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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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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5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28쪽 | 700g | 153*224*24mm
ISBN13 9788971996676
ISBN10 8971996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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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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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우리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 강의의 모든 것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는 『강의』 출간 이후 10년 만에 출간되는 선생의 ‘강의록’이다. 이 책은 동양고전 말고도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선생의 다른 책에 실린 글들을 교재 삼아 평소에 이야기하신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과 세계 인식, 인간 성찰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2014년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다. 이 책의 부제를 ‘마지막 강의’로 한 이유이다. 선생의 강의실은 늘 따뜻하고 밝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다루는 내용이 한문 고전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문맥을 현재로 끌어내어 우리의 입장에서 읽기 때문이다. ‘공감’의 힘이다.

“우리의 교실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각성이면서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여행이기를 바랍니다. 비근대의 조직과 탈근대의 모색이기를 기대합니다. 변화와 창조의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감과 소통의 장(場) 신영복 선생의 강의실을 고스란히 책으로 옮겨놓았다. 팍팍한 삶 속에서 한 줄기 위로와 격려의 공간이 되리라 기대한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담론

책을 내면서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1 가장 먼 여행
2 사실과 진실
3 방랑하는 예술가
4 손때 묻은 그릇
5 똘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6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8 잠들지 않는 강물
9 양복과 재봉틀
10 이웃을 내 몸같이
11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며

중간 정리?대비와 관계의 조직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12 푸른 보리밭
13 사일이와 공일이
14 비극미
15 위악과 위선
16 관계와 인식
17 비와 우산
18 증오의 대상
19 글씨와 사람
20 우엘바와 바라나시
21 상품과 자본
22. 피라미드의 해체
23 떨리는 지남철
24 사람의 얼굴
25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

저자 소개 (1명)

YES24 리뷰 YES24 리뷰 보이기/감추기

왠지 이 책은 자주 꺼내볼 것 같습니다.
도서1팀 김도훈 (인문 담당 / eyefamily@yes24.com)

三人行, 必有我師焉(삼인행 필유아사언)

공자의 말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배울 것은 있다, 따라서 선한 것을 가려서 따르고 배우라는 뜻입니다. 통상 배울만한 점이 있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만, 다른 의미로도 읽힙니다. 배울 게 있는 사람이 아닌 배우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평생 혼자 살 수 없으니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테고, 따라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서 무엇을, 얼마나 배울 수 있는 지는 배우려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무엇이든 배울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낮추기 어렵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배우고자 했던 공자의 삶과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전하는 게 아닐까요?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신영복 선생은 좋은 스승입니다. 공자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배움의 자세를 가진 훌륭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20년 복역 기간을 자신의 ‘대학 생활’이라고 부른 이유는, 감옥에서 수많은 스승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집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그리는 노인 목수와의 만남은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는 계기가 됐고, 기존 복역자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자부심과 오기를 보여준 신참을 통해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덕분에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의 인식이 달라졌지요. 그에게 감옥이 ‘대학’일 수 있었던 건 그가 훌륭한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학벌이 낮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누구에게든 배우고자 했기에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인생의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멋진 학생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그의 마지막 강의 『담론』은 훌륭한 인생의 교재입니다.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고액을 주고 족집게 과외도 한다는데 20년 수형 생활을 통해 얻은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았으니, 가히 인생의 고액 참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학교 시험과 달리 인생은 같은 질문도 없고 정해진 답도 없기 때문에 족집게라 할 수는 없지만, 담고 있는 가르침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수능 족집게 과외와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가르침이 그득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25개의 강의가 담긴 책이 단돈 16,200원이라니, 고맙고 감사한 책입니다. 한 권 책을 읽는 것만으로 멋진 인생 공부가 시작됩니다.

