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8년 11월 29일 |
---|---|
쪽수, 무게, 크기 | 568쪽 | 620g | 140*210*35mm |
ISBN13 | 9791158884680 |
ISBN10 | 1158884680 |
발행일 | 2018년 11월 29일 |
---|---|
쪽수, 무게, 크기 | 568쪽 | 620g | 140*210*35mm |
ISBN13 | 9791158884680 |
ISBN10 | 1158884680 |
머리말 종이 동물원 천생연분 즐거운 사냥을 하길 상태 변화 파자점술사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시뮬라크럼 레귤러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파(波) 모노노아와레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 송사와 원숭이 왕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옮긴이의 말 |
대학원 수업 때 이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 나는 괴담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이 책의 어떤 단편을 읽어보면 좋겠다며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을 소개받았다. 그 수업을 함께 들었던 학우들과 이 그룹을 만들게 되었고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인상깊게 읽은 단편 몇 가지를 골라 리뷰하고 싶다.
역시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은 단연 최고였다. 이 단편 속에는 동양인 인종 차별, 여성 인권, 중매 결혼, 다문화 가정, 중국의 역사 등 많은 이슈가 포함되어 있다. 플롯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릴 적, 종이로 호랑이인 ‘라오후’를 접고 놀았던 엄마와 주인공인 ‘나’인 잭. ‘나’의 엄마는 중국인이고, 아빠는 미국인으로 둘은 중매로 결혼하였다. ‘나’는 중국계 미국인이며 커 가면서 중국인 피를 가진 ‘나’를 또래 친구들이 놀림으로서 중국인 피가 섞인 자신과 엄마가 싫었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마음이 더욱 커져 자리 잡게 된다. 엄마와 중국어로 말도 하지 않고 10대 생활을 보내는 ‘나’. 시간이 지나고 엄마는 암에 걸리게 되어 병상에 눕게 되고 일찍 돌아가시게 된다. ‘나’에게 종이로 만든 장난감인 라오후는 잊혀진 존재였다. 살아 숨 쉬던 종이 인형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게 되어 그렇게 기억의 깊은 곳으로 잊혀 갈 때쯤, ‘나’는 엄마가 쓴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미국에서 사는 중국인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편지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엄마의 사랑, ‘[아이]’를 느끼며 소설은 끝이 난다.
내 모국어가 전달할 수 있는 ‘뉘앙스’의 힘과 의미가 있다. ‘나’의 어머니가 전하려는 사랑이라는 발음 ‘[아이]’는 미국인 아버지의 ‘love’와 의미는 같겠지만 다른 분위기가 있다. 엄마는 엄마의 언어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종이접기를 통해 만든 동물들은 엄마의 손길로, 엄마가 숨을 불어 넣은 마법의 종이 동물들이었다. 중국인인 엄마의 모든 것이 담긴 라오후는 ‘나’에게 추억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일부로써 소중한 선물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남긴 편지를 읽기 시작할 때는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원래 익숙한 것들이 더 잘 되지 않는가. 플롯도 단순하지만 숨겨진 내용과 상징들은 무거워서 다시 한 번 읽어도 명작인 소설이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표제작 다음으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SF 판타지 장르로 1부와 2부 정도로 스스로 나누어 읽었다. 실제로 소설이 나누어져 있진 않다ㅋ 어쨌든 읽다 보니 교수님이 내게 읽으라 했던 단편이 이 단편임을 알았다. 왜냐면 괴담……이라면 괴담이라 할 수 있는 요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자들을 홀려서 정기를 빨아 먹는 그런 흔한 구미호 요괴 이야기가 펼쳐지길래 기분이 조금 나빴다. 왜 이 시대에 이런 여자 요괴 이야기를 할까? 했지만 다행히 그런 진부한 요괴 이야기는 아니었고, 산업 혁명과 연관 지어 기계 인간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염의 성격과 그의 미래 방향성이다. 요괴 사냥꾼인 량과 량의 아버지가 어느 날 후리징이라는 구미호 요괴와 그의 딸 염을 만나게 된다. 후리징은 아버지로 인해 죽게 되는데 량은 염을 붙잡지 않고 보내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국에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기계들이 세상을 장악한다. 그렇게 마법의 힘이 점차 약해져 요괴 사냥꾼의 입지는 줄어 든다. 돈벌이가 힘들어진 량의 아버지는 자살을 하게 되고, 량은 염처럼 혼자가 된다. 이렇게 염과 량은 “살아남는 법을 배우”(92쪽)기로 한다. 량은 기차와 철도를 다루는 일을 배우게 되면서 기계 다루는 것에 매우 익숙해지게 된다. 반면에 염은 가진 것은 미美 밖에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하여튼 그래서 몸을 팔며 돈을 버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스테레오 구식 여자로 설정을 해놔야 나중에 읽었을 때 쾌감이 큰 법. 것도 그럴게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된다. 염이 어느 부잣집의 마음에 들게 되어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놈이 약을 먹이고 염을 기계로 개조해버렸다. 기계로만 흥분한다는 그 미친 부자가 염을 성폭행하려 하지만 염의 기계 몸이 그놈보다 더 힘이 강해서 이겨버렸다. 염은 자신의 숨은 힘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량에게 부탁하게 된다. 염의 오랜 소망은 가장 편한 몸인 여우의 몸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는 것이다. 량은 염의 그런 소망을 알기에 그동안 배운 기술들을 이용하고 또 공부하여 몸을 개조해준다. 그 후 염은 더 강해진 몸으로 메탈 여우(책에서는 크롬 여우라고 표기되어 있다)가 되어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친구들을 찾아내 자유를 되찾게 해 주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정말 멋있는 엔딩이다.
