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제일 좋을 때지. 노인은 손자를 보며 생각한다. 세상을 알 만큼 컸지만 거기에 편입되기는 거부할 만큼 젊은 나이.
벤치에 앉아 있는 노아의 발끝은 땅바닥에 닿지 않고 대롱거리지만, 아직은 생각을 이 세상 안에 가두지 않을 나이라 손은 우주에 닿는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어른답게 굴라고 잔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포기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어른이 되기에는 너무 늦었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런데 그 나이 역시 나쁘지는 않다. --- p.10~11
할아버지는 손자의 이름을 남들보다 두 배 더 좋아하기에 항상 ‘노아노아’라고 부른다. 할아버지는 한 손을 손자의 머리에 얹지만 머리칼을 헝클어뜨리지 않고 그냥 손가락을 얹어놓기만 한다. “무서워할 것 없다, 노아노아.” 벤치 아래에서 활짝 핀 히아신스들이 수백 개의 조그만 자줏빛 손을 줄기 위로 뻗어 햇살을 품는다. 아이는 그게 무슨 꽃인지 안다. 할머니의 꽃이고 크리스마스 냄새가 난다. --- p.17
“우리에게는 영원이 남아 있어요. 아이들, 손자들.” “눈 한번 깜빡하니까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전부 지나가버린 느낌이야.” 그가 말한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린다. “나랑 평생을 함께했잖아요. 내 평생을 가져갔으면서.” “그래도 부족했어.” 그녀는 그의 손목에 입을 맞춘다. 그의 손가락에 뺨을 댄다. “아니에요.” 두 사람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그는 그 길을 예전에도 걸어본 듯한데 그 끝에 뭐가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p.27~28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점점 길어질 거예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이유는 당신의 머리가, 당신의 세상이 남들보다 넓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견딜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보고 싶어.” --- p.98
“그리고 계속 글을 쓰래요! 한번은 선생님이 인생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쓰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뭐라고 썼는데?” “함께하는 거요.” 할아버지는 눈을 감는다. “그렇게 훌륭한 대답은 처음 듣는구나.” “선생님은 더 길게 써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니?” “이렇게 썼어요. 함께하는 것. 그리고 아이스크림.” 할아버지는 잠깐 생각하다가 묻는다. “어떤 아이스크림?” 노아는 미소를 짓는다.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 p.114
“아니, 죽음은 느린 북이에요. 심장이 뛸 때마다 숫자를 세는. 그래서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실랑이를 벌일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