발로 완성하는 공부

하지만 좋은 강의를 듣는 모두가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영복 선생이 표현대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고, 가슴에서 끝나지 않고 발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사고를 넘어 품성의 문제가 되고, 실천과 변화로 이어져야 진정한 공부가 된다는 것이지요. 『담론』을 읽고 나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독자 앞에 놓여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으로 한 공부를 발까지 잇는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훌륭한 가르침을 자기화 하는 작업도 필요하고요. 삶의 현장에서 자기만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때 비로소 변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될 때,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는 법. 머리·가슴·발로 공부하는 학생이 곧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스승이 됩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현장까지 이어지는 공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관계가 공부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니며,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것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신영복이라는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고, 읽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공부가 되는 책. 왠지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자주 꺼내볼 것 같습니다. 꺼내볼 때마다 마음은 한 뼘 더 자랄 겝니다.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담론
신영복의 강의실 위로와 격려, 공감과 소통의 장

매주 목요일 저녁 8시면 어김없이 강의실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이곳은 성공회대학의 한 강의실. 서울 한복판도 아니고 부천시에 인접한, 변방(邊方)의 조그만 대학 강의실이 수강생들로 북적인다. 수강생들 중에는 성공회대학의 학생들도 있지만, 나이 지긋한 청강생들이 제법 많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보험회사·은행·일반 회사 등에 다니는 직장인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든 이곳은 신영복 선생의 강의실이다.
선생은 오랜 강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 있다고 한다. 첫째, 교사와 학생은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며, 둘째, 설득하거나 주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며 매우 완고한 것이므로, 그 사람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강의는 정답이 없는 문제 중심이다.
선생의 강의실은 늘 웃음이 넘친다. 칠순을 넘긴 노학자가 가진 재치와 유머는 젊은 사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교재가 있지만 미리 읽어오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미리 읽어오라고 해봐야 읽어올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것. 둘째, 한 사람이 교재를 낭독하고 전체가 조용히 함께 듣는 교실의 풍경은 공감(共感) 공간의 절정(絶頂)이라는 것이다. 수강생 한 명이 교재를 낭독하는 동안 강의실은 교감의 에너지가 넘친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런 가슴 뭉클한 위로가 전해진다.
선생의 강의는 여럿이 함께 가는 여행과도 같다. 가을에 시작되어 늦가을을 관통하고 초겨울 눈이 내리는 날까지 진행된 긴 여정의 마지막 날이면, 선생은 수강생들 모두를 데리고 나목이 된 느티나무 아래로 간다. 그리고 각자 아름다운 별 하나를 가지 끝에 달아보라고 한다. 영원히 함께할 순 없지만, 앞으로 펼쳐질 수강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긴 항로에 북극성처럼 반짝여줄 별 하나를 마음에 달라는 의미가 아닐까.

선생은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그 이듬해인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2006년 정년퇴임 후에도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강의를 계속하였다. 거의 25년간 대학 강의를 한 셈이다.
이제 선생은 2014년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비정기적 특강을 제외한다면, 대학 강단에서 선생을 뵙기는 어려울 듯하다. 대신 선생은 강단에 서지 못하는 미안함을 이 책으로 대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성공회대학 강의를 녹취한 원고를 저본으로 한다. 선생의 강의는 총 3번에 걸쳐 녹취가 이루어졌다. 사전에 선생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고, 학생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녹취한 것이었다. 이후 녹취록을 받아본 선생은 자신의 강의가 중언부언하고 내용도 미흡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술회했지만, 선생이 직접 편집해서 만든 ‘강의 교재’와 강의를 위해 정리한 여러 권의 「강의노트」는 선생의 강의가 단 한 강좌도 허투루 진행된 적이 없음을 말해준다. 물 흐르듯 담담하게 펼쳐내는 ‘담론’ 속에는 선생의 고도의 절제와 강건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담론』은 선생의 「강의노트 2014-2」와 녹취록을 저본으로 한다.

동양고전에서 읽는 유연한 세계 인식의 틀

[강의] 이후 10년, 더욱 깊고 풍부해진 ‘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에 출간된 『강의』에 이어 신작 『담론』에서도 선생은 동양고전 독법(讀法)을 통해 ‘관계론’의 사유로 세계를 인식한다. 동양고전을 공부의 텍스트로 선택한 이유는 동양고전이 갖고 있는 풍부한 사상들이 세계 인식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동양고전에 담긴 사상들은 무엇보다 인간을 중심에 둔다. 여기서 인간 중심이란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동양 사상에서 인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기도 하다. 동양 사상이 갖고 있는 조화와 균형감, 그리고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은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유연한 틀이 된다.
선생은 고전을 현재의 맥락에서, 오늘날의 과제와 연결해서 읽는다. 물론 이러한 독법이 실증주의자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방법이겠지만, 선생의 생각은 다르다. 모든 고전은 과거와 현재가 넘나드는 곳이며, 실제와 상상력, 현실과 이상이 넘나드는 역동적 공간이어야 한다. 유가(儒家)의 발전사관, 진(進)의 신념도 현대의 금융자본이 갖고 있는 자본축적 양식이 과연 지속가능한가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 다뤄지는 동양고전은 축자(逐字) 해석이나 자구의 의미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양태들과 결합되어 현재의 문맥으로 새롭게 읽힌다. 모든 텍스트는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이다. 또한 선생이 겪은 다양한 일화들, 생활 속에서 겪은 소소한 일상들을 함께 들려줌으로써 동양고전의 현대적 맥락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은 『강의』 이후 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훨씬 깊어진 논의와 풍부한 예화를 담아낸 동양고전 독법의 결정본이다.

