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마침내 자폐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엄마에게 왜 내가 자폐라는 사실을 더 일찍 눈치채지 못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아빠하고 나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 우리 눈에는 그저 예쁜 딸이었는걸.” 그러나 어린 시절에 보인 이상한 구석을 적어보니 앞뒤로 빼곡히 네 장이나 됐다. 엄마는 나를 진단해 줄 정신과 의사에게 딱히 말할 게 없을까 봐 걱정했지만, 기억하는 게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엄마가 내 행동을 ‘장애’로 여긴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정말 기뻤다. ‘사회적인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슬프게도 진짜 내 모습을 조금은 접어둬야 했다. 자폐를 감추지 않았다면, 나를 보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힘이 돼주고 나를 더 너그럽게 봐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 p.18
스스로 ‘정상’이라고 느껴본 적이 전혀 없던 터라 친구, 가족은 물론이고 텔레비전과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봤고, 조금씩 내 행동을 바꿔나가며 그들을 따라 했다. 잠시 딴 데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 혼자 초를 세면서 두 눈에 쏟아지는 상대의 강렬한 시선을 견디며 눈을 맞추는 법을 익혔다. 말에 높낮이를 더하고 그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제스처도 배웠다. 쓸 만한 문구 몇 개, 대화거리, 적절한 반응까지 알아뒀다. 지금껏 내 관심사는 온통 사람이었다. 별, 행성, 우주의 탄생과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몰두하는 천문학자처럼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절로 눈길이 갔던 것이다.
--- p.30-31
자폐인과 자폐 전문가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위장 특성이 알려져 있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논문은 몇 없었다. 그러던 중 2017년에 처음으로 위장의 핵심 요소를 밝힌 합동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연구 목적은 성인 자폐인 92명을 대상으로 위장 경험에 관해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응답을 보고 핵심 특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세 가지가 두드러졌다. 첫째, 남과 어울리고 통했으면 해서 위장하려는 동기. 둘째, 자폐 특성을 감추고 장애를 보상하는 등 비자폐인처럼 보이기 위한 전략 사용. 셋째,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자기 정체성 소진과 위협 등 장단기적인 결과였다. 이 연구를 통해 간단하게 신뢰성 높은 위장 특성 측정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자폐 특성 위장 설문(CAT-Q)이 탄생했다.
--- p.50-51
대중처럼 자폐 아동 역시 성 규범을 경험하며 자폐 행동을 어떻게 내보일지 결정하게 된다. 같은 이유로 자폐 여성이 사회에 녹아들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에 더 공감하려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는 딸에게 압박을 가하며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강요하기 쉽다. 여성들은 어렸을 때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시끄럽게 조잘대고, 다리를 쩍 벌려 앉고, 펑퍼짐한 옷을 입는다는 이유로 ‘여자애가 그게 뭐니?’라는 말을 꽤 많이 들었을 것이다.
--- p.59
“공감compassion?’이라는 말은 ‘함께cum?’와 ‘고통받다pati?’라는 두 라틴어에서 유래해 ‘함께 고통받는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공감하면 고통이 무엇이냐는 동정을 넘어서서 감정을 이입해 그 고통을 느끼기까지 한다. 자기 공감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행위는 나 자신의 고통을 인지하고 느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단순히 나 자신과 그간 거쳐온 삶을 살펴보고 이루지조차 못할 높은 기준을 들이대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하듯 나 자신을 용서하면 된다. 친구가 실수를 저지른다면 여러분은 알아채지도 못할 것이고, 안다 해도 위로하거나 별일 아니라고 할 것이다.”
--- p.121-122
우리가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정체성은 사실 그간 오랫동안 남들에게 맞춰주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우리 자신을 조금씩 바꾼 결과다. 늦게 진단받은 자폐 성인의 경험에 주목한 연구에 따르면, 실험참가자 중 다수가 정체성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폐인지 모른 채 지금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탓에 자폐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자기 삶을 바라보느라 힘들어했다. 따라서 새롭게 정체성을 찾으려 할 때는 작은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야 한다. 다음 문단에 내가 적은 것처럼 정말 행복했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때가 언제인지 먼저 떠올려 본 다음, 좋아하는 활동이 무엇이며 어디서 평온함을 얻는지 적어보자.
--- p.167
이 책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살면서 불행했거나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던 순간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위장과 그에 따른 어려움까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반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늦게 자폐 진단을 받았다면 받아들이기까지 감정 기복이 꽤 심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전 자아’를 새로운 ‘미래 자아’에 버무려야 한다. 1983년에 셸리 E. 테일러(Shelley E. Taylor)가 제안한 인지적응모형이라는 게 있다. 이 모형은 새로운 인생을 맞아 바뀐 정보를 받아 들고 자아감과 미래 정체성을 어떻게 다시 평가할지 설명한다. 단계는 총 세 개다. 경험 속에서 의미를 찾고 삶에서 다시 통제력을 쥐고서 자존감을 강화하면 된다.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