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속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세상은 그 이야기에 도무지 관심이 없더라. 어제 사람이 죽어서 인구가 한 명 줄어버린 관내를 오늘 아무렇지 않게 순찰해야 하는 직업,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떨어져나온 탓에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 그게 경찰관이더라. --- p.12
네가 언제 어디서 신고를 해도 나는 또다시 너를 발 벗고 찾아 나설 거다. 그러니까 부디 잘 살아라. 이를 꽉 물며 되뇌었지. 그리고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살길 바라면서. --- p.24
법은 문지방을 넘을 수 없다는 말로, ‘그래도 가족이잖아’ 따위의 말로, 가정 안에서 일어난 명백한 범죄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는 게 더 이상 허용돼선 안 돼. 우리는 그런 말을 그만 두고 가정폭력 피해자, 특히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해결해주어야만 해. --- p.35
있잖아, 언니. 한 가지 분명한 건 고향이 베트남 어디냐는 나의 질문에 잠시나마 눈물을 거두고 활짝 웃으며 대답하던 그분은, 남편 손에서 떠날 수 있도록 택시를 잡아준 나에게 고맙다며 손을 잡아주던 그분은, 한 명의 인간이었고 눈부신 여자였어. 돈에 이리 저리 팔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납작하게 밟아버리는 물건 따위가 아니라. --- p.57
언니, 죄는 뭐고 형벌은 뭘까? 생명에도 여러 가지 기준을 들이밀며 선을 그을 수 있을까? 넌 죽어도 마땅한 사람, 넌 나라에서 보호해줘야 하는 사람. 이런 현장의 중심에 있는 경찰관은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며 어떤 기준을 세워 지켜나가야 할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 언니, 더 이상 이 사회에 정의라는 건 없는 것 같다는 기막힌 현실만 알아갈 뿐이야. --- p.69
할머니는 이름이 없대. 아들 아들 노래를 부르던 시대에 딸로 태어난 죄로 아빠라는 사람은 자신을 안아준 적이 일평생 한 번도 없었다는군. 그리고 얼굴이 넓적하니 못생겼다고 늡때기, 그러니까 얼굴이 넓다는 뜻의 사투리를 이름 대신 부르면서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다더라. 이름도 없이, 부모가 출생신고도 하지 않고, 결국 존재는 하지만 서류상으론 없는 사람으로 평생 주민등록증 하나 가져본 일 없이 살아오신 거야, 강늡때기 할머니는. --- p.88
누군가 쓰러져 죽어간 곳을 누군가 밟고 일어 서며 오늘을 살아가는 곳이 바로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학생의 어머니는 순찰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참 많이도 우셨어. 그럴 리가 없는데, 걔가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왜 그랬을까. 당사자에게 닿지 못할 질문을 내가 들은 거야.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없는데. --- p.107
오늘도 술에 취한 남자는 파출소에 전화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출동하라고 소리쳤지. 전화를 받은 나는 무슨 일로 그러시냐고 물었지만, 그 남자는 출동하라면 하는 거지 짭새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고 입 닥치고 출동이나 하라더라.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지 않았고, 지금도 그 입을 열고 언니에게 얘기를 하고 있어. --- p.140
경찰이 현장에서 안일하게 대응한다고, 팔짱 끼고 지켜만 본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들이 도배되고 국민들은 그 기사를 보고 경찰관을 비난하지. 하지만 경찰관의 손발을 잘라버린 건 누구인지, 그게 다 경찰관만의 잘못인지, 주목해야 할 다른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그 모든 것의 근본적인 이유를 조명해야 할 때야. 남은 경찰관이 더 이상 이런 일을 걱정하지 않고 당당히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소극적인 경찰 행정으로 인해 선량한 시민이 피해 입지 않도록, 경찰 로또라는 단어가 사라질 때까지. --- p.157
현실은 언제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는구나. 드라마야 보기 싫으면 TV를 꺼버리면 되지만 그분의 인생은 어떡할까? 눈 감는다고 안 보이고, 고개 돌린다고 외면할 수 있는 현실이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러고 싶어. 두 눈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하지만 경찰관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한이 있어도 두 눈을 부릅뜨고 현장을 쳐다봐야만 해. --- p.176
언니, 나는 오늘도 일기에 써.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한 명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데 언니, 나는 또 다른 걸 알고 있어. 한 명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그 가능성마저 져버리기엔, 나는 그럼에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라는 걸.
--- p.179