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꾸하던 할아버지는 후유우- 하고 긴 한숨을 내리쉬시었습니다. “물리가 트진즉 이 도리를 알려니와, 이 책의 대읜즉슨 천지흰황 이 늑 자 속에 들어 있다 헤두 과언이 아닐 것이니라. 아울러 이 늑 자 속에 천지이치 또한 들어 있음은 물론이며. 연인즉, 배우구 익혀서 스사로 그 몸을 세울진저.” 그때부터 이 중생은 할아버지 앞에 두 무릎 꿇고 앉아 책을 읽기 비롯하였으니, 《천자문(千字文)》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였지요. 1951년 정월 초하룻날 차례(茶禮)를 저쑵고 난 제상 앞에서였습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중에서
언제나 배가 고팠습니다. 흙이라도 파먹고 싶고 돌멩이라도 깨물어 먹고 싶었으며 잠자리라도 잡아먹고 싶게 장 배가 고픈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잠자리를 잡아먹어 본 적도 있는데, 날개를 떼어 내고 짚불에 살짝 구워 낸 보리잠자리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어 여간 맛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정월 초하룻날과 가윗날 그리고 제삿날 밤 말고는 처음 먹어 보는 남의살이었던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6·25 바로 뒤 어린 넋을 못 견디게 했던 것은 배고픔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배고픔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리움이었습니다. 뒷동산 산소마당에 아그려쥐고 앉아 신작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붙여 세운 두 무릎을 가슴에 대고 가슴에 댄 두 무릎 사이에 턱을 올려놓은 채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러나 오시지 않았고, 허릿바처럼 길게 줄대어진 신작로 끝 산모롱이를 적셔 오는 것은 놀이었습니다. 놀을 밀어내며 발등을 적시는 것은 그리고 어둠이었습니다. 달은 없었습니다.
---「일월영측(日月盈?) 진수열장(辰宿列張)-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고르게 펼쳐져 있다」중에서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습니다. 고등공민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5·16이 일어나던 해였습니다. 찔레꽃머리였습니다. 산지기 집으로 피란을 갔다 온 다음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예비 검속으로 잡혀가셨을 때였습니다. 입학금이 없고 월사금이 헐하다는 언턱거리 한 가지로 들어가게 된 그 학교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서 세운 곳이었습니다. 중학과정을 배우기는 하지만 정식 중학교가 아니므로 졸업을 하더라도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붙어야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곳이었지요.
“이으쭤 볼 게 있넌듀.”
이 중생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있는 성경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판의 그날이 오면 악인을 멸하고 의인을 구하기 위해서 천사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고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을 때였습니다.
“저 거시긔 …… 운등치우(雲騰致雨)허구 노긜위상(露結爲霜)이라구 헸넌듀.”
“뭬야?”
“땅 위 짐이, 거시긔 수증긔가 하늘루 올러가서 이뤄진 게 구름이라구 헸넌듀.”
“그래서?”
“그란디 찬물이 증발헤서 이뤄진 수증긔 구름을 타구 네려오먼 츤사덜이 거시긔 걸리지 않을라나유? 고뿔.”
하는데, “뭬야?” 안경테를 밀어올리는 평안도 출신 목사 교장 선생님 손끝이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한 말 다시 한번 해보라우. 머이가 어드래?”
“운등치우헤야 노긜위상헌다구…….”
“머이가 어드래?”
“백수문(천자문)서 그렇긔 배웠넌디,”
하는데, “나오라우!”
교장 선생님 괌 소리가 교실을 흔들었고, 쭈빗거리며 걸어나간 이 중생 두 볼따구니에서 도리깨질 소리가 났습니다. 독성(瀆聖)에 대한 벌로 일주일간 뒷간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사흘인가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가출을 해 버렸던 것입니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 차를 ‘빠방틀어’ 타고 간 곳은 목포(木浦)였습니다.
땅 끝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 끝의 끝에 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곳에는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운등치우(雲騰致雨) 노결위상(露結爲霜)-구름이 올라 비가 되고, 이슬이 엉키어 서리가 된다」중에서
《백수문(白首文)》을 배우던 때로부터 어언 50여 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이 중생은 무릇 몇 권 책을 읽게 되었던가. 아마도 기천 권은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 하였습니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가득 차고도 넘칠 만한 부피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동양 전통적 독서관이니, 비록 기천 권 아니 기만 권 책을 읽었다고 한달지라도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한 오라기- 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같지 않게 책권이나 읽었다는 것을 감히 흰목 잦히자는 것이 아니올시다. 책이야말로 이 답답하고 힘겹기만 한 티끌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오직 하나 뗏목이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책이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책이 있어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아아, 책이 있음으로 해서 슬픔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만물만상(萬物萬象)을 읽을 수 있다고 옛사람은 말하였습니다. 책을 읽기는 쉽지만 자기 자신을 읽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뜻이고, 내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하여금 나를 보게 하여 마침내는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하여금 나를 읽게 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기껏 글자나 좇아가서 무엇하겠느냐는 채찍 말씀이기도 합니다.
---「시제문자(始制文字) 내복의상(乃服衣裳)-비로소 글자를 만들었고, 처음으로 윗옷과 치마를 입었다」중에서
어머니 누나와 함께 세 식구가 서울로 올라가던 1964년 찔레꽃머리였다. 열여덟 살 때였다. 큰절을 올리고 나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시었다.
“이롭지 뭇헌 책은 읽지를 말구, 쓸모 웂넌 글은 짓지를 말거라.”
서둘러 방을 나서는데 가느다랗게 떨리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발뒤꿈치를 따라오고 있었다.
“힘써 글을 읽어 금수(禽獸)가 되넌 것을 믠허거라.”
---「고침판 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