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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사랑한 화가들의 그림] 8인의 시인들이 각자 친애하는 화가의 그림들을 글로 써낸 책. 시와 그림은 말을 줄여 한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의 시절을 관통한 그림들을 시인 각자의 언어로 추억하고, 조우하며 시와 그림이 접촉하는 순간, 엉겨 붙어 내게로 오는 순간을 느낀다. - 에세이 PD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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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안희연 × 파울 클레 ………… 외발로 하는 멀리뛰기 서윤후 × 가쓰시카 호쿠사이 ………… 순간중심 오은 × 앙리 마티스 …………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춤 김연덕 × 헤몽 페네 ………… 강하고 천진한 연인 신미나 × 장 프랑수아 밀레 ………… God Help the Outcasts 이현호 × 최북 ………… 생활과 영혼 그리고 영원 최재원 × 피에르 보나르 ………… 상상―기억의 그리움 박세미 × 이소화 ………… 아직 건너오지 않은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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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은 쉴 새 없이 예수를 호출했다. 예수의 손바닥에 못을 박고 다시 십자가에서 내렸다가 찬양하고 위무했다. 차라리 신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미립자, 혹은 파동처럼 형상이 없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을 굳이 인간의 모양으로 조각하여 육안으로 확인하려 드는 것도, 구체를 향한 인간의 욕망 때문 아닐까.
---「신미나 × 장 프랑수아 밀레」중에서 제목과 주석만 초라하게 남은 저 광활한 실패를 보라. 아마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장벽이 아니었을까. 모든 자극이 다 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떤 그림은 그 자체로 크고 넓어 언어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다시 그림 앞에 선다. 같은 그림을 본다. ---「안희연 × 파울 클레」중에서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춤추는 기분이 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춤추자고 적극적으로 손 내미는 사람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몸을 움직이는 데 젬병인 나조차 신체 곳곳에 분포한 신경이 반응한다. 발을 살짝 떼도 괜찮지 않을까, 손을 슬쩍 머리 위로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티스의 회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도 바로 이 느낌이다. 직전이 가져다주는 설렘과 아슬아슬함을, 한창때에 번져 나오는 흥분과 희열을 나는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마티스의 회화는 결코 넘치는 법이 없다. 신체는 캔버스에 스며든 듯 안정적이고 신체가 표현하는 동작은 날렵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오은 × 앙리 마티스」중에서 노인들이 해로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 손을 잡고 걸음을 맞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거리를 걷는 나이든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다. 페네가 평생 그린 그림을 역으로 쫓아 보는 지금도 비슷한 기분이다. 그 장면이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차분하게 하지 못했을 무수한 일들, 사랑 이후의 일들을 묵묵히 건너와 가능한 몸짓들이기 때문에. 사랑 이후의 일들과 사랑의 복잡다단함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반대로, 시간을 견뎌온 사람의 얼굴에서 보이는 맑고 산뜻한 사랑과 첫사랑의 그것도 잘 구분되지 않는다. 사랑의 어려움과 지루함을 함께 건너가는 것만이 사랑의 지속이기 때문에. ---「김연덕 × 헤몽 페네」중에서 건전하지 못한 상태가 병(病)이라면, 예술도 병이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세상에 적의를 품었다. 삐뚤어진 인정 욕구를 세상을 향한 비웃음과 조롱으로 드러냈다. 나 자신도 타인도 세상도 한낱 예술의 소잿거리쯤으로 취급했다. 예술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배교(背敎)라도 된다는 듯 예술의 순교자를 자처했다. 예술을 멀리하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이 더러워지는 양 몸서리쳤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반편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착각하는 풋내기. 꿈만 꿀 줄 아는 무능력자.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슬픔을 품고 있는 표정을 짓는 머저리. 그게 나였다. 그때 나는 내 영혼을 지키고 싶었다. 