시 경험에는 몇 가지 의미심장한 질문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근원적인 질문에 정확한 정답을 제시할 사람은 ‘내’ 근처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무엇이든 다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과학도 그 질문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그 근원적 질문을 따라 수많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삶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 ‘나는 꼭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이었다. --- p.24
꾸준히 글쓰기를 계속하자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하게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중심에 놓고 글을 쓰다 보니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었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글쓰기를 반복하자 글이 의미 있는 이야기로 맥락이 잡혀갔다. 그것을 소설 형식으로 다듬었다. 마침 한 중견 문예지에서 소설 문학 신인상 모집공고가 나왔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투고했다. 투고를 하고는 조금도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당선 통고를 받았다. 놀랍게도 ‘나’에게 당선이라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 p.41
후회와 걱정은 우리를 좁은 틀 속에 가둬둔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 해서 후회하는 일, 했었더라면 좋았을 일, 그리고 곧 해야 할 일, 조만간 해야 할 일, 앞으로 해야 할 일. 이런 것들에 사로잡혀서 다른 것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시야가 좁다. 좁아도 아주 좁아서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학교에 가고, 강의를 듣고,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온 것밖에 쓸거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글을 쓰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 행위를 적는 유치한 글이 되고 만다. --- p.59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요로우면서도 기이하게도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불안을 회피할 거리들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듯하다. 시도 때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고, 뉴스를 확인하고, 문자를 주고받고, 수다를 떨고, OTT에 몰두하고, 여행을 하고, 맛집을 순례하고,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스포츠에 열광하고, 애완동물을 키우고, SNS에 올리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안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 pp.71-72
누구나 행복의 조건으로 돈과 명성을 1순위 목록으로 올려놓는 데 크게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돈과 명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 같다. 명성은 돈을 부르고, 돈은 명성을 다시 만들고, 그래서 행복할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특히 돈에 대해 연구하는 경제학자들 중에는 돈과 명성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아담 스미스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경제를 쉽고도 재미있게 설명한 아담 스미스는 행복에는 꼭 돈과 명성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 pp.87-88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글쓰기는 ‘통찰洞察’의 불꽃이자 난관을 극복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통찰은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꿰뚫어 보는 곳이 밝은 세상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동굴洞窟 속이다. 동굴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통찰의 ‘통’이 동굴을 의미하는 한자어 ‘통洞’인 이유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보는 것察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역작은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면서 탄생했던 것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글을 연료로 통찰의 불꽃을 피운 것이다. --- p.107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공포, 충격이 엄청난 해방감과 함께 자유, 평화와 환희로 대체된다고 증언한다.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과학적 논리에 기반을 둔 학자들은 임사체험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아니타뿐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증언하는 임사체험을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하기도한다. 그러나 죽음도 그렇지만 임사체험은 특정한 사람만이 경험하는 일이 아니다. 일반인은 물론, 학자들, 특히 생명과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의학자, 과학자까지 누구나 겪는 일이고 겪을 수밖에 없다. --- pp.130-131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마음은 생각과 감정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먼저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언뜻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곧 감정이 따라붙는 듯하다. 만일 기분 나쁜 생각이 떠올랐다면 곧 기분 나쁜 감정이 훅 하고 가슴 위로 올라오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생각을 계속 붙들고 있으며 감정이 점점 증폭되고 둘은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한없이 커진다. 일단 생각에 감정이 붙어서 폭발하면 관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pp.148-149
에크하르트 톨레는 인류의 탐욕과 착취, 폭력, 파괴, 살육의 역사가 모두 에고가 지배해온 결과라고 말한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을 듣다 보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내’ 안에도 분명히 욕망과 폭력의 에고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크하르트 톨레는 다른 선각자들처럼 꼭 명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에고와의 동일시를 끊을 수 있도록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 역시 명상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면서도 명상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에고를 가만히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묵상’만으로도 가부좌명상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 p.165
외부에서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권위라는 허위의 것들은 모두 독재자 에고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옳고 바른 것이었다 해도 독재자 에고가 되면 지극히 위험하다. 우리가 무방비 상태에서 외부의 지시와 강요된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는 한, 독재자 에고는 계속해서 커진다.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독재자 에고는 끊임없이 검열하고 비판하며 우리를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 상태로 몰고 갈 것이다. 선각자들은 독재자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알아차림뿐이라고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알아차림이 본성을 지키는 경계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82
알아차림 글쓰기는 가능하면 주어와 서술어로, 다시 말해 명사(주어)와 동사(서술어)로 시작해야 도움이 된다. 물론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목적어를 넣어도 좋다. 그러면 감정으로부터, 특히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낮은 감정의 에너지장에 물들지 않게 된다.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로 글을 쓸 때 복잡한 생각을 정돈하고, 자신에게서 한발 떨어져서 스스로 객관화하고, 몰입할 수 있다. --- p.200
어떻게 하면 영감이 잘 떠오르게 할 수 있을까? 선각자들은 행복한 순간에 영감이 잘 떠오른다고 말한다. 선각자들이 말하는 행복한 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순간이다. 아잔 브라흐마 같은 선각자는 ‘이 세상에서 진정 행복한 순간은 오직 명상할 때밖에 없다’고 말하곤 한다. 명상은 곧 알아차림이니 알아차림 글쓰기 역시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만일 시간과 돈, 혹은 에고의 강박으로 압박받고 강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알아차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어서 죽겠는데 무슨 명상이고, 무슨 알아차림이냐고 에고는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에고를 바라보고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는’ 명상을 해야 한다. 굳이 선각자들의 말을 들지 않더라도, 집착과 영감은 서로 반비례한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는 머리에 새겨둘 만하다. --- pp.218-219
명상하는 글쓰기를 지속하다 보면 지금까지 나의 행세를 해온 에고가 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노상 에고를 따라다니는 마음 역시 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의 주인처럼 행동해온 마음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내가 마음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내가 에고가 아니며, 마음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물론 돈, 권력, 명성, 출세처럼 근사한 것은 아니겠지만, 실용적이고 유쾌한 변화들이 대단히 많다. 내가 경험한 변화 중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은 엄살과의 결별이다. --- pp.248-249
식사명상은 식사 전에 잠깐이라도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음식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들은 모두 생명을 가진 생명체였다는 사실을 되새겨본다. 잠깐이라도 감사의 마음에 미안한 감정도 올라온다. 이제 음식을 입에 넣고 음식 각각의 맛을 느끼면서 씹는다. 입속에서 음식물들이 움직이고 섞이면서 조화롭게 내주는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식탐으로 식사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식사를 하게 된다.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무조건 먹어치우지 않게 된다. 음식물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배가 불러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