『시경』: ‘개념’이라는 문사철의 작은 그릇이 아닌, 시인의 감수성으로 세계를 담는다
시(詩)는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을 담고 있다. 시는 문사철(文史哲)의 이성영역이 아니라 서화악(書畵樂)과 함께 감성 영역에 속한다. 그만큼 개념과 논리적 사고에서 자유롭다. 그만큼 우리의 인식 지평(地平)을 넓혀준다. 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연한 ‘인식틀’로서의 시적 관점이다.
선생은 『시경』의 사실성과 진정성, 『초사』의 낭만과 창조를 ‘대비’하며 인식틀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문사철이라는 완고한 인식틀에 갇혀 있다. 문사철은 언어, 개념, 논리 중심의 문학서사 양식이다. 언어와 개념, 논리라는 추상화된 그릇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세계를 온당하게 인식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넓은 바다를 ‘바다’라는 글자에 넣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시적 관점이 최고의 대안은 아니지만, 문학서사 양식의 완고한 틀을 반성할 수 있는 훌륭한 관점이다. 그리고 문사철을 통한 ‘추상력’과 시서화악을 통한 ‘상상력’을 나란히 키워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성훈련 공부와 감성훈련 공부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선생은 감옥에서 만난 한 노인 재소자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직한 세계 인식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신입자가 들어오는 첫날이면 어김없이 이 노인은 신입자를 옆에 불러 앉혀놓고 자신의 긴 인생사를 이야기한다. 이 인생사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창피했던 일들은 빼고 무용담이나 미담은 부풀려 넣고 해서, 몇 년 뒤엔 제법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선생은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 어느 날, 하염없이 철창 밖을 내다보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약 저 노인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노인을 온당하게 이해하려면 겉으로 보이는 재소자라는 삶이 아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문사철의 완고한 인식틀이 아닌 시서화악의 인식틀을 빌려오는 이유는 시적인 관점이 사실성과 사회미에 충실하되 사실 자체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역』: 세계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사람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주역』에서는 이 강의의 화두인 ‘관계론’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람을 개인으로, 심지어 하나의 숫자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을 온전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 그 사람을 놓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역』의 인식틀이다. 신영복 선생은 이와 관련하여 동베를린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고암 이응노 선생의 감옥 에피소드를 전한다. 재소자를 수번(囚番)으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렀다는 고암 선생. ‘응일’應一이라는 이름의 재소자에게 “뉘 집 큰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이라 하셨다는 선생의 일화는 사람을 인식하는 틀의 차이를 보여준다. 『주역』의 관계론이 인식틀로 작용할 경우, 숫자로 인식되던 사람이 ‘뉘집 큰아들’이 된다는 것, 이것은 큰 차이다.