무엇이 영혼을 해치는지도 모르면서. ---「이현호 × 최북」중에서 보나르의 그림은 오래오래 보고 있을 수 있다. 봐도 봐도 안 본 눈처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사각의 틀에, 무게와 점도와 질감을 가지고 중력과 표면장력, 마찰력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 만들어낸 빛의 모형을 가지고 끊임없이 시간의 흐름, 빛의 질주에 저항하는 보나르의 집착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위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빛이 바랠 새도 없이 기억을 색칠하고 상상을 그리는 보나르. 삐뚤삐뚤한 선은 끝까지 지켜보아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게 그림이지, 하고 생각한다. ---「최재원 × 피에르 보나르」중에서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이십 대의 방황 속에서 우정을 짙게 나눈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수십 번씩이나 자신의 이름을 바꿔 활동했다. 생애 약 3만 점의 작품을 그린 다작한 작가이기도 했다. 살면서 아흔세 번의 이사를 다니기도 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머물러 있는 곳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만의 예술에 대한 철학을 굳게 지킨 일이기도 했다. 호쿠사이는 마치 언젠가 소식이 끊겨버렸지만 한 시절의 깊은 우정을 나눴던 친구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매분 매초 바다의 정체성을 바꾸는 파도의 성량처럼 말이다. ---「서윤후 × 가쓰시카 호쿠사이」중에서 시간이 지연될수록 나는 내 공간에 그녀의 그림을 걸게 될 순간을 더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소화의 얼굴을 본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이제 훨씬 더 많게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애정이 더 깊어진 것처럼. 그녀의 그림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녀의 그림이 내 공간에 존재하게 될 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웃게 된다. 이것이 작은 꽃의 기쁨. ---「박세미 × 이소화」중에서 |
8인의 시인 × 8인의 화가
그림을 향유하는 시인들의 언어 시공을 초월한 여덟 번의 만남 “그리고 나는 다시 그림 앞에 선다. 같은 그림을 본다.” 안희연, 서윤후, 오은, 김연덕 신미나, 이현호, 최재원, 박세미 8명의 시인이 각자 친애하는 화가를 고르고 그들의 그림을 언어로써 향유한 사랑스러운 합일(合一)의 기록 시와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자. 단순하게 구분하자면 한쪽은 글로 쓴 예술이고, 한쪽은 선과 색으로 그린 예술이다. 보다 엄밀한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너무도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라 이쯤에서 넘어가 본다. 시와 그림은 자주 한데 엮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줄임으로써 말해지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대상을 구체적으로도 추상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읽고 감상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시와 그림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부수고 깨뜨리고 치유하고 복원한다는 점에서, 이토록 희미한 세상의 한 구석을 한결같이 예리하게 투사해 헤집어 놓는다는 점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니까. “새로운 도시에 가면 일단 미술관에 간다. 미술관에 가려고 새로운 도시에 간다. 전후로는 무조건 든든히 먹는다. 하나의 그림은 말 없는 하나의 도시, 한 사람의 무음의 세상, 여러 세계를 넘나들다 보면 배가 고프기 마련.” (최재원)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이러한 시와 그림을 적나라하게 사랑하고 싶어서 기획된 책이다. 고유한 세계관과 예리하게 벼린 시어로 이미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단단히 각인된 시인 여덟 명이 한 자리에 모여 그림을 논했다. 안희연 시인은 특정한 사조로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그림 세계를 구축한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를, 서윤후 시인은 뜨겁게 불타오르는 성정을 우키요에라는 불멸의 장르로 승화시킨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오은 시인은 강렬한 색채를 자유분방하게 사용해 ‘야수주의’라는 사조의 시초가 된 프랑스의 거장 ‘앙리 마티스’를, 김연덕 시인은 간결하고 깔끔한 선과 색채로 천진하여 더욱 애달픈 연인 연작을 그려낸 프랑스 화가 ‘헤몽 페네’를 골랐다. 