이 단편 소설은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 로봇>이라는 단편 영화 시리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뒤늦게 알게 되어 그 회차의 영화를 봤는데 역시 소설이 더 좋다. 그러나 메탈 여우가 된 염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어 그 쾌감은 배가 되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염이 크롬 메탈 여우가 되어 자유를 찾아 떠나는 장면이다.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그간의 고생을 묻고 떠나는 장면이 벅찼다. 또한 염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남성인 량이라는 점도 좋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남성인 량이 조력자가 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아마 남성 작가여서 그런 듯) 그리고 여성인 염이 몸을 팔고 다니는 일만 했다는 것도 진부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의 의미는 크다고 생각했다.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나의 꿈을 향해서 간다는 결말로 향하는 것. 그게 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사실 나도 내 괴담 소설을 쓸 때 그런 여성혐오 적인 것을 타파하기 위해 일부러 여성혐오 적인 시선들을 넣었었는데, 이 소설도 그런 맥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도 원치 않은 내 몸과 성惺을 사고 파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작은 부분만을 떼어 놓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러프하게 감상평을 적긴 했지만 대부분 이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믿으며…….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단편은 가장 마지막 단편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소설은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인간 실험 ‘731부대’를 배경으로 한 SF소설이다. 이 소설은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직접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큐멘터리 스크립트 형식으로 된 이 소설의 주된 정서는 시간 여행, 공간 여행이다. 인류의 역사를 역순으로 볼 수 있는 망원경은 단 한 번 밖에 볼 수 없으며 지나가면 영원히 끝이다. 그곳에 직접 다다르는 것도 아니고 현재 내가 머물러 있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아니니 시간 여행도 아니지만 어쨌든 양자 얽힘 현상을 끌어와 이런 신기한 망원경이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소설에는 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중국인인 켄 리우가 이러한 내용을 써서 일본에는 이 단편이 빠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이가 없다^^)
이 소설이 주는 의미는 이렇다. 그러한 시공간을 보고 오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기술적 특징은 가해자들이 감추려 하는 역사를 영원히 감추려 하는 위선적인 기득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73428.html) “항의 집회를 막느라 가짜 집회 신고를 먼저 하는 기업의 행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어쨌든 이 단편들은 모두 읽어 볼만한 이야기들이다. 현재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AI나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모두에게 추천한다.
'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인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덕분이니까요.'(10쪽)
작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독자가 글을 읽는 것이 보람 있는 노고인 것 또한 내가 작가와, 이 글을 함께 읽는 이와, 서로에게 정신이 닿는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책 읽기는 그러했다. 내가 책을 읽으며 책을 이해하고, 작가를 이해한다는 느낌이 아닌, 내가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에 책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작가의 머리말 말미의 글에서 나는 이미 켄 리우에게 사로잡혔다.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것이 책을 읽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종이 동물원' :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읽어야 할 이야기. 어머니란 존재의 의미를 알려준다.