『논어』: “통일은 대박”이라는 관념은 패권주의이며 동(同)의 논리이다
『논어』의 화동(和同) 담론은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를 줄여서 붙인 이름이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군자와 소인이 대비의 개념인 것처럼, 화(和)와 동(同)도 대비의 개념으로 읽어야 한다. 이 화동 담론은 춘추시대 유가학파의 세계 인식이다. 전쟁을 통한 병합을 반대하고 큰 나라, 작은 나라, 강한 나라, 약한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화(和)의 세계를 주장한다. 화(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인 반면에,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이다.
선생이 화동 담론을 현대의 문맥으로 다시 읽는 까닭은 동(同)의 논리로 오늘날의 패권적 구조를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권적 질서는 우리 시대의 대세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달러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한 강대국의 폭력이며, 동(同)의 논리이다. 엄청난 파괴와 살상으로 점철되는 강대국의 패권 구조가 과연 지속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패권 구조는 여전히 건재하다.
화동 담론은 우리나라의 ‘통일 담론’으로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갖는다. 선생은 통일(統一)을 ‘通一’이라고 쓴다. 평화 정착과 교류 협력,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通一’이다. ‘通一’이 되면, 언제일지 알 순 없지만 ‘統一’로 가는 길 또한 순조로울 것이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통일은 대박”이라는 관념은 지극히 경제주의적 발상이며, 그 근본은 동(同)의 논리이다. 민족의 비원(悲願)이며 눈물겨운 화해를 ‘대박’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통일을 경제적 논리로 본 것이다. 대통령의 말처럼 통일이 대박처럼 갑자기 다가올 때 그것은 오히려 파탄이고 충격일 것이다. 統一은 通一로서 충분하다.

『맹자』: ‘관계’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왜소한 만남
『맹자』에는 흔히 ‘곡속장’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예화가 있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 소가 불쌍해서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는 일화이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이 아니다. 왜 소를 양으로 바꾸라 했을까? 그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이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며,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이다. 즉 ‘관계’이다.
이 대목에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만남이 없는 우리 사회의 실상이다. 뉴스에서 보듯,‘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는 바로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식품에 유해물질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한 인간관계의 원인을 도시의 특성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든 것이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존적 형식이다.
선생은 맹자의 이 예화와 함께 자신이 직접 겪은 지하철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선생은 오랜 수형생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지하철에서 누가 어느 역에서 내릴 것인가에 대해서 거의 정확하게 예측한다고 한다. 언젠가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서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 과연 전철이 신도림역에 도착하자 그 사람이 일어섰다. 선생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얼른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자기 자리에 앉히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생이 떠올린 것이 바로 맹자의 이 예화이다. 그 여자와 선생은 만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다. 지하철 속에서의 지극히 짧은 만남으로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그 지하철 안에서 3년쯤 먹고 자고 같이 생활한다면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세대(世代) 간의 만남이 단절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한비자』: 불법행위자와 범죄인의 차이
『한비자』에서는 신발을 사러 장에 간 차치리의 탁(度)과 족(足) 이야기를 통해 변화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고한 인식틀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생은 우리가 탁을 가지러 다시 집에 가는 차치리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를 풀려고 할 때, 우선 그 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고,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진다. 살아 있는 현실을 대면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한 인식틀은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의 인식틀과도 같다. 전국시대 법가(法家)의 원칙은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형(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대부(大夫) 이상은 예(禮)로, 서민들은 형벌로 처벌하는 것이 통용된 형 집행 원칙이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사법 현실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정치인이나 경제사범은 처벌도 경미하고 또 받은 형도 얼마 후면 사면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법 현실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사회의식이다. 정치·경제 사범은 ‘불법행위자’로 인식하면서 절도, 강도와 같은 일반 사범은 ‘범죄인’이라고 한다. 엄청난 인식의 차이다. 한쪽은 그 사람의 ‘행위’만이 불법임에 반하여, 다른 쪽은 ‘인간 자체’가 범죄인이 된다. 완고한 인식틀이다.

20년 20일, 나의 대학 시절
‘검열필’ 편지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선생의 대표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신을 모은 것이다. 선생의 편지는 계수, 형수, 부모님에게 보내진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심 어린 성찰이 담겨 있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은 어느 정도 알려진 바지만, 이번에 출간되는 [담론]에서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글들은 하나같이 반듯하고 차분하다. 징역살이의 고달픔, 괴로움 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선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족들에게 선생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였다. 둘째, 그 편지가 검열을 거쳤기 때문이다. 교도소 당국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이 편지를 검열하기 전에 자기검열을 통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다.
이 책 『담론』에서는 검열필 편지 속에 미처 쓰지 못한 말들을 담았다. 징역살이의 고달픔과 괴로움뿐 아니라, 편지를 쓸 당시의 심경도 서술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편지글들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신영복 선생의 자전(自傳)적인 글들
신영복 선생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이후 무기수로 20년 20일의 수형생활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부터 이후 무기징역수로 살면서의 심경을 자세히 언급한 적은 거의 없었다. 「청구회 추억」을 쓸 당시의 선생의 심경, 이후 기나긴 무기징역수의 삶 속에서 자살하지 않았던 이유 등등 [담론]은 신영복 선생의 자전(自傳)과도 같은 글이다.

