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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 퇴사하고 떠나는 서른 살의 미술 유학

리뷰 총점7.0 리뷰 4건 | 판매지수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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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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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362g | 123*185*20mm
ISBN13 9791186561492
ISBN10 118656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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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가고 싶어.’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공부하고 싶어.’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 특별하지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결심을 하고 나니 잔뜩 흐렸던 마음이 맑아졌다. 하지만 막상 유학을 가려는 결심만 굳혔을 뿐 나에게는 합격통지서도, 든든한 지원군도, 철저한 계획표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길을 만들어야 했다. 서른 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계절에 나는 그렇게 다시 백수가 됐다.


때마침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다시 카페로 향하면서 나는 마음에 남아 있던 묵직한 열등감을 씻어냈다. 엄청나게 잘난 사람들과 경쟁하며 글로벌 인재가 되는 건 내 유학의 목표가 아니잖아.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며 살고 싶었던 일상을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배우는 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그게 가능한 곳으로 떠나면 되지 않을까. 이제는 다른 사람의 기준을 버리고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해보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왜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사를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고, 다른 전공 공부를 하는 이유가 구구절절 길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는 두 번의 퇴사 후 전공을 바꿔 유학을 떠나는 상황이 실패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내 선택의 이유를 다른 사람이 찾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이 “그거 왜 해요?”라고 물으면 답은 간단하다. “그냥 좋아서요.”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래도 혼자 준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나서 모든 과정을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유학 가서 쓸 돈을 아끼고 싶은 소심한 마음 때문이었다. 매일 마시는 커피값 계산해가며 힘들게 모은 돈인데 학원비에 펑펑 쓸 수는 없었다. 돈을 떠올리면 물감 한 개 쉽게 사기 어려웠고 비싼 수입지는 만지작거리다가 포기하곤 했는데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빈털터리가 될 수는 없지. 유학생활에 돈이 얼마나 들지도 모르니 떠나기 전까지 혼자 준비해보자고 결심했다. 물론 준비 기간 내내 방향 없이 달리는 마라토너가 된 느낌이었지만 이왕 달리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때부터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것만 안 하면 행복할 것 같고 이 일만 하면 행복해지리라 굳게 믿었는데 실제로 해보면 오히려 더 불행해졌다. 힘 빠지는 시도를 몇 번 하고 나서야 알았다. 행복이라는 종착지는 없구나. 인생 자체가 선택의 연속일 뿐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과제는 처음부터 없었다. 행복을 위해 투자한 게 많다고 느낄수록 기준은 올라가고 만족도는 떨어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행복의 순위에 따라 선택한 게 아니라 고통의 순위에 따라 선택하곤 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 감당할 만한 고통을 주는 선택지에 마음이 갔다. 행복은 견딜 만한 고통에서 느끼는 엔도르핀이었다.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났을 때 잠시 찾아오는 저릿한 만족감, 뜻하지 않게 얻은 작은 기회,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높아지는 자존감이 흔히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었다.


혼란의 20분이 지나고 교수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등장했다. 그러곤 한참 동안 뇌가 그리는 그림과 눈이 그리는 그림의 차이를 설명했다. 디자이너는 때로 뇌가 상상하는 인간을 그려야 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하기도 해야 한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상상해서 그려서 눈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15분간 그린 앞사람의 얼굴과 상상으로 그린 교수의 얼굴에 거의 차이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 오히려 그림 실력이 형편없다고 좌절하고 있던 친구들의 그림이 실제 얼굴과 약간 닮아 보였다. 코는 어떻게 생겨야 하고 입술은 어때야 하고 눈은 어떻게 갈라지는지 누군가 정해놓은 이론만 접했던 나의 그림은 형편없었다. 이 고정관념을 어떻게 깨야 할까 고민하다 손을 들고 질문했다. “기억을 지울 수는 없잖아요, 보이는 대로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꾸로 뒤집어서 그려.”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지 않아야만 인간다워진다는 그의 주장은 결국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시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뇌를 속여. 너의 뇌는 생각보다 게으르다고.


2시간짜리 수업을 받기 위해 평균 10시간을 준비한다. 거기에서 그림과 디자인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목적지가 없다는 것. 내가 정한 그곳이 목적지가 되는 것.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디자인하기도 하고 디자인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더 이상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평소에 별 고민하지 않던 사람도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다 보면 빨간 별이 몇 개는 튀어나온다. 거기에서 칭찬의 역할이 중요하다. 칭찬은 그 별을 쫓아서 오래 달릴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스스로 만든 기준을 넘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잠을 줄이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 칭찬이 목적인 것과는 좀 다르다. 칭찬은 짧고 허무하지만 자신에게 느끼는 만족감은 힘들게 고민했던 시간에 충분한 보상이 된다. 그러니 우리, 좋은 건 좋다고 말합시다.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잖아요.


다들 지난 이야기를 선뜻 꺼냈다. 누군가의 바보 같았던 선택에는 같이 웃었고 돈이 없어 힘들었던 사연에는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던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처음부터 이 길이다 싶어 줄곧 한 길만 걸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마음이 편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안심하는 표정 위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만약 디자인도, 그림도, 일러스트도 잘 못하거나 내 길이 아니면, 그땐 어떡할 거야?” 누군가 뒤에서 작게 물었다.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다른 거 하면 되지. 다들 이미 여러 번 망해봐서 알잖아. 안 죽어.”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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