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두 번째 유형, 즉 지도자의 순전히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헌신에 의거한 지배입니다. 이 유형의 지배에 소명이라는 개념이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나 전쟁 지도자, 민회 또는 의회의 아주 뛰어난 대중 선동가의 카리스마에 헌신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그 인물 개인을 소명을 받은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관습이나 법령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벼락출세한 편협하고 천박한 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인물이라면, 그도 자신의 본분을 따라 살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 즉 문하생들, 추종자들, 그를 순전히 개인적으로 열렬히 신봉하는 자들은 그의 인간됨과 자질 때문에 그에게 헌신할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 p.19~20
사람이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은 결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은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리고 대부분 물질적으로도 이 두 가지를 병행합니다.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내적으로는 정치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권력을 소유해 행사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하나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라는 인식을 통해 내면의 안정과 자부심을 얻습니다. 이렇게 내적인 측면에서 진정으로 하나의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 대의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 p.29~30
정치는 신체의 다른 기관이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경박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면, 정치에 대한 헌신은 오직 열정으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고 열정으로부터만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적인 정치가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신력에 의한 저 강력한 자기통제는 오직 모든 점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 몸에 배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강력한 자기통제야말로 진정한 정치가가 불임의 흥분 상태 속에서 움직이는 아마추어 정치가들과 다른 점입니다. 강력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세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 p.97~98
정치는 열정과 안목을 동시에 갖고서 단단한 널판지에 끈질기고 강력하게 서서히 구멍을 내는 일입니다. 이 세계에서 불가능성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인류에게 가능한 것들조차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하지만 단지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아주 소박한 의미에서 영웅이기도 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도자나 영웅이 아닌 사람들도 모든 희망의 좌절을 감당해낼 수 있는 단단한 심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 우리에게 가능한 것조차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 세계에 대단한 것을 주고자 하는데 그의 눈에 이 세계는 너무나 어리석고 형편없이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고, 이 모든 상황에 맞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오직 그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 p.129~130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교수로 초빙될 당시에 개인적으로 겪은 경험 때문입니다. 당시에 분명히 나보다 더 연구 업적이 뛰어난 동년배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주 젊은 나이에 이 분야의 전임 교수로 초빙된 것은 전적으로 몇 가지 우연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많은 사람이 부당한 운명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우연이 나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작용했고, 이 우연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정반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발 방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 p.141
존경하는 참석자 여러분! 학문 분야에서 개성을 지닌 사람은 오로지 자기가 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지 학문 분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일을 하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일 외에 다른 일을 겸한 위대한 예술가를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개성을 지닌 인물조차도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러한 시도는 적어도 그의 예술에는 해악을 끼쳤습니다. 어쨌든 괴테 정도는 되어야 감히 이런 자유를 시도해볼 수 있고, 수천 년에 한 명 나올 괴테조차도 그런 시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이에 대해서는 오늘 다루지 않겠습니다.
--- p.154~155
어느 교수가 자신은 젊은이들에게 조언하는 자의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고,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의 신뢰를 누리고 있다면, 젊은이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개인적으로 교류하면서 그 소명에 헌신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됩니다. 그리고 그가 여러 세계관과 당파적 견해의 싸움에 개입하도록 소명을 받았다고 느낀다면, 대학 강단 밖 삶의 현장에서, 즉 언론이든 집회든 협회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곳에서 그 소명에 헌신하는 것도 얼마든지 허용됩니다. 하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수강생들이 있을지 모를 강의실에서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수강생들 앞에서 교수가 자신의 신념을 일방적으로 피력하는 것은 용기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나 쉽고 편안한 일입니다.
--- p.187
내가 보기에는 강단에서 예언을 행하는 것보다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들은 강의실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순전한 지적 정직성이라는 미덕 외에 다른 어떤 미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 지적 정직성의 의무는 오늘날 새로운 예언자와 구세주를 고대하는 수많은 사람 모두가 처한 상황이 이사야가 포로 시대에 예언한 에돔의 파수꾼의 저 아름다운 노래에서 파수꾼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다음과 같은 상황과 같다는 것을 깨닫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에돔의 세일 산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파수꾼아, 밤이 아직 얼마나 남았는가?’ 파수꾼은 말한다. ‘아침은 올 것이지만 아직은 밤이다. 묻고자 한다면 다른 때에 다시 오라.’”
--- p.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