* 「청구회 추억」의 추억
「청구회 추억」은 선생이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1년 가까이 사형수로 지내며 쓴 글로,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5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났던 어린이들과의 이야기이다. 선생이 감옥에 수감된 사실도 모른 채 매주 토요일이면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 아이들과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쓴 글이 바로 이 글이다. 선생은 이 글에 대해 “기록이라기보다는 회상이었고, 옥방의 침통한 어둠에서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는 구원의 시간이었다”라고 술회한다. 이 글이 발견된 건 20년이 훨씬 지나 출소 이듬해였다. 어느 청년이 집으로 전해 주었다는데, 아무래도 이송통보를 받고 이감되면서 급히 휴지 묶음을 맡겼던 그 근무헌병인 듯하다. 그 청년 덕분에 이 글은 잊히지 않고 199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증보판에 실리게 되었고, 이후 그림과 함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사형수로 1년을 보낸 뒤 무기징역수로 민간교도소에 이송되었다. 선생은 20년의 감옥 생활을 ‘나의 대학시절’이라 술회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 끝을 상상할 수도 없는 긴 동굴이었다. 선생이 있는 감옥에서 수형생활 10년 차의 재소자가 자살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서 손목을 긋고 죽었다 한다. 감옥에는 [재소자 준수사항]에 자살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고 하니, 이런 일이 빈번하다는 뜻일 것이다.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사형수로서 혹독한 임사(臨死) 체험을 했고, 이후 20년의 무기징역을 살아오면서 수시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가?”
선생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길어야 2시간밖에 못 쬐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고 말한다. 선생에게 겨울 독방의 햇볕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였고 생명 그 자체였다.
남한산성에서의 끔찍한 임사 체험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과도 같은 무기징역수의 삶 속에서도 선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역사를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인간을 배웠다. 끊임없이 개조하고 변화하고 탈주하며, 추상처럼 자신을 지켜낸 신영복 선생. 이 때문에 우리는 선생을 이 시대의 어른이라고 부른다.

20년 20일간의 대학 시절

선생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기나긴 수형생활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실천이 제거된 감옥에서 수많은 재소자들의 삶을 자신의 목발 삼아 걸었고, 이로 인해 인간을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갖게 되었음을 술회한다. 그러므로 선생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직접적이며, 1인칭이다.
선생은 자신의 20년 수형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술회한다. 이 대학 시절이라는 용어는 막심 고리키의 [나의 대학]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선생이 대학 시절이라고 술회하는 감옥에서의 20년 수형생활은 고리키의 고달팠던 ‘인생 대학’만큼이나 엄혹한 세월이었고, 일반인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철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선생에게 독방에서의 사유는 철학 교실이었으며, 감옥은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인간학의 교실이었다.
이 책에는 선생이 교도소에서 만난 많은 재소자들의 삶이 적혀 있다. 푸른 보리밭을 보며 살고 싶어 울음을 터뜨리던 그, 선생과 함께 나란히 떡신자로 이름 날린 창신꼬마, 밤중에 몰래 건빵을 먹던 조목사,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라는 놀랍도록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장기수 노인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비극의 주인공’ 나팔수 이야기, 물 섞인 피를 헌혈했다고 끝끝내 양심에 가책을 받던 재소자 등 선생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이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이들이 평면적으로 등장했다면, 이 책 『담론』에서는 선생의 솔직한 심경 토로와 함께 한 명 한 명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감옥에서 만난 이들과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되살려내고 추체험(追體驗)하는 것이 어쩌면 선생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기꺼이 당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까닭은 무얼까? 아마도 실천 없는 이론으로 허공에 뜬 삶을 사는 우리에게 선생의 이야기를 목발 삼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는,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 공부란 두 발 걸음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 노인 목수 문도득 이야기
선생은 감옥에서 문도득(道得)이라는 재미난 이름의 노인 목수를 만났다. 선생은 이 목수가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목수는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린 반면, 책으로만 생각을 키워온 선생은 지붕부터 그린다. 실천하는 사람과 이론만 있는 사람의 큰 차이다.
선생은 이 일화를 통해 근대화의 최고 수준이라는 ‘톨레랑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만약 이 그림을 보고 “좋습니다.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톨레랑스다. 물론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感謝)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한다. 머릿속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이 톨레랑스라면, 이제 자기 변화로 나아가는 것은 가슴에서 발로 가는 실천의 여행이며, 탈주이며, 노마디즘이다. 탈근대이다.

