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는 걸러야 한다.” 나와 내 친구들이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쓰던 시절을 전후해 생겨난 말이다. 1994년생인 내가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애쓰던 2017년은 우리 세대의 ‘페미니즘 리부트’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 하지만 동시에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는 사회악이라고, 생활의 영역을 막론하고 ‘페미’는 걸러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새롭게 얻은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걸러지지 않고 무난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수행했다.
--- pp.5~6
그러나 사회생활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정규직 명함 앞에서는 겁나는 게 많아졌다. 회사에 발을 내디딘 후에야 이전에 있던 곳이 안전지대였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던 안전지대는 끝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게 유리한 모습을 영리하게 찾아 갖춰야 했다. 그렇게 3년차 직장인이 된 지금,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던 메갈은 어디 가고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쿠션 팩트를 두드리고 상사의 시비에도 ‘예쁘게 말하는’ 직장인이 남았다.
--- p.32
어느 날엔 여자 동료를 미워하고, 다음 날이 되어선 그들을 미워하는 나 자신을 다시 미워하는 쳇바퀴를 돌았다. 지금도 그 쳇바퀴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나는 여전히 친구들과 일터의 여자 빌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여혐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자조한다) 나름대로 명제를 만들었다. ‘여자’라는 접두어를 포스트잇이라고 생각하기. 포스트잇을 원하는 위치에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 비뚤어졌으면 떼고 다시 붙이면 된다.
--- p.48
사회에 진입하기 전에는 직장인이 되는 게 두려웠고, 직장인이 된 후에는 이전의 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 같아 울적했다. 나는 두 세계가 양립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차원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직장인이 되고는 함께 차별에 대해 말하고 싸우던 친구들과 멀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만날 시간도 없었고, 함께 공유할 이야기도 줄었다. 그 친구들의 눈에 내가 변절자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됐다. 동시에 나는 안락하고 안정적인, 나름의 규칙을 갖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세계의 논리에 점차 익숙해졌다. 친구들이 싸우는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답답함마저 갖게 됐다. 두 세계는 너무 멀어졌고, 나는 그 사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 같아 외로웠다. 누군가 그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두 세계에 발을 한 쪽씩 딛고 서 있으면 된다고 말한 적 있다. 그때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 pp.106~107
20대 초반, 내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나를 비혼주의자라고 정의했던 건 내가 결혼과 너무 먼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결혼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결혼, 선, 조건, 부동산, 투자, 정상 가족. 이런 것들은 내 욕망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단언했다. 그러나 사회에 내던져지면서 내 욕망과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구분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리고 보편적인 욕망, ‘다정하고 잘 생기고 쿵짝이 잘 맞는 남자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 사실 내 안에도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나의 비혼 선언이 손쉬웠던 건 결혼이라는 정상성의 세계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무서운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pp.135~136
페미니즘을 치열하게 실천했던 시간들을 완전히 지우지 않더라도, 소소하지만 독창적인 시각으로 일하는 직업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모든 페미니스트가 회사를 뒤엎을 수 없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용기를 낸 페미니스트만이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 세상과 삶의 궤적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각도기 같다. 보잘것없었던 단 1도의 차이가 지속돼 끊임없이 뻗어나가면, 결국 닿기 힘든 먼 거리를 만들어낸다. 당신이 바꿔낸 아주 작은 변화가 어떤 멋진 미래로 이어질지 차마 가늠할 수 없는 이유다.
--- p.224
언젠가 만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는 일터와 일상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얼굴을 조금 더 뚜렷하게 드러내려 노력하고자 한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얼굴을 드러내고 사회 곳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는 일만큼 우리의 페미니즘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란 서로의 영향력 안에서 끊임없이 유연하게 발전하는 존재들의 삶의 양식이다.
--- p.254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강렬한 경험을 함께 나누고 사회 어딘가로 흩어져버린 친구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안전한 공간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도착하는 경험이 힘들지는 않았냐고. 그리고 이제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을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을 찾고 싶어서, 그렇게 당신들과 다시 연결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