나는 한줄평을 책 읽기가 끝나갈 무렵 적지만, 이 책의 한줄평은 제일 처음 실린 단편 '종이 동물원'을 읽고 적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 켄 리우는 이 '종이 동물원' 때문에 그 이름이 길이길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한 작품에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이 주어진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이 책에 기대를 걸고 책을 구입한 독자가 이 이야기 외에는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공감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한 편 때문에 구입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에 실린 이야기들도 감동적이고,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이야기지만, '종이 동물원'만큼 특별하지는 않다. 나는 '종이 동물원'의 줄거리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겠다. 이 책을 구입한 독자가 이 특별한 '종이 동물원'을 만끽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공감하기를, 공감력을 키우기를 바란다. 이 짧은 환상적인 단편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최고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는 글로서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
'천생연분' : 내가 가진 인공지능 스피커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는 인공지능 스피커로 멜론 TOP 100을 듣고,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다. "아리야, 악동뮤지션 들려줘." 아침에는 "아리야, 뉴스 들려줘."라고 말하면 아리는 자정 뉴스를 들려준다. 반복되는 명려을 아리가 기억하게 된다면, 알아서 뉴스를 들려주고 내 기분에 맞춰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알아서 들려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거나, 그러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천생연분'을 읽어보라. 그렇게 되려면 나에 대한 빅데이터가 형성되는 것이 전제된다. 나에 대한 빅데이터가 수집된 후 인공지능이 분석한 나에 맞춰 음악을 틀고, 옷을 고르고, 내 이상형을 주선하고, 데이트 장소를 섭외하고 나면 내가 원하는 것인지 AI가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녀주인공이 반란을 꾀하지만, 시대를 돌이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AI를 만든 기업에 남녀 주인공이 인식한 AI의 결함을 개발하는 일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으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어쩌면 우리의 세계는 이 단편 '천생연분"처럼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소설대로라면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그러한 세계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 : 요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좀 슬프다.
뱀 요괴, 성난 귀신, 혼령, 강시, 사람으로 변신하는 여우가 존재하던 세상에 서양 문물이 흘러들어오고 요술이 사라지고 미신이 돼버리자 여우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사람 여자로 살아가는 후리앙인 염과, 대대로 요괴를 퇴치하는 업이 사라져버린 량의 이야기. 량의 염에 대한 우정과 사라이 애잔한 이야기다.
'상태변화' : 슬프지만 낭만적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물질형태의 영혼을 받는다. 주인공은 각얼음 한 조각을 영혼으로 받았다. 각얼음이 녹을까 언제나 냉장고를 옆에 끼고 산다. 언제 녹아버릴지 모르는 각얼음 영혼에 발목을 잡힌 주인공의 사회생활은 우울하고 어둡다. 어느날 친하지 못했던 한 친구에게 편지를 받는다. 그 친구는 담배 한 갑을 영혼으로 받아서 한 갑의 담배를 태우며 자신의 영혼은 소비하고 즐기며 살다가 마지막 한 대를 남겨 두고 애지중지 했는데 그마저 누군가 태워버렸는데도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담배 한 갑이 영혼이 아니라 한 갑의 담배를 품고 있던 담배갑이 영혼이었던 것이다. 각얼음 한 조각의 영혼을 가진 주인공은 목숨을 걸고 맘에 드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일탈을 벌인다. 완전히 녹아버리기 전에 냉동고에 다시 넣을 생각을 했지만, 각얼음은 손톱만큼의 얼음도 남지 않고 녹아버렸다. 물론 주인공은 죽지 않았을 걸? 독자는 각얼음이 아니라 각얼음만큼의 그 물이었다고 짐작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 영혼을 태우며 사는가? 혹은 무의미하게 영혼을 소비하며 살지는 않는가? 켄 리우의 이야기는 매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파자점술사' : 마음을 비추는 거울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타이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비슷한 역사가 있었다. 무고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던 시대말이다. 그 고문관들은 진짜 빨갱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닌 줄 알아도 그러했던 것일까? 아니면, 빨갱이어야 하다고 우긴 것일까? 그들의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잊어서는 안되는 잔인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간다.