* 인간 이해의 천박함: 위악(僞惡)과 위선(僞善)
교도소 재소자들 중에는 문신을 한 이들이 많다. 문신은 나쁜 인간,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위악(僞惡)이다. 약자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방법이다. 반대로 위선은 강자들의 의상(衣裳)이며 위장(僞裝)이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시위 현장의 붉은 머리띠는 일종의 문신이다. 단결과 전의(戰意)를 과시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이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이다. 검은 법의의 엄숙성과 정숙성은 시위 현장의 소란과는 대조적이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강자의 논리이다. 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 강자의 위선이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모순된 조어를 버젓이 사용한다. 우리는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 물론 화려한 무대와 의상, 오디오와 비디오의 현란한 조명, 그리고 수많은 언설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그 실체를 직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실패의 더 큰 원인은 이러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인간 이해의 천박함에 있다. 인간에 대한 애증을 고르게 키워 가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한다. 공부는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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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 _본문에서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r****d | 2022.01.20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책을 읽고  사람과 삶, 혼자와 함께에 대해 생각합니다 혼자라는 생각은 차갑고 관계는 어렵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에서 나는 어디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전은 어렵지만 재미있고 지금도 유효합니다 작가의 진솔한 경험담은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슴이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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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사람과 삶, 혼자와 함께에 대해 생각합니다 혼자라는 생각은 차갑고 관계는 어렵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에서 나는 어디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전은 어렵지만 재미있고 지금도 유효합니다 작가의 진솔한 경험담은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쿵' 내려앉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삶의 폭과 깊이가 좁아지고 야위어가는 것은 아닌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유연하게 생각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굳어지고 좁아질 것을 알기에 자주 읽고 기억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너무 멀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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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의 6주기를 맞아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엠*이 | 2022.01.19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신영복 교수에 관한 얘기는 풍문으로 들은 게 다다.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팔팔한 이십 대 청년이었던 신영복은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인재였다. 그는 독서 모임과 서클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그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반국가단체로 여겨져서 잡혀갔다. 너무 익숙한 얘기라 식상할 정도다. 그는 풍문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그를 책으로 접하고 나니 바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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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교수에 관한 얘기는 풍문으로 들은 게 다다.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팔팔한 이십 대 청년이었던 신영복은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인재였다. 그는 독서 모임과 서클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그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반국가단체로 여겨져서 잡혀갔다. 너무 익숙한 얘기라 식상할 정도다. 그는 풍문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그를 책으로 접하고 나니 바람은커녕 돌멩이를 넣은 눈덩이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죽었지만, 난 이제야 그의 책을 읽고 그를 작가로 접했으니 그는 사후에도 자신의 목소리로 살아있던 셈이다. 독서 모임에서 지적 토론을 즐겼던 청년의 생명력은 그렇게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꽤 식상해 보이는 풍문 속에서 이십 년을 빼앗겼다. 어두컴컴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간첩이 되었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들어 간다. 미래가 없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은데 밥맛이 날 리 없다. 그렇게 그는 이름만 들어도 되게 추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젊음을 다 보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허비하는 게 응당해 당연해 보이는 감옥 안에서 사색을 했다. 누가 학자 아니랄까 봐. 누가 공부 잘하는 서울대생 아니랄까 봐.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생전에 신 교수님과 맥줏집에 놀러 간 사람들이 부럽다. 어떤 얘기를 들었을까. 사형수 썰, 독방 썰, 면회 썰, 무엇보다 그 비좁은 곳에서도 삶이 작동한다는 믿지 못할 얘기를 해주시지 않았을까. 감옥을 배움의 장으로 뒤바꾼 사람. 그는 전설이 될만한 자격이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된 앤디가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주말의 명화로 똑똑히 봐왔다. 똑똑히 보기보단 재방송으로 너무 자주 봤다. 왜 쇼생크 탈출이 재밌는가. 거기엔 일종의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재난 영화를 보는 것처럼 타인의 속박을 보고 난 그래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한숨이 있다. 앤디는 속박당하던 죄수들에게 LP로 '피가로의 결혼'을 틀어주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그 결과 독방에서 한 달 넘게 빛 한 점 없이 보내야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장면은 수많은 죄수가 자유의 음악을 즐기는 장면이지만, 앤디가 독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 3초 컷에 불과했다. 자유는 짧고 처벌은 길었음에도 영화는 그 짧은 자유에 귀를 기울였다. 앤디는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누워서 LP판을 만진 걸 후회했을까. 그러니까 신영복을 읽는다는 것은 앤디를 보는 마음과 비슷했다. 그가 감옥에서 학문에 힘쓰고, 끝내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감동을 자아내는 신화지만, 정말 그 안에서 행복했을지 묻고 싶었다. 그가 만든 신화는 나와는 다른 전설적인 존재를 대하는 거리감이 있다. 마치 지미 핸드릭스 하면 떠올려지는 휘황한 이미지가 있지 않나. 어떤 숭배에 가까운 경외가 덧씌워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감옥에서 짓이겨졌던 순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은 살아남아 목소리를 전하지만, 문장 속에는 누추함이 없다. 오직 고결한 정신만 살아남았고, 난 그게 못내 아쉽다. 난 신 교수님이 생활의 냄새를 풍기며 신세를 한탄하는 것도 듣고 싶었다. 그렇지만 난 끝까지 신영복 교수가 바깥에서 자신이 가르칠 누군가를 떠올리며, 앤디가 LP판을 올리며 처벌을 각오하고 수많은 죄수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선사하는 순간처럼 자신의 지식이 어떻게 퍼져나갈지 상상하며 열심히 펜을 놀리는 장면을 상상해야만 했다. 이것이 내가 정의하는 전설적인 풍문의 실체다. 

