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형편에 꿈조차 없던 학창 시절, 지방대 그것도 야간대를 다니며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365일 단 하루도 쉼 없이 일해야 했던 나날들, 버티다 못해 결국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야했던 시간들……. 한국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나는 그야말로 ‘흙수저’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만약 나 스스로도 그 기준을 받아들이려고 했다면 지금 남들이 예상했던 만큼의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가 내게 강요하는 기준에 맞춰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길을 가고자 했고, 조건과 배경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원하는 세상을 만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뛰어든 세상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나를 인정해주는 일과 사람들이 있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행복하게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의 노력이 컸다.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는 나만의 공간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한동안 시무룩해하곤 했다. 높은 지대로 이사 갔을 때는 오르막길을 오를 때마다 짜증 부리기 십상이었고, 종아리가 아파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렇게 달래주었다.
“나영이가 곧 어른이 되면 그때는 혼자서 살아야 하고, 엄마가 해준 밥도 자주 못 먹을 텐데 지금 이렇게라도 온 가족이 함께 잘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니?”
또 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엄마도 힘들긴 하지만 저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못 보는 풍경을 우리는 한눈에 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보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던데?”
신기한 것은 그런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단칸방도 아늑하게 느껴지고, 산동네의 우리 집도 특별하게 보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엄마는 나에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 Chapter1 「이사가 익숙한 아이」 중에서
이제 다음 달이면 인턴십의 마지막 근무 기간인데 정직원이 돼도 걱정, 되지 못해도 걱정이었다. 도대체 뭐가 옳은 길인지, 지금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지금 있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고 다짐하며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메일 수신 알림이 떴다.
‘로얄캐리비안 크루즈 출국 대기자 김나영 님, 승선을 축하드립니다.’
메일을 읽는데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읽고 있는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읽고, 또 읽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또박또박 곱씹으며 읽어봐도 나의 승선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한 심정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09년 10월 9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나는 내 인생의 첫 크루즈인 로얄캐리비안 크루즈의 레전드 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 Chapter2 「꿈에서 마침내 현실로」 중에서
오전 교육을 받을 때부터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오후가 되자 속이 메슥거리고 배가 아파왔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구토를 했지만 속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고, 나중엔 설사와 구토가 동시에 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점심때 먹은 음식이 잘못된 걸까 생각해봤지만 같이 식사한 다른 승무원들은 멀쩡한 걸 보니 음식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아픔을 참아가며 일을 하는데 증상이 점점 심해져 아예 서 있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큰 문제는 음식 서빙을 하는 일이다 보니 냄새를 맡거나, 음식을 보기만 해도 증상이 더 악화되는 것이었다. 나의 이 증상은 바로 ‘뱃멀미’였다.
크루즈 승무원이 되고자 결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고민해본 적도 없는, 걱정거리가 될 거라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는 뱃멀미. 그 뱃멀미가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이다. 더 이상했던 건 이집트로 가는 항로는 파도가 거세지도 않았고, 크루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승무원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 Chapter3 「뱃멀미하는 승무원이라니」 중에서
로얄캐리비안 크루즈의 대표인 리처드 페인이 직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크루즈의 꼭대기에는 왜 지붕이 없는지 아시나요?”
당시 객석에서는 ‘수영장에 햇볕이 들어야 일광욕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항해할 때 해변에 있는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요’, ‘빗물을 받기 위해서요’ 등 창의적이고 엉뚱한 대답들이 나왔다고 한다. 조용히 직원들의 대답을 듣던 리처드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헸다.
“지금이 나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 때, 크루즈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손에 닿는 것이 천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끝이 없는 하늘처럼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가 우리 위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크루즈 꼭대기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 Chapter3 「크루즈에 지붕이 없는 이유」 중에서
“나영 씨, 내년 행사까지는 아직 8개월이나 남아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행사 자체가 워낙 큰 규모인데다 주주총회까지 함께 치러지는 행사인 만큼 지금부터 준비해도 시간이 모자랄 수 있어요. 우리가 중국에 자주 올 수도 없고요. 그래서 나영 씨가 필요해요. 중국에서 진행될 이 행사의 담당자가 되어주었으면 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들을 바라만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장님은 “나영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지만 입사한 지 이제 3개월 지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일정표와 주주 명단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데 본사 직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만찬은 만리장성에서 진행했으면 해요. 만리장성은 빌릴 수 있죠?”
이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지만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아직 빌려본 적이 없어서요. 하하하…….”
난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보려고 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농담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Chapter4 「미션 임파서블, 만리장성을 빌려라!」 중에서
“나영 씨, 쇼핑을 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죠?”
“호텔 지하 1층으로 나가시면 백화점과 연결돼 있어요. 혹시 찾는 브랜드가 있으시면 알아보고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호텔 아래의 쇼핑몰? 이미 갔다 왔는데 너무 화려해서 나하고는 안 어울리던걸요. 혹시 주변에 중국인들이 자주 가는 시장은 없는 건가요?”
언뜻 들으면 편한 외국인 친구나 관광객과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화 속 주인공은 전 세계 120여 국에 약 36,000개의 매장을 둔 글로벌 패스트푸드 기업 M사 CEO의 아내, 톰슨 부인이다. 나는 대기업 CEO의 아내인 그녀가 당연히 명품 브랜드를 선호하고 고급 백화점에서의 쇼핑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가 ‘시장’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 Chapter4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