형태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우리는 모두 책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켄 리우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뮬라크럼' : 기억과 용서, 그리고 아버지란 남자에 대한 고찰
자식을, 하나뿐인 딸을 애틋하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남자이고, 부인에게 바람을 들킨 이후 다시는 바람을 안 피우겠다며 시뮬라크럼만을 허용해달라고 허락을 받는다. 네 명의 여성의 영상이 쏘아지고 나체의 아버지가 섹스를 그 여성들과 하는 모습을 본 딸은 그 후 아버지와 상대를 하지 않는다. 딸을 잃은 아버지는 그 짓을 당장 그만 두지만 딸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 아버지는 어린시절 모습의 딸의 시뮬라크럼만을 붙들고 추억에 잠겨 산다. 엄마는 죽음에 이르러 딸에게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지만, 딸은 엄마의 시뮬라크럼을 받으러 갔다가 어린시절 머물던 자신의 방에 놓인 시뮬라크럼에 질려버린다. 아버지의 충격적 장면은 시뮬라크럼이란 것도 필요 없이 딸의 기억 속을 떠나지 않아왔다. 아버지가 붙잡고 산 것은 자신의 행위를 들키기 전에 찍어둔 시뮬라크럼 속의 딸이다. 시뮬라크럼은 기억과 치환된다.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고 단순한 대화도 나눌 수 있고 만질 듯 하지만, 없던 일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자신이 떠올리고 싶은 과거에 매여 산 아버지의 삶은 안타깝지만, 딸에게 들킨 그 장면은 끔찍스러운 모습일 뿐이다. 자업자득.
'레귤러' : 레규레이터에 의지해 자신을 항상 레귤러 상태로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의 자기 싸움.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상태는 무엇인가.
형사였던 여자가 딸을 범인에게 잃고 난 후 남편과 이혼하고 탐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잊혀지지 않는 딸을 잃던 순간을 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레귤레이터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리고 다시 같은 상황에 맞닥뜨린다. 범인은 딸 또래의 여자아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 범죄, 범인, 탐정이 나오는 스릴러물인만큼, 긴장감이 느껴지는 단편이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보통의 상태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 어느 우주 방랑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법.
우주 여행을 떠나는 엄마이자 아내가 지구에 남는 남편과 딸에게 남기는 이야기.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파 波 The waves' : 신은 인간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되고, 신이 인간이 되고, ...... .
'모노노아와레' : (삶의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는 감정) 지구에 종말이 온다해도 사람은 서로를 도울 것이며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하여 사람은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이런 걸까?)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略史' : 강제징용을 담아내기에는 문제가 있는 작품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은 잡범조차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에는 공감하고 싶지 않다.
'송사와 원숭이 왕' :감춰진 역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송사의 장엄한 죽음에 숙연해지는 이야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 일본 731부대의 이야기.
그 끔찍한 역사를 감추려는 사람과 기억하려는 사람의 대립.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용서를 어찌하겠는가?
물론 '종이 동물원'은 독보적인 작품이지만, '파자점술사', '레귤러', '송사와 원숭이 왕'도 정말 좋은 작품이다. 역사는 역사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모두 '종이 동물원'을 읽기 바란다. 아무리 마음이 무디고 강철로 두텁게 덮인 사람일지라도 한 오라기 실을 붙잡아 풀어버리고 본연의 나를 찾아 마주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글쎄. 아마
망자들도 살아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 같아. 철도와 기적 소리 때문에 점점 좁아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은 망자도 있을 테고, 못 찾은 경우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아서 잘 사는 경우도 있을까?"
나를 놀라게 하는 염의 재주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지금 행복해? 너 스스로도 톱니바퀴가 된 것처럼 온종일 증기기관을 돌리면서 사는 삶이 행복하냐고. 넌 꿈이 뭐야?"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p.99~100
어린 시절, 엄마는 특별한 장난감을 만들어 주곤 했다. 엄마가 포장지를 식탁에 펼쳐 놓고, 이리 저리 접기 시작하면,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던 울음을 그치고 나도 모르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잠시 후 엄마는 꼬깃꼬깃 접은 종이 덩어리를 입에 대고 풍선처럼 숨을 불어넣었다. 식탁 위에는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조그마한 종이 호랑이가 서 있었다. 내가
손을 뻗으면, 그것은 꼬리를 움찍거리다가 내 손가락을 향해 신나게 덤벼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 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움직였다. 그건 엄마의 마법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짧은 소설 <종이 동물원>은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표제작인 이 작품은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조리 석권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세 가지 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건 40년 동안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신예였던 켄 리우는 세계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가 된다.
전체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에는 판타지, 하드보일드, 대체 역사, 스팀 펑크, 중국 전기 소설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보통 단편집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하더라도 각각의 완성도가 모두 훌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읽을 때, 대충 읽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읽게 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말이다. 사실 열 몇 편 중에 한 두 편만 마음에 남아도, 그 책은 좋은 작품이었다고 인상에 남기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켄 리우의 이 책은 한 편, 한 편 모두다 너무도 뛰어나고, 놀랍고, 대단했다. 각기 다른 장르만큼이나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상상력도 기발했고, 그 속에 담고 있는 정서도 감동적이었고, 탄탄한 문장과 적확한 표현들로 완성도도 뛰어 났으며,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드는 장르적 재미 또한 기가 막혔다. 특히나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는 독자들에게 SF 환상문학에서도 순문학 만큼의 완성도와 감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일상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을 황홀하게 드러내는 놀라운 이야기들’ 이라는 워싱턴 포스트의 평이 절대 과장이 아님을 열 네 편의 작품으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삼라만상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모든 생물종은 대를 이어의 지혜를 전수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거스르지
못할 시간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처럼 잠시나마 동결된 것으로 만드는 방법 말이다.
모두가 책을 만든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중에서, p.195
사실 ‘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은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덕분’ 이라는 저자의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예감했다. 이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다는 것을. 그리고 표제작이자 첫
번째 수록 작품인 <종이 동물원> 을 읽고 나서는, 우선 책을 덮고 인터넷 서점으로 가서 켄 리우라는 작가에 대한 신간 알림을 신청했다.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앞으로 무조건 챙겨보고 싶은
작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작가의 작품이 이제야 국내에 출간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켄 리우라는 작가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한 작품, 한 작품 정말 천천히 아껴서 읽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주옥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개인의 모든 결정을 인공지능이 대신해주는 디스토피아, 인격을 가상현실로
복제해서 체험하는 기계가 등장하는 이야기, 그리고 문화 대혁명, 대만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일본군 731부대의 잔학성을 다큐 형식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등 SF 환상문학의
카테고리로 포함되어 있지만, 판타지가 줄 수 있는 허구보다는 현실이라는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SF 환상문학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독특한 세계관이나 어려운 용어들로 인해 접근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쉽게 말해 이들 장르소설들은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 지루한 초반의 진입 장벽을 깨야 하고, 딱딱하고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그런데 켄 리우의 작품은 그 모든 통념과 편견을 모두 깨고 있다. 물론 다루고 있는 소재들과 이야기의 장치들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법한 독특한 소재도 있고, 누구나 실생활에서 쉽게 생각해 볼 만한 소재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독특한 소재도 어렵지 않게, 평범한 소재도 진부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으며,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사유와 자신만의 철학을 그 속에 녹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들이 모두 감동적이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그물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이다.
왜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일까. 왜 바쁜 일상 속에서 굳이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머리를 써가며 허구의 이야기를 읽는 것일까. 그에 대한 완벽한 답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만나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이 책은 내가
왜 소설을 사랑하는지, 왜 이야기에 매혹되는지에 대한 탁월한 사례이기도 하다. 내 책장에는 매주 신간들이 엄청난 속도로 쌓여간다. 어떤 작품들은
이미 완벽한 망각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고, 그나마 관심 있는 책들만 읽는다 해도 책들이 출간되는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운 상황이지만, 나는 켄 리우의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어 졌다. 나는 되풀이해 거듭 읽고 싶어지는 소설들을 사랑한다. 물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으로는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모두 읽어볼 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으로 우리가 매일 같이 책을 읽어도 죽을 때까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리우의 작품은 또 읽고 싶다. 더 이상 무슨 찬사가 필요하겠는가. 그저 읽고,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