 신영복 교수가 앤디와 다른 점은 손도끼로 벽을 파내서 자유를 찾은 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감옥에서도 학자로 살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담론>에서 자신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 때문이라고 말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이 정도 마인드 컨트롤 없이는 무기수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쌍팔년도에 광복절 특사에 포함되어 세상에 나올 때까지 그는 동서양을 고서를 넘나들면서 배우고 익혔다. 그의 지적 욕구는 감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는 정신적인 자유로 사상범의 사슬을 풀어낸 셈이다. 그의 출소와 동시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50만 부가 넘게 팔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과정에 담긴 노작이다. 사형수로 살면서 얼마나 착실하게 읽고 썼는지, 자투리 쪽지에 적어 보관한 촘촘한 글씨들이 모여 어떻게 이런 두꺼운 책이 되었는지 수많은 이가 감탄하고 우러렀다. 그는 강의 <담론>에서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이라고 단언했다. 누가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컴컴한 옥에서 햇빛을 보며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청년의 꼭 쥔 손을 잠시나마 떠올려본다. 그래서 난 내용도 다 이해 못 하면서 마냥 그의 강의를 부처의 독경처럼 들었다. 그의 말처럼 육신은 죽었지만, 책은 어떻게든 전해지니까. 이런 사실을 떠올리면 난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정작 내 책은 절판 위기인데, 시간을 들여 읽고 쓴다는 행위가 지향하는 고지를 본 기분이다. 불운한 삶을 살았던 젊은이에게 품위 있는 죽음을 선서한 것과 동시에, 내가 저녁마다 어려운 책을 읽고 씨름하는 짓에 허영을 선물해준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담론>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동양철학은 아는 바가 없었고,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들은 졸음을 불러왔다. 사서삼경에 나오는 말씀이야 다 옳을 줄 알았고, 노자 장자는 멋들어지게 인용할 때 외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문열 작가는 그 옛날에도 <시대와의 불화>라는 글에서 동양 사상가를 멀리하는 청년들의 태도를 비꼰 바 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읽으면서도 사서삼경은 낡았다고 읽지 않고, 보들레르에게는 감탄하면서도 이하(李賀)를 아는 이는 드물다." 꼰대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담론>을 읽으면서 지식 편식의 실체를 몸소 느끼면서 난 좀 침울해졌다.

