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이토록 많은 종류의 나무가 살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놀라운 시간이었다. 10년 넘게 같은 길로 출근하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한 내 곁의 생명체들이었다. 경이로웠다. 이 짧은 시간의 경험은 내 곁의 모든 생명체들을 한번 더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그러자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한 장, 낙엽 한 장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얼마 뒤에 다니던 직장을 나와서 지금까지 16년 동안 우리나라의 큰 나무들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와 풀꽃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바라보자 나무들은 차근차근 내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도시든 시골이든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라도 자연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도시는 어쩌면 산과 들, 혹은 농촌 산촌과 같은 시골 마을보다 훨씬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시골에서라면 대개 자생하는 생물들 위주로 식생이 이루어지겠지만, 자생하는 생명체의 서식지를 파헤치고 들어선 도시에서는 새로이 생명체를 들여와야 한다. 결국 다양한 생명체들을 끌어들여 심어 키우게 되고, 자연스러움이야 모자랄지 몰라도 다양함에서만은 시골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든 다양하든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곳은 없다. 자연의 숨결이 멈춘 곳이라면 사람의 숨결까지 멈추어야 하는 곳이다.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 곁의 자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 앞에 우리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을 함께 찾아보기로 하자.
-「들어가는 글」에서
양버즘나무가 도시의 가로수로 알맞춤하다는 데에는 양버즘나무만의 특징이 있다. 그의 넓은 잎 표면에는 얼핏 보아서 구별되지 않는 매우 작은 솜털이 촘촘히 돋아 있는데, 이 작은 솜털이 공해와 매연을 빨아들이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도시의 나쁜 공기를 빨아들이는 데에 제격이다. 덧붙여 공해가 심한 조건에서도 양버즘나무는 잘 견뎌내니, 그야말로 가로수로 더 좋은 나무가 없지 싶다.
그런 이유로 양버즘나무는 세계 곳곳에서 도심의 가로수로 널리 심어 키우는 나무가 됐다. 심지어 공해 걱정이 그리 크지 않았을 기원전 5세기 무렵의 그리스에서도 가로수로 플라타너스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버즘나무의 이름이 붙은 건 줄기 껍질의 생김새 때문이다. 양버즘나무의 줄기 껍질에는 흰색에서 유윳빛 혹은 회색의 얼룩이 심하게 드러나는데, 그게 마치 우리 얼굴에 나는 버짐을 닮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표준어로 ‘버짐’을 택하고 있지만 옛날 표준어는 ‘버즘’이었고 한번 정한 식물 이름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버즘나무 양버즘나무로 표기한다.
양버즘나무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갖 더러운 배출물을 빨아들여서 사람 사는 마을의 공기를 깨끗이 해준다. 나무가 사람에게 주는 혜택의 끝을 알기 어려울 만큼 고마운 노릇이다. 흔하디흔하게 보는 나무이지만, 그야말로 고맙고 고마운 나무다.
-56~57쪽
벚나무는 일본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벚나무를 좋아해서 곳곳에 심어 키웠을 뿐 아니라 벚나무를 중심으로 한 여러 문화행사를 만들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벚나무의 조상을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도 원산의 왕벚나무가 그 나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본의 나무처럼 알려진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일본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도 흥미를 더한다. 결국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나무는 바로 우리의 토종 나무라는 이야기다. 물론 다른 의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자신들이 좋아하는 나무가 한국에서 건너간 나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그리 개운치 않았을 일본인 학자들의 생각이 그렇다. 일본에 존재하던 자생지가 언제부터인가 환경 변화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근거가 불투명한 상태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듯하다.
-70~71쪽
도대체 나무는 어느 자리에 저토록 아름다운 빛을 감추어두고 있었을까 생각하면 나무살이가 참으로 신비롭게 다가온다.
-85쪽
단풍나무의 꽃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단풍나무 꽃은 쉽게 볼 수 없다. 심지어는 단풍나무에도 꽃이 피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꽃을 피운다. 어쩌면 꽃 피고 열매 맺고 씨앗을 익혀서 자손을 번식하는 게 나무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테니, 꽃 피지 않는 나무는 없다.