신미나 시인은 반 고흐가 존경한 화가이자 순박하고 꾸밈없는 농촌 생활을 화폭에 담은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이현호 시인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약하며 기인, 미치광이, 주객 등의 별칭으로 전국팔도에 이름을 떨친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최북’을, 최재원 시인은 풍성한 색채와 영롱한 빛 표현으로 독보적인 화풍을 개척한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를, 박세미 시인은 오랜 시간 서로의 예술에 크고 작은 영감을 선사하며 우정을 나눈 한국의 동시대 화가 ‘이소화’를 골랐다. 우리의 시절을 관통한 그림들 우리의 시를 관통한 화가들 시인들은 저마다 다른 시선과 언어로 그림을 향유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고른 화가와 그 그림이 시인들의 한 시절을 예리하게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서윤후 시인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두고 “이십 대의 방황 속에서 우정을 짙게 나눈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마치 언젠가 소식이 끊겨버렸지만 한 시절의 깊은 우정을 나눴던 친구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고 추억한다. 시인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속 성난 파도를 바라보며, 펄펄 끓어올랐던 호쿠사이의 정열과 갓 시인이 되어 조급하고 서투른 마음으로 안달했던 자신의 이십 대를 병치한다. 또한 김연덕 시인에게 헤몽 페네는 열세 살에 처음 만나 “한낮의 서점에서, 잠깐의 순간에도 그의 연인들에 매혹”되게 만든 화가다. 시인은 “나는 오직 페네를 위해, 책에서 20페이지도 차지하지 않는 그 부분을 읽고 간직하기 위해 그것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의 그림은 거의 내가 들고 다니는 노트에 한 낙서 같았고 그게 낙서라면, 내가 태어나 보았던 낙서들 중 가장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하며 유년 시절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페네의 그림을 추억한다. 시인은 열세 살 꼬마에서 스물여덟이 되었고, 그 사이 시인에게 찾아온 사랑들의 “겉과 안은 여전히 아프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때, 페네가 그린 천진한 연인들은 다시 부활하여 시인과 조우한다. 한편 안희연 시인에게 파울 클레는 최승자와 더불어 그의 이십 대를 정의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는 한때 “클레의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언어화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나의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제목과 주석만 초라하게 남은 저 광활한 실패를 보라. 아마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장벽이 아니었을까. 모든 자극이 다 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떤 그림은 그 자체로 크고 넓어 언어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이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클레의 그림에는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 지르는 여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듯 기우뚱한 전나무가, 겁을 집어먹은 듯 처연하게 눈물 한 방울 떨구고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뒤 시인은 고백한다. “지금껏 써온 나의 시들이 상당 부분 클레에게 빚지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시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시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청춘을 달려온 시인들에게 그림은 때론 위안을, 때론 공감을, 또 때론 조언을 해주었다. 시인이 되고 시집을 펴내며 마주한 고민의 시간과 다양한 인연들 속에서 아파한 이들에게 그림은 때론 사랑을, 때론 상실을, 또 때론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시인들의 한때가 짙게 묻은 그림을 보며 독자들은 시인이 품고 있는 기억의 한 구석을 그들과 공유하며, 그것이 산문으로 발화하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게 된다. 놀라지 마세요 그것은 끈끈하게 엉겨들어 한 덩이가 된 시와 그림이 여러분에게 가닿는 느낌입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인 시와 그림. 글과 색. 펜과 붓. 문장과 색채. 그리고 시인과 화가. 이 둘을 나란히 놓고 감상함으로써 우리는 두 개의 예술이 서로를 흡수하여 하나가 되는 합일의 예술을 목격한다. 어쩌면 글로 그림을, 그림으로 글을 100퍼센트 완벽히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결핍이 그들을 계속해서 책상과 이젤 앞에 앉히고, 끊임없이 쓰게 하고 그리게 하는 것 아닐까? 시인과 화가가 접촉한 순간은 한 편의 산문이 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이 글은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생경한 촉감을 남길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