 카프카의 말을 떠올릴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카프카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친구에게 이런 문장을 적었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가 왜 외롭게 살았는지 알만하다) 신영복 선생도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을 독서에 비유했다. 무지의 뼈아픈 기분에 휩싸이기보다는 한자라도 더 재밌게 읽다 보면 얼어붙은 바다는 아니더라도 냉동실 얼음 정도는 깰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담론>을 읽다 지쳐 방황하던 나는 이해가 가는 부분만 쏙쏙 뽑아 읽으며 발췌독을 했다. 쾌락 독서여 영원하여라.

 

 '관계'의 중요성에 관한 대목에 꽤 짙은 밑줄을 쳤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이다.” 인상적인 문장이다. 고로 "관계없이 인식 없다"는 말이다. 난 이 말을 두 가지로 해석했다. 첫 번째는 지식의 관계성이다. 우린 3초 안에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간다. 더는 지식을 찾는 것은 큰 메리트가 없다. 며칠 전에도 술자리에서 '야 그거 영화 뭐더라. 멜 깁슨 나오고, 전기 감전되고, 여자 다 꾀는 그 영화 있잖아. 여배우가 누구더라. 금발에 지적인 여자.' 내가 몇 마디 뱉기도 전에 한 친구가 검색 신공으로 영화 제목을 댔다. 김이 확 빠졌지만 우린 그런 초고속 정보 접근 시대에 산다. 하지만 지식의 관계성에는 약하다. 관련 검색어로 몇 단계 타고 들어가서 나온 결괏값을 접근하려면 몇 번의 사고를 거쳐야 한다. 단편적인 지식이 온갖 분야와 맺어진 맥락을 모르고서는 풍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인식은 결국 생각의 씨실과 날실을 꿰어내는 솜씨에 있다. 맥락을 아는 자만이 새로운 지식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관계를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이 시대가 개인주의를 주창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가치를 추켜세우는 시대를 살아가기에 월든처럼 원룸에서 외따로 사는 게 용이해졌다.(코로나와 경기 침체가 부른 현상이기도 하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타자를 맞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오긴 오게 마련이다. 우린 직장에 출근하고, 온라인은 끝없이 맺어지기를 종용한다. 나 역시 한때 관계의 영향권에서도 멀어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지금은 생각을 달리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히키코모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질 않았다. 영향 관계를 부정하는 학문은 현실과 먼 딴소리를 하게 마련이다. 지식은 쓰임이 있을 때 가치를 발휘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을 외면하고서는 무감각한 세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인플루언스 하지 않으면 지식은 곰팡이가 슨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243쪽) 학문의 상아탑 안에 갇혀 현실과 거리가 먼 소리를 뱉는 학자는 자기 안에 갇히고 만다. 시대의 교양도 이제는 정의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세운 잣대를 누군가의 말에 영향을 받아 바꿔낼 수 있는 유연한 태도. 아마도 그것이 신영복 선생님이 말하는 관계의 가치 아닐까.

 

 오늘 읽은 글이 일상에서 번져나가고, 술자리에서 뱉은 개똥철학이 누군가를 감화하고, 누군가의 고충에 영혼을 싣는 추임새를 넣을 때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 일이지만, 난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면서 내가 일말이라도 세상을 더 낫게 한다고 믿는다. 그냥 내가 잘 놀려고 모인다고 말은 하지만, 속내는 사실 조금 더 촉촉하다. 책으로 이뤄진 관계, 문장을 끄집어내서 얘기하는 시간. 난 거기에서 내가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잠재성과 가능성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오그라들고,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 정도로 치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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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담론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d******7 | 2022.01.16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어머니께서 필요하다고 하셔서 구입하게된 책입니다. 더 이상 교단에 서지 않으시는 작가님께서 교단에서 하셨던 이야기와 더불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인간성찰, 인간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님 만의 글을 풀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인문학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읽고난 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네요.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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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필요하다고 하셔서 구입하게된 책입니다. 더 이상 교단에 서지 않으시는 작가님께서 교단에서 하셨던 이야기와 더불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인간성찰, 인간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님 만의 글을 풀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인문학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읽고난 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네요.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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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457건) 한줄평 총점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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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를 열어보니 처음엔 어려운 내용인듯 했으나 읽다보니 몰입됩니다 공부도 되고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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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4
구매 평점5점
두고두고 읽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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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포* | 2022.02.28
구매 평점5점
좋은책입니다.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로얄 m********9 |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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