-88~90쪽
모든 꽃, 모든 나무가 그렇다. 그냥 흘긋 지나치며 바라보아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은 천천히 오래도록 자세히 바라보아야 드러난다. 그렇게 바라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신비로운 모습은 우리에게 경이로움의 감정을 키워줄 것이고, 그 경이로움은 마침내 우리가 자연을 만나고 자연을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지난 세기 최고의 생태학자 레이첼 카슨이 그의 유고집 『센스 오브 원더』에서 ‘자연을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한 말은 이 같은 경우를 놓고 한 말이다.
-121쪽
철쭉과 진달래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꽃이 아니라 잎부터 보는 게 좋다. 철쭉의 잎은 끝이 넓적한데 진달래는 뾰족한 타원형이다. 또 잎 표면에 광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도 있다. 철쭉의 잎사귀 표면이 거친 데에 비해 진달래는 비교적 반들거리는 광택을 가졌다. 잎의 끝이 넙적하면 철쭉, 뾰족하면 진달래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쉽지만 실제 나무 앞에서 그것만으로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식물도 사람처럼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보니 수학적으로 계산되듯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뾰족하고 넓적한 경계가 애매할 때가 있어서다.
그러면 다음에는 꽃 피는 시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진달래가 초봄에 꽃을 피우는 반면 철쭉은 늦봄이나 초여름에 꽃을 피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진달래가 먼저 피고, 진달래꽃 질 무렵에 철쭉이 피어난다고 보면 된다.
-133~134쪽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늘의 나무, 천국의 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나무를 오래 바라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잎 무성한 봄여름뿐 아니라 낙엽을 모두 마친 가을 이후 겨울에도 가죽나무는 빈 하늘에 홀로 굵은 붓질로 호방한 무늬를 지어낸다. 심지어 도시인들의 늦은 밤 퇴근길에도 가죽나무 가지가 하늘에 굵은 붓으로 그린 진하디진한 무늬는 언제까지라도 우리 곁에서 가장 좋은 나무로 남으리라. 작은 쓰임새만 따져서야 어찌 큰 지혜를 알겠는가라고 했던 장자의 이야기처럼.
-143쪽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그 자리에는 언제나 나무가 있다. 하기야 자연 상태의 나무가 솟아오르기 어려울 만큼 높이 솟구친 고층 빌딩이 스카이라인을 이룬 도심에서라면, 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라도 사방을 휘휘 둘러보면 어느 한쪽에서만큼은 필경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나무, 운이 좋다면 초록 숲을 이룬 산의 능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59쪽
역시 도시에는 마음만 먹고 찾아보면 여느 시골 마을 못지않게 많은 종류의 나무가 있다. 나무가 잘 살던 자리를 갈아엎은 뒤에 도시를 꾸미는 과정에서 기왕에 도시의 환경을 아름답게 하려는 의도라면, 다양한 나무를 심어 가꾸는 게 좋다는 조경 원칙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다.
-171쪽
필경 한 송이의 꽃, 한 그루의 나무는 오래도록 사람살이의 알갱이로 남는다는 깨우침이 고마울 뿐이다.
-195쪽
시골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밤나무를 옛 어른들은 조상의 음덕을 잊지 않는 기특한 나무라고 했다. 제사상에 생밤을 깎아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건 밤이 처음 나무로 독립해 뿌리를 내릴 때 자신에게 생명을 내린 어미 나무의 흔적을 오래도록 간직한다는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밤나무의 씨앗인 밤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오는데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밤 껍질이 어린 나무의 뿌리에 계속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여느 나무들이 싹이 트면서 곧바로 씨앗의 껍질과 같은 이전의 흔적을 모두 덜어내는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걸 보고 옛 어른들은 밤나무를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는 나무로 여기게 됐고, 조상의 음덕을 기억해야 하는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게 됐다고 한다.
-200~201쪽
목에 한껏 힘을 주고 부는 나팔처럼 싱싱하게 고개를 쳐들고 피어나는 능소화 꽃송이. 바람 불고 비라도 몹시 내리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능소화 꽃송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 그 나팔을 닮은 꽃들이 불어내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양반 아닐까 싶다. 능소화 핀 대문 안마당에 빗자루를 들고 선 집주인의 여유와 풍류가 부럽다.
