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7년 08월 25일 |
---|---|
쪽수, 무게, 크기 | 104쪽 | 142g | 130*224*20mm |
ISBN13 | 9788954646628 |
ISBN10 | 895464662X |
발행일 | 2017년 0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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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04쪽 | 142g | 130*224*20mm |
ISBN13 | 9788954646628 |
ISBN10 | 895464662X |
시인의 말 1부 당신과 내가 살다 간 방 북항(北港) 모과꽃 지는 봄 수목장(樹木葬) 하늘 모퉁이 연못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벽화(壁畵) 1 포복(匍匐) 연금술사 1 엄마의 꽃 뭉게구름 여름 바라나시에서의 시 연금술사 2 연금술사 3 설국(雪國) 2부 세상에 봄은 얼마나 왔다 갔을까 모란(牡丹) 달소 생의 정면(正面) 청동거울 당신과 살던 집 적멸보궁(寂滅寶宮) 벽화 2 산소 가는 길 라일락 질 무렵 땅거미가 질 무렵 아득한 한 뼘 2월의 방 기억의 갈피로 햇빛이 지나갈 때 장마 1 하얀 코끼리 3부 어찌 안 아플 수가 있니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프라하의 달 장마 2 보문동 화무십일홍 연꽃 피는 밤 처서(處暑) 모기 허공 속 풍경 시간의 갈피 나무와 사랑했어 동피랑의 달 서피랑의 달 휘어진 길 저쪽 비 오는 가을 저녁의 시 나팔꽃 노을 4부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호랑나비 이모의 잔치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뿔 집시의 시간 홍시등(燈) 초저녁 별 눈 이유도 없이 못 견디게 그리운 저녁 착불(着拂) 풀잎이 자라는 소리 바람이 거꾸로 부는 날 지금은 지나가는 중 벽화 3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해설달을 떠오르게 하는 소의 쟁기질 김경수(문학평론가) |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 시인의 말 中 -
[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눈은 앞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수도 있다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벅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 땅거미가 질 무렵 ]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걷다보면
풍경 속에 또 다른 풍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것만 같은
어스름녘
젖은 하늘의 눈망울
물끄러미 등 뒤에 서서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과
까마득하게 잊었던 시간들
생각날 듯 달아나버리는 생의 비밀들이
그림자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잡히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
만져지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잘못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 밝음과 어둠이 섞이는 삼투압 때문에
뼈가 쑤시는
땅거미가 질 무렵
[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
누가 환생을 하는가보다
봄밤 달에서 떨어지는 꽃향기가
제삿날 피우는 향처럼 가득하다
목이 멘다
내가 알았던 생이었나보다
기우뚱 떠오르려다
사라지는 나뭇가지 위
달이 밀어내는 꽃봉오리가 뜨겁다
이 밤에 당신 무엇으로 오시는가
목이 꺾이도록 달을 바라보다가
저 달 속에 그만 풍덩 몸을 던져
당신이 오고 있는 길
그 생 쫓아 다시 오고 싶다
[ 설국(雪國) ]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마다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雪原)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멀어져가는 불빛 한 점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밤의 긴 머리카락
하얗게 사랑해 하얗게
적멸이 되어 돌아오는 말과
꽃봉오리 속에 같혀 지샌
눈의 날들
너무 환해 기억이 나지 않아
밤에도 하얬다
[ 허공 속 풍경 ]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집
허리둘레가 넓은 어머니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가
우뚝 서 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말릴 나물들을 더 얹었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은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버린 집
어른거리는 골목 너머 장독대 너머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느 허공을 살다 간 것일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몰고 오던
씨줄의 공간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저 허공 속
환영(幻影)이야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 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소/라/향/기 ...
평소 나는 감성과 독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를 읽는 다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라는 제목에 이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행히 권대웅 시인의 이 시집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서정을,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 할 수 있었다.
이 시집에 수록 된 62편이 다 좋았지만 더욱더 오래도록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있는 한편을 소개할까 한다.
제목 : 착불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비가 내린다. 가을은 절명 직전이다. 여름은 기억조차 흐릿하다. 여름에도 내렸던 비가 가을에도 내리고 있다. 가을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겨울에 떨어져 내릴는지도 모른다. 오늘 집을 나가면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오늘도 오늘 집을 나갔고 오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나갈 때 눈여겨보았던 집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그대로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화무십일홍> 중
아직 숨을 거두지 못한 붉은 단풍잎을 오래 바라보고 돌아왔다. 이미 바닥에 떨어져 떨어지고도 지쳐 바스러지는 중인 잎들에게서 눈 돌렸다. 떨어진 이파리들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 햇살은 덜어지고, 영장류들이 그 길을 밟고 또 밟으며 지나갔다. 삶의 무게를 벗어 놓으려고 그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그 길에 고스란히 무게를 버리고 또 내려놓으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시간의 갈피
시간과 시간 사이에 난 길
새벽 다섯시와 여섯시 사이의 샛길
오전 열시와 열한시 사이의 섬
오후 두시와 세시가 만나는
눈부신 여울목
저녁 여섯시에서 일곱시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우두커니와 물끄러미
그 시간이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울음
혼자서만 너무 그리워했던 눈빛
억장이 무너져 쌓인 적막
꽃들의 그림자와 떠나지 못한 햇빛들
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
저쪽으로 가지도 않으며
현재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서성이는 응어리
그 시간의 갈피에 숨어 살고 있는 것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함없이
이런 하늘을 곰탕이라고 한다네요, 아내가 말했다. 초미세먼지 매우 나쁨인 연이틀, 불구하고 그 하늘조차 눈 맞추겠다고 집을 나섰다. 눈 돌리는 곳마다 곰탕처럼 뽀얗게 우려진 하늘이었다. 인간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두 마리 고양이는 내내 잠을 잤을 것이다. 돌아와 눈을 마주치면 고양이는 아직 말갛게 돌아오지 못한 눈동자로 우리를 반긴다. 그럴 때 나는 고양이는 진국처럼 깊숙하게 안아 준다.
서피랑의 달
저녁이면 뒷짐을 지고
아흔아홉 계단을 올라가는 달
거제에서 나무해오며 살던
팔십서이 할매 지게에 얹혀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서피랑
나비가 지게 맨 꼭대기에 앉아
가만가만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소란스러운 세상이 자꾸 더 싫어지는 중이다. 뉴스를 보면 자꾸 미움이 많아지는데, 나는 오래전 어떤 후배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용된다, 게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쓴 에너지는 최소한 그만한 에너지로 돌려받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 쓴 에너지는 전혀 보상받지 못한 채로 낭비될 뿐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그 문장을 읽는 들판 /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었다 / 하늘 허공 한쪽이 스르륵 풀섶으로 쓰러져내렸다 / 주르륵 눈물이 났다 /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 <삶을 문득이라고 불렀다> 중
예전에 나는 ‘문득’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불현듯, 이라는 부사를 앞에 붙인 문장을 만들어내곤 했다. 나는 예외적인 삶을 꿈꾸었지만 어느 때 이후 그만두었다. 그것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예외적인 삶을 꿈꾸었던 때로부터 아주 잘 깨어났나보다. 하지만 문득 그 꿈의 여운이 되살아난다. 나는 시를 읽는데, 내가 시를 읽어서 꿈의 여운이 되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꿈의 여운이 되살아나 시를 읽은 것인지...
권대웅 /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문학동네 / 103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