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지 않아 왕비는 떠오르는 해처럼 환한 쌍둥이 딸들을 낳았습니다. 쌍둥이들이 세례를 받던 날, 기쁨에 들뜬 왕은 왕비에게 무엇을 선물로 받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왕비는 지붕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더니 푸른 들판에 찾아온 5월을 보고 말했습니다. “내게 봄을 주세요.” ---「일곱 번째 공주」중에서
꿈이든 아니든 이미 조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아버지도 그걸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아들아?”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지난밤 꾼 꿈이 제 마음을 두 갈래로 찢어 놓습니다.” “한쪽 길로 가면 어떻게 되느냐?” “초록 무덤을 파지 않아도 될 거예요.” “다른 쪽 길로 간다면?” 조는 강아지의 레몬 빛깔 귀를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제 마음이 부서지겠죠.” “그럼 네 무덤을 파야 하는 거니?” “저는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사는 동안 모두가 그런 일을 겪는단다. 아픔을 이겨내고 계속 살아가는 거지. 하지만 무덤에 묻히면 그걸로 끝나는 게다.” ---「레몬 빛깔 강아지」중에서
큰 재봉사는 중요한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로타와 의논했습니다. “푸딩 후작 부인께서 무도회 때 입을 옷을 맞추러 오셨단다. 자기한테는 복숭아빛 실크가 어울린다는구나.” “오, 안 돼요!” 로타는 안타깝게 외쳤습니다. “후작 부인께는 자두색 벨벳이 훨씬 어울리실 텐데요.” “내가 딱 그렇게 말씀드렸단다.” 큰 재봉사가 말했습니다. “후작 부인은 치마에 장식 주름도 열일곱 줄이나 잡고 싶으시대.” “세상에!” 로타가 소리쳤습니다. “그런 옷은 장식 없이 묵직하고 기품 있게 재단해야 해요.” “나도 그렇게 말씀드렸지. 부인께는 의젓한 스타일이 어울리니까 장식 없이 품위를 살려야 한다고 말이야.” ---「작은 재봉사」중에서
“너는 누구인가?” “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나는 말했어. “그렇다면 네 아버지는 누구인가?” “이집트에서 가장 풍요로운 부자입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아버지는 이 보리밭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했던 거야. 라 왕은 번쩍이는 눈으로 우리 밭에 시선을 던지고는 말했어. “나는 이집트를 가졌다.” “그건 지나치게 많습니다.” ---「왕과 보리밭」중에서
그날 밤 어린 주인이 뛰어와 요람에서 인형을 꺼내 꼭 끌어안더니 말했습니다. “우린 도망쳐야 해, 셀레스틴. 엄마가 서둘러야 한댔지만 너 없이는 가지 않을 거야.” 아래층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불렀습니다. “빨리 오렴, 아가. 빨리!” 피와 살을 가진 어린 셀레스틴이 톱밥으로 만들어진 셀레스틴을 팔에 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쏟아질 듯 수많은 별이 떠 있던 여름밤, 꽃향기가 남아 있는 정원을 지나 해자 위 다리를 건널 때였습니다. 돌부리에 부딪힌 아이가 비틀거리다 그만 인형을 떨어뜨렸고, 인형은 급히 뒤따라오던 하인의 발에 차여 해자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셀레스틴!” 아이가 외쳤습니다. ---「샌 페리 앤」중에서
지주 로버트 처든이 윌리엄 스토를 게으르다며 농장에서 해고하던 날, 윌은 농장 문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처든 씨,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나와 내 식구들을 굶어 죽게 만들 겁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이봐, 난 그런 바보가 아니야.” 로버트 처든이 말했습니다. “총알 한 발로 잡을 수 있는 새한테 두 발씩이나 쏘는 멍청이가 아니라고. 내 시간을 허비하는 자는 내 돈을 낭비한다는 뜻이지. 자네는 내 시간을 헛되이 날렸어. 난 한 번 결정했고 그걸로 충분해.” “그렇다면 나도 두 번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가난한 윌리엄이 말했습니다. “언젠가 당신과 당신 식구에게 내 도움이 필요할 날이 와도 말이죠.” ---「친절한 지주」중에서
그가 썼던 시라도 기억나면 좋으련만! 존은 필사적으로 시구절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인들에겐 처음 스쳐 간 영감이 모든 것이니까요. 첫 느낌을 잃어버리면 결코 같은 시로 되살릴 수 없는 법입니다. 존은 최선을 다해 무릎을 꿇고,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는 공주를 향해서 속삭였습니다.
그대는 눈송이보다 새하얗고 얼음장보다 차갑다네. 베일 아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아마도 다정하진 않겠지. 눈처럼 추운 여인이여, 그대와 결혼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나는 청혼을 위해 왔으니 부디 그대가 거절해주오! ---「서쪽 숲 나라」중에서
셀리나는 존의 잠옷과 슬리퍼를 꺼내면서 물었습니다. “동쪽의 공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존은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그분이 폐하를 아주 질색하셨군요. 그죠?” “네 신분을 잊지 마라, 셀리나!”
엘리너 파전의 『작은 책방』을 처음 만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마다 책이 넘쳐나는 집이라니! 책이 수북이 쌓인 다락방이라니! 활자 중독의 기미를 보이던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는 단박에 ‘일렁이는 햇살 속에서 금빛 먼지가 춤추듯 반짝’이는 작은 책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 뒤로 책이 넘쳐나는 집은 내 로망이 되었고, 나는 지금까지 책 만드는 일을 하며 책을 가득 쌓아놓고 살아간다.
내가 이 책에서 「작가 노트」 못지않게 좋아하는 이야기는 「서쪽 숲 나라」다. 부지런한 나라의 젊은 왕 존이 ‘과연 쫓아낼까 말까?’ 고민하던 시큰둥하고 건방진 하녀 셀리나가 사실은 자긍심 넘치는 서쪽 숲 나라의 공주였더라는 이야기 말이다. 나도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는 어떤 고단함이 있을지라도 777번째 널빤지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빗장을 여는 순간, 자긍심 넘치는 서쪽 숲 나라의 주인이 된다. 지금껏 읽어왔던 책과, 책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 그 세계를 짓는 법, 그 세계로 들어가는 법, 그 세계에서 힘을 얻어 돌아오는 법을 내게 알려준 이는 엘리너 파전이다. 고운 장정으로 새롭게 태어난 『작은 책방』이 많은 이들에게 777번째 널빤지 입구가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