-222~223쪽
수수꽃다리를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부른다고 했는데, ‘라일락’은 식물학에서 부르는 공식적인 이름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국가표준식물목록이나 식물도감에는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식물이 없다는 이야기다. ‘라일락’은 영어 문화권의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라일락의 공식적인 우리말 이름은 ‘서양수수꽃다리Syringa vulgaris L.’다. 수수꽃다리와 같은 종류인데 서양에서 들어온 나무임을 밝히기 위해 수식을 붙였다.
수수꽃다리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자라던 토종 나무의 예쁜 이름이다. 따뜻한 기후를 싫어하는 수수꽃다리는 우리나라의 중북부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옛 선비들이 정원에 심어 가꾸기를 좋아했다. 옛 사람들은 우리 산과 들에서 자라는 수수꽃다리를 구해 와서 자기 집 정원에 심어 키웠다. 대부분은 휴전선 이북 지역에서 자라던 나무였다고 한다. 수수꽃다리가 지금은 휴전선 이남 지역에서 자라기야 하지만, 자생지를 찾을 수 없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293~294쪽
칠엽수를 알기 위해 먼저 세밀하게 나눠서 이야기할 게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자라는 마로니에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칠엽수가 서로 다른 나무라는 사실이다. 물론 두 나무는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생김새가 닮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심어 키우는 칠엽수는 일본을 고향으로 하는 나무이고, 프랑스 파리의 마로니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을 고향으로 하는 나무다.
수수꽃다리와 서양수수꽃다리가 그랬던 것처럼 칠엽수와 마로니에 역시 워낙 닮아서 일본에서도 칠엽수를 보통 마로니에로 부른다. 우리도 일본에서 이 나무를 처음 들여올 때, 일본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그대로 따르면서 마로니에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부르자면 일본에서 들여온 나무는 그냥 ‘칠엽수’이고, 프랑스의 가로수로 유명한 나무는 ‘서양칠엽수’라 해야 정확하다. 마로니에는 당연히 ‘칠엽수’가 아니라 ‘서양칠엽수’의 다른 이름이라는 이야기다.
-298쪽
한 그루의 나무를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해 혹은 세 해가 걸린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일테면 나무에서 새잎 나고 꽃 피는 봄, 열매 익어가는 여름, 단풍 들고 낙엽하는 가을, 잎 진 뒤 묵묵히 지내는 겨울, 철마다 나무는 다른 생김새, 다른 표정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나무에 따라서는 꽃이나 열매 맺는 일에서 해걸이를 하기도 한다. 해걸이가 아니라 해도 나무의 건강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올해 잘 맺은 열매가 이듬해에는 어떻게 변하는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두 해 이상의 긴 관찰이 필요한 이유다.
전문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이 같은 관찰까지는 아니라 해도 주변의 나무를 살펴보고, 그와 교감하는 일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사람보다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은 언제나 천천히 다른 생명체들을 자기 곁으로 끌어들인다. 가만가만 나무를 바라보아야 나무는 비로소 제 안에 담은 이야기를 표정으로 들려준다.
-303~304쪽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나무가 있다. 그의 존재를 알아주든 말든 나무는 도시인들 곁에서 여느 숲에서와 마찬가지로 광합성도 하고, 미세먼지도 빨아들이며 싱그럽게 살고 있다. 마흔 종류 가까이 되는 나무들을 순서 없이 소개했다. 내가 사는 수도권 도시 아파트를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안에서 늘 만나는 흔하디흔한 나무들이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정도의 나무는 쉽게 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뿐 아니라 이 책에 소개한 나무들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 (…)
초록의 생명과 더불지 않고 가능한 생명은 이 땅에 없다. 풀이든 나무든 초록의 모든 생명체는 세상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리는 기반이다. 나무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나무가 아름다운 곳은 사람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며, 나무가 죽어가는 곳은 사람도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깨달음이 간절하게 필요한 때다. 내 곁의 나무를 한 번 더 바라보아야 하는 절실한 이유다.
-「맺는 글」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