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의 작품들은 늘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다.
표절도, 패러디도, 재창조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서정이 흘러넘치는 불후의 명작,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러하다.
이 앤솔로지 작품들은 소나기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일상을 뒤집고 변신시키는 ‘소나기’를 이야기로 접근하고 있다.
또한 책은 여러 경계를 허물고 있다.
우선 필자들이 다양하다. 한국문단의 주요 작가들과 미등단 작가들의 공모작을 경계없이 실었다.
언어와 창작은 특정 집단의 소유가 아닌, 인간정신의 자연스런 발현이기에 글쓰기란 행위에 울타리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소나기가 내리는 지상에서 우리 모두가 잠시 유숙하고 가는 문학적 마음을 지표로 삼았다.
구효서의 「새벽 들국화 길」은 「소나기 그리고 소나기」 앤솔로지 작품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자인 ‘나’와 그 관심의 대상인 ‘계끔이’가 이사를 통해 헤어지는 것은 남자 두 사람이 참혹하게 죽는 비극에 잇대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계끔이’는 ‘그님자야, 나더 나더’라는 요령부득의 말밖에 하지 못한다.
윤대녕의 「후포, 지나가는 비」는, ‘스무 살이 되던 대학생 새내기 시절’에 화자가 만난 ‘그녀’의 이야기다. 그것이 단지 우연이었는지, 어떤 환영에 이끌렸던 것인지 되뇌어 보는 화자의 심사는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기울어 있기 십상이다.
박상우의 「꼬마 미야를 찾아서」는, 여섯 살 유년에 겪은 고통스러운 생이별 장면으로 시작한다. 옛 살던 곳을 찾아가 보지만, 동네는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과수원으로 변해 있다.
전성태의 「소나기 증후군」은, 화자가 40년 전 국어 시간에 읽었던 「소나기」를 기억하며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는 이야기다. 중학생 딸아이의 책을 빌려서 보다가 마주친 상황이다. 화자는 「소나기」를 처음 만나고 이를 흉내 낸 소설을 쓴 후 비극과 광기의 세계에 휩쓸렸다.
김종광의 「스쿠터 데이트」는, 그야말로 인생사의 온갖 험로를 다 지나온 노년의 추억이요 또 사랑에 관한 서사다. 이 소설의 화자는 ‘노옹(老翁)’이고 그의 상대역 노파는 ‘꿈에서 아내 다음으로 자주 만났던 바로 그 소녀’다.
김상혁의 「소나기가 필요해」는 원작의 모형을 이어받되 그 담화의 형성이 허구를 넘어 거짓으로 이루어지는, 매우 특별한 상황을 그렸다.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기훈’과 ‘강이’는 파주의 외진 동네에서 함께 자란 오랜 친구다. 기훈은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강이로부터 ‘소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만난 장소도 ‘한겨울 만우천’ 으로 적시(摘示)된다. 그 소미가 강이와 비를 맞고 놀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신은희의 「소나기, 2막」은, 원작의 발화 구도에 근거하지만 새로운 방향성을 가진 짧은 소설이다. 이 작품은 ‘소나기는 없다. 소리가 먼저였다’라는 사뭇 도전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연극은 1막에 이어 2막을 생략하고 바로 3막으로 넘어가는 형편인데, 원작의 아류가 아닌 재창조를 고뇌하는 연극 감독은 느닷없이 ‘푸른 소나기’라는 콘셉트를 요구한다. 「소나기」를 공연예술로 치환한 접근법은 새로우며, 글의 전개도 급박하고 전위적이다. 말미에 이르러 아주 오래전 1막의 주인공들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들이 소년인지 노인인지 알 길이 없다고 서술된다.
성혜령의 「소나기 데이터 센터」는, 화자인 ‘나’가 보안요원으로 일하는 M사의 하청 반도체 공장에서 야간에 일어난 일을 서술한다. 그곳의 클라우드 서비스 종료 날 여자가 유령처럼 나타난다. 적외선 카메라 앞에 여러 야생동물이 나타나지만, 여자는 유령의 형용이다. 제 2회 황순원문학촌소나기마을 제 2회 스마트소설 공모 대상작품이다.
김의경의 「나기」는,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여자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그것이 ‘소나기가 내린 날’이었다. 그녀의 손에 늘 ‘바밤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기에, 소설은 그녀를 그 상품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유품을 하나씩 들고 가고, 옆집 여자가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나기’를 데려간다.
한성규의 「지하철 안에 내리는 소나기」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제 1회 스마트소설 공모 대상작품이다.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에 두고 있다. 화자인 ‘나’는 새벽 3시까지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지하철 첫차를 기다린다. 승강장에 외부 공기를 주입하는 급기구, 차내의 불이 잠시 꺼지는 ‘마의 구간의 비밀’ 등 숨은 상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급기구에서 ‘쏴 하고’ 물이 쏟아진다. 마치 소나기처럼. 지하철에 있던 승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인생여정에서 갑자기 물벼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각각이다.?
주수자의 「달이 지고 새벽이 오고 소나기 내리다」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조부가 친일파였다는 루머는, 초인종 소리와 함께 소나기에 젖은 이장통지서로 현실이 되고, 어쩔 수 없이 빗속에 홀로 파묘를 진행하던 김두길은 외다리였던 조부시신의 두 정강이뼈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그 와중에 나타난 묘지기 사내의 엄청난 다리와 천둥을 방불케 하는 고함소리는 단숨에 김두길을 위축시키며 이때 작가의 풍자는 해학으로 넘어간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김두길조차 혼란스런 가운데 계속해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여러 방향으로 춤춘다. 저마다의 궤도에서 무한히 자유롭다. 하나의 진실만을 주장하는 우리의 피상적 시선을 해체하라는 듯이.
저자: 황순원 (1915~2000)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중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1년 『동광』에 「나의 꿈」「아들아 무서워 말라」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 『삼사문학』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소설도 함께 쓰기 시작했으며, 1940년 소설집 『늪』을 간행한 이후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아시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3·1문화상, 인촌상을 수상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에서 23년 6개월 동안 교수로 지내면서 많은 문인을 배출했으며, 2000년 8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소나기」 「학」 「별」 「목넘이마을의 개」 「독짓는 늙은이」」 등과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등이 있다. 함축성 있는 간결한 문체와 치밀한 구성으로 서정적이며 섬세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고, 인간 본연의 순수성과 그 소중함을 옹호했다. 일생에 걸친 창작 활동으로 시집 2권, 단편소설 100여편, 장편소설 7편과 산문집 1권을 남겼다.
비평가: 김종회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문학평론가. 경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6년간 경희대 교수로 재직했다. 『문학사상』 『문학수첩』 『21세기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문예지의 편집위원 및 주간을 맡았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비평문학회, 국제한인문학회, 박경리 토지학회, 조병화시인 기념사업회,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여러 협회 및 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책임편집: 주수자
2001년 『한국소설』로 등단, 소설집 『버펄로 폭설』 『붉은 의자』 『안개동산』 『빗소리몽환도』, 시집 『나비의 등에 업혀』 등이 있다. 희곡 「복제인간」 「공공공공」 등을 연극 무대에 올렸고, 과학에세이 『아! &어? 인문과 과학이 손을 잡다』, 소설집 『Night Picture of Rain Sound』 영국에서 2020년 출간되었다. 제1회 스마트소설 박인성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