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피터 린치는 하루에 열네 시간을 일하며 피델리티 마젤란 뮤추얼 펀드를 130억 달러 규모의 거인으로 키워냈습니다. 하지만 린치는 마흔여섯의 나이, 대다수 경영자들이 목표를 올려 잡을 시기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 린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 물음에 대답하려다 보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사무실에서 시간을 더 보낼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 p.29, 「궁극적 선택」 중에서
노숙자는 미국의 일상 풍경이 되었습니다. 영국처럼 사회복지가 훨씬 잘된 나라에서도 노숙자가 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진가 레티치아 바탈리아는 《미국의 어느 날》에 실을 노숙자 사진을 찍은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슬픈 적은 처음이다. 고개를 들면 맨해튼의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절망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렇게 비참한 광경은 팔레르모(이탈리아의 항구 도시)에서도 본 적이 없다.”
--- p.53, 「제 잇속만 차리는 사회」 중에서
루소는 우리가 이 같은 자연 상태에서 쫓겨난 것은 사유재산 제도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둘 수 있게 되면서 내가 가진 것을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하고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이기려는 욕망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루소는 욕망의 확대가 불평등뿐 아니라 증오와 사회 갈등, 노예제, 범죄, 전쟁, 사기를 비롯하여 현대 생활의 온갖 폐단을 낳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p.71, 「흥청망청의 끝」 중에서
미국 종교 지도자들은 누구 못지않게 돈의 윤리를 지지했습니다. …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여 에덴동산에 살게 한 것은 사업을 하라고 그런 것이었다.” … 보스턴의 유니테리언파 목사 토머스 파커는 사업가를 성인의 반열에 놓았습니다. “사업가는 도덕의 교육자요, 세상일에 몸담은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 교과서는 “돈벌이는 신이 허락한 도덕적 의무라고 가르쳤”습니다. … 존 D. 록펠러 2세는 아버지에게서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물려받았는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대 과학 시대에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p.113-114,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중에서
영국의 저명 생물학자 J. B. S. 홀데인은 이 개념(유전자의 생존)을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중에 누군가 홀데인에게 물었습니다. 진화생물학자로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느냐고 말이죠. 홀데인은 재빨리 암산을 하더니 형제나 자매 두 명 또는 조카 네 명 또는 사촌 여덟 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던질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기발한 계산의 근거는 우리와 친족의 촌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친족과 유전자를 몇 퍼센트 공유하는가입니다.
--- p.146,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우치內’는 봉건시대에 가장 먼저 충성을 바쳐야 하는 ‘가정’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속한 조직’으로 의미가 넓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느 회사에서 일한다’라는 말보다 ‘어느 회사 사람이다’라는 말을 더 즐겨 씁니다. 봉건시대에 폭넓은 혈연집단을 일컫던 ‘다이카조쿠大家族’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비슷한 개념으로는 ‘가문家門’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 자본주의 초창기에 미쓰이 같은 재벌은 말 그대로 봉건적 ‘다이카조쿠’였습니다. 대가족의 가부장이 총수가 되었고 수천 명의 직원을 모두 가문의 일원에서 뽑았으니까요.
--- p.172, 「일본인이 사는 법」 중에서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맞닥뜨립니다. 인간관계에서, 사업에서, 정치에서, 외교에서 우리는 상대방과, 잠재적 거래처나 고객과, 정치적 동맹 세력과, 외국 정부와 협력할지 배반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관계의 양측은 협력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혜택만 취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둘 다 잔꾀를 부리면 둘 다 협력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손해를 입습니다. 액설로드의 연구 결과를 적용하면 모든 당사자가 더 나은 결과를 얻도록 할 수 있습니다. … 팃포탯 전술을 써야 합니다.
--- p.211, 「죄수의 딜레마 벗어나기」 중에서
유대교 도덕 사상가 마이모니데스는 ‘자선의 황금 사다리’를 그렸습니다. … 가장 낮은 단계는 마지못해 주는 것, 두 번째 단계는 기꺼이 주되 상대방에게 필요한 만큼 주지 않는 것, 세 번째는 기꺼이 필요한 만큼 주되 달라고 할 때만 주는 것, 네 번째는 기꺼이 필요한 만큼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되 가난한 자의 손에 직접 쥐어주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 다섯 번째는 누가 받는지 모르게 주되 받는 사람은 누가 주는지 알게 주는 것, 여섯 번째는 받는 사람 모르게 주되 주는 사람은 누가 받는지 알고 주는 것, 일곱 번째는 주는 사람도 누가 받는지 모르고 받는 사람도 누가 주는지 모르게 주는 것입니다. 숭고한 일곱 번째 단계 위에는 단 하나의 단계가 있는데, 이는 자선의 필요를 예측하여 각자 먹고살 만큼 벌도록 도와 아예 자선이 필요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 자선의 단계를 나눈 지 800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일반 시민이 … 가능한 최고 단계의 자선에 참여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입니다.
--- p.242-243, 「윤리적 삶」 중에서
의무에 집착하고 정상적인 본능을 억누름으로써 끔찍한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른 나치 당원은 아이히만만이 아닙니다.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 집단 학살 임무를 맡은 특수 부대 ‘SS 아인자츠그루펜’(이동대량학살부대) 앞에 서서 … 자신이 얼마 전에 유대인 100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하는 광경 앞에서 “마음속 깊이 동요되었”으나 의무를 다함으로써 지고의 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의무 자체를 위해서 의무를 행할 때에만 도덕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칸트의 사고방식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 p.211, 「윤리의 본질」 중에서
미국의 철학자 … 테일러는 “시시포스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면 그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기발한 질문을 던지고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매번 똑같은 바윗돌을 굴려 올리면 땀 흘린 결실이 전혀 없으니 다른 돌을 굴려서 신전을 짓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시포스가 매번 똑같은 돌을 헛되이 굴리되 신들이 고약한 자비를 베풀어 시시포스에게 형벌을 수행하려는, 즉 바윗돌을 굴리려는 강한 욕망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 두 가지 가능성은 윤리의 토대를 바라보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관점을 반영합니다.
--- p.288, 「목적을 추구하는 삶」 중에서
첫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 너무 늦기 전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일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재고하고 자신의 행동에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공평한 가치 기준에 어긋난다면 바꿀 수 있습니다. … 분명한 사실은 가치 있는 일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온갖 고통에 연민을 느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애쓴 위대한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니까요.
--- p.346-347, 「좋은 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