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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거닐다

슬슬 거닐다

: 숨어 있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책길 34곳

박여진 글 / 백홍기 사진 | 마음의숲 | 2021년 10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8 리뷰 25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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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40쪽 | 448g | 135*190*20mm
ISBN13 9791162850930
ISBN10 11628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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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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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누군가 내게 우포늪에서 어떤 코스를 걷는 게 좋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생태관에서 출발해 대대제방과 사지포제방, 소목마을, 목포제방, 산밖벌을 지나 다시 생태관으로 회귀하는 9.7킬로미터가량의 코스를 추천했었다. 하지만 지금 누가 내게 다시 묻는다면, 천천히 걷다가 마음을 사로잡는 늪 앞에서 지도를 펼쳐 그 늪의 둘레를 오래도록 구석구석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 p.52, 「늪지대를 날아서」 중에서

나는 바다향기로를 걸으며 떠올렸다. 깜깜한 항구 아스팔트 위에 덩그러니 펼쳐져 있던 작고 낡은 텐트와 그 안에 납작하게 누워 생일을 축하하던 우리를. 모래 알갱이처럼 잔뜩 쪼그라들어 ‘싯가’를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라면 세 봉지로 삶의 허기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미미했던 우리를.
--- p.90, 「아스팔트 위에서 생일을」 중에서

“느그들도 참 좋고, 나도 참 좋고, 여 참 좋제?”

할머님의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처럼 번졌다. 가슴이 분홍색 매화처럼 환해졌다. 2월의 해가 소나무 사이로 옅게 출렁였고 새들이 쉬지 않고 지저귀고 있었다. 문득 먼 훗날 이 순간이, 어느 아름다운 노인이 ‘너희들도 좋고, 나도 좋고, 여기도 좋다’고 시처럼 읊조리던 2월이 우리의 화양연화로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0, 「구불구불 찬란한」 중에서

우린 조금 울컥했다. 서로에게 잊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슬펐다. 우리는 멈춰 서서 돌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모반듯하게 정리된 돌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시시한 농담과 특색 없는 식사를 한 오늘이 그냥 이렇게 저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오히려 별것 아닌 날들이 가파르게 요동치는 생의 그래프를 완만하게 이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평범한 날들이, 보통의 우정이, 시시한 농담들이 그토록 애틋하고 소중한 건지도 모른다.
--- p.148, 「숙성된 시절」 중에서

하지만 이제 보기 시작했으니 제주도의 반짝이는 바다와 푸른 마을, 검붉은 밭담을 지날 때마다 그날의 역사가 보일 것이다. 보일 때마다 기억하려 한다. 이 짧고 사소한 추모는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더 깊은 바다가, 더 오래된 마을이, 더 아픈 밭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를 읽게 될 것이다.
--- p.248, 「알아야 보이는 것들」 중에서

말을 참거나 소리를 없앤다고 침묵은 아니다. 발화되지 않은 언어들은 침묵보다는 말에 가까운 지대에 놓인다. 말들이 가득 고여 있는 시끄럽고 어수선한 지대. 내가 원하는 건 그 언어들마저 빈 고요의 공간이다. 말들이 시끄럽게 뒤엉키지 않고 그저 일생처럼 흘러가는 곳.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붙잡을 필요가 없는 곳. 그곳을 침묵이라 믿는다.
--- p.301, 「눈의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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