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민규의 잠을 청하기 위한 인위적 시도는 잠시 중단된다.
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 것. 불면의 밤에 시달리는 민규의 그리움에 대한 응답인 것만 같다. 민규는 몸을 일으켜 수신자를 확인하고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폴더를 연다.
“예, 선배.”
‘정우진’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수신자. 상대는 새벽 3시에 전화한 것에 대한 변명이나 부연 설명 없이 바로 본론을 이야기한다.
“설계 건이 하나 들어왔어.”
“설계요?”
“꽤 크다.”
“지금…… 움직여야 하나요?”
민규의 질문에 상대는 주저 없이 답한다.
“물론.” --- p.9
살인사건, 여섯 명 이상 등의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재명을 혼란케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배후에서 뒷돈 챙기고 대충 마무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제대로만 묶고 수사해 범인 색출하면 특진이 보장되는 일이지만 그건 돈과 직접 연결되는 건 아니다. 그 두 가지 셈법에 혼란을 느낀 재명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통화 속 상대가 오히려 초조한 듯 말한다.
“믿기지가 않아요? 사실이에요.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니 윗선이나 아님, 다른 쪽에서 미리 손보려고 하는 것 같고요.”
“그래. 알았어.”
“지금 가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확인해서 맞으면 입금해주시는 거 잊지 말고요.” --- p.19~20
여섯 명이 아니다.
정확히 열 명.
열 명의 남녀가 전라로 누워 있다.
서로 뒤엉킨 남녀의 몸은 결코 안전해 보이지 않는다.
열 명의 몸 전체가 피투성이다.
속옷 하나 입지 않은 열 개의 몸 위에 선혈이 낭자하다.
수많은 핏방울이 실력 없는 화가가 그린 점묘화처럼 무성의하고 산발적으로 흩뿌려져 있다. --- p.21
대형 로펌의 정기 회의지만 비밀리에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로펌 7년 차인 민규가 참석하는 회의는 100퍼센트 비밀회의다. 우진을 제외한 선후배 동료 변호사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 1등 규모의 초대형 기업형 로펌 Y에서 민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가 뭔가 특수 분야의 일을 하거나 아니면 대기업에 꽂아 넣은 로열패밀리 소속의 낙하산이거나. 이 두 가지 생각이 민규를 바라볼 때 품는 관점의 전부다. 하지만 민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로열패밀리 소속도 특수 분야 전문가도 아니다. 그는 설계자다. --- p.37~38
“난 그냥 돈에 환장한 놈이야. 누가 찔려 죽든, 목매달아 죽든 관심 없어. 그냥 돈이 중요하다고.”
“그런 말씀을 지금 제게 특별히 남기시는 이유가 뭡니까?”
“칭찬이야.”
“무슨 칭찬요?”
“자네의 그 멘털이 부러워. 세상 어느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고 그냥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있잖아.”
“대표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난 돈에 약하잖아. 김 변처럼 돈에조차 무관심했으면 이 일, 맡지도 않았어.” --- p.45
“김 변호사는 참 변함이 없어요. 사람 사는 방식이 당신처럼 비인간적이면 좋겠네요. 머리, 꼬리 죄다 커트하고 몸통만 담백하게 얘기하고 일 끝나면 언제 봤느냐는 듯 모른 체하고 말이죠. 근데 말이야…….”
(……)
“강남에서는 그렇게 사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무슨 뜻이죠?”
“강남처럼 더럽게 인간적인 곳이 또 어디 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느냐 이 말이오.”
“…….”
“(……)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열 명이 피투성이 된 채 죽어 나갔어. 그런데 신문 기사는커녕 인터넷 찌라시 하나 없이 잠잠하네. 당신은 이런 걸 비인간적이라 생각하지. 난 반대야. 너무 인간적이라 이런 설계가 가능한 것 아닌가 싶어. 몽키도 그렇고.” --- p.49
여성 희생자들의 사진과 신상을 살펴보던 민규는 한 명의 희생을 처리하는 데 사용된 비용이 평균 3천만 원을 넘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의 가치가 산술적 차원으로 변환되면 얼마나 비루해지는지, 민규는 언제나처럼 덤덤하게 바라본다. 스무 살 남짓한 술집 출신의 여자에게 매겨지는 산술적 가치가 중형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것이다. --- p.72
“뒤탈 없겠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완벽해요. 서류가 아닌 말은 법원에서 효력이 없으니까.”
“하긴 그 자식들, 입이라도 뻥끗하면 그 바닥에서 돈 벌긴 다 글러먹을 텐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베팅을 할 리는 없겠지.”
“제 잔금…… 48시간 안에 입금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 p.107
재명은 잠시, 찰나적 순간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의 끝에서 언제나 한 장의 불평등 각서가 낙인처럼 그의 생각을 지배한다. 2억 원이 넘는 도박 빚과 관련된 채무이행 각서. 물론 도박 빚 따위는 갚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모르는 재명이 아니다. 문제는 경찰이 거액 도박판에서 편취를 했든 갈취를 당했든 참여했다는 것과 거기에 액땜 삼아 상습적으로 미성년 여자들과 성매매를 했다는 문제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민경식이든 누구든 강남 하우스를 장악한 이들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 p.145
김 대표의 표정과 눈빛은 그 혼자만의 특징이 아니다. 열 명이 넘는 다른 변호사도 일제히 민규를 알 수 없는 무표정과 영혼을 멈춰 세운 듯한 무정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덤덤하게 있다가 갑자기 상대를 할퀼 것 같은 전의를 품은 눈빛을 가진 변호사들, 일한 만큼의 대가를 지급받는 강남 구성원들을 바라본 민규는 우진을 비롯해 모여 있는 그들, 전체에게 묻는다. (……)
“그 친구들은 왜 설계해야 하죠?” --- p.177
민규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자신의 몸속 깊이 파고드는 걸 외면하지 못한다. 검은빛의 아늑함, 그 베일을 찢고 가장 노골적인 망설임이 마성의 착란을 일으킨 탓이다. 극도로 세련되거나 지독히 위선적인, 서글프기까지 한 〈풀밭 위의 식사〉처